<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레프 니콜라예비치 구밀료프 Lev Nikolayevich Gumile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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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2년
10월 1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사망 |
1992년
6월 15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직업 | 역사학자, 민족학자, 인류학자, 번역가 |
국적 |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어머니
안나 아흐마토바 아버지 니콜라이 구밀료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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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프 구밀료프는 소련의 역사학자, 민족학자, 인류학자이자 페르시아어 번역가로, 파시오날리티 이론과 민족 발생 이론(ethnogenesis)으로 잘 알려져 있다.2. 생애
레프 구밀료프는 저명한 두 시인, 니콜라이 구밀료프(Nikolay Gumilyov)와 안나 아흐마토바(Anna Akhmatova)의 아들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7세 때 이혼했고, 1921년, 아버지는 레프가 9세였을 때 처형되었다.레프 구밀료프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그는 레닌그라드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했으며, 특히 고대 유목 민족과 중앙아시아의 역사에 관심을 두었다. 하지만 그의 학문적 여정은 정치적 탄압과 억압으로 점철되었다. 1930년대 말, 그는 여러 차례 체포되었으며, 이후 스탈린 체제 하에서 굴라그로 보내졌다. 레프는 1938년부터 1956년까지 소련의 노동 수용소에서 대부분의 청년기를 보냈다. 그는 1935년 NKVD(소련 국가보안위원회)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938년에 다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마친 뒤 그는 적군에 합류해 베를린 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나 1949년에 또다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 생활을 이어갔다. 그의 어머니 안나 아흐마토바는 레프의 석방을 위해 스탈린을 찬양하는 송가를 발표했으나, 이는 그의 석방에 기여하지 못했다. 다만 이는 어머니 자신이 체포되는 것을 막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녀의 체포 명령은 준비되었으나, 스탈린은 서명하지 않았다.
레프와 어머니 사이의 관계는 긴장된 상태였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충분히 돕지 않았다고 비난했으며, 아흐마토바는 이러한 감정을 자신의 작품 《레퀴엠》에 담아 표현했다.
스탈린 사후, 구밀료프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근무하며 학문적 연구를 재개했다. 박물관의 관장 미하일 아르타모노프는 구밀료프의 멘토가 되었고, 그의 지도 아래 구밀료프는 하자르 제국과 유목 민족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그는 볼가 삼각주와 북캅카스를 탐사하는 여러 고고학 탐사에 참여했으며, 하자르 제국의 몰락 원인 중 하나로 카스피해 범람 이론을 제안했다.
1960년대, 그는 레닌그라드 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1962년에는 고대 튀르크족에 관한 박사 논문을 방어했다. 이후 지리학연구소에서 활동하며 또 다른 박사 논문을 방어했다. 하지만 구밀료프의 이론은 소련 공식 학설과 충돌했으며, 그의 많은 저작물이 출판 금지를 당했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그의 학문은 대중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구밀료프는 199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니콜스코예 묘지(Nikolskoye Cemetery, 알렉산드로-네브스키 수도원 부지 내)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는 유라시아주의를 지지하거나 그의 사상을 따르는 이들에 의해 종종 방문되곤 한다.
3. 이론
3.1. 민족 발생 이론(ethnogenesis)과 파시오날리티(passionarity) 개념
구밀료프는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발생한 수 세기에 걸친 유목 민족의 이동을 설명하기 위해 지리적 요인을 중시했다. 특히, 태양 복사량의 연간 변화가 초원의 크기에 영향을 미쳐 목축 가능 지역이 줄어들 때 유목민들이 유럽이나 중국의 비옥한 초원으로 이동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그는 민족 집단의 생성과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파시오날리티"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는 특정 시점에서 민족 집단, 특히 그 지도자들에게 나타나는 확장적 활동성을 의미한다. 그는 민족이 탄생, 발전, 절정, 관성, 수축, 기념 단계로 이루어진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했다.
3.2. 러시아와 유목 민족에 대한 관점
구밀료프는 러시아를 "초민족(super-ethnos)"으로 간주했으며, 이를 유라시아 초원의 튀르크-몽골 민족과 친화적이라고 보았다. 러시아가 유목 민족과 충돌했던 시기조차 그는 이를 러시아와 초원의 세력이 가톨릭 유럽의 파괴적 영향에 맞서 통합되던 시기로 재해석했다.4. 저서
- 《고대 튀르크인의 역사》 (The Ancient Turks, 1967)
- 《역사적 과정에서 민족》 (Ethnos and the Structure of History, 1989)
- 《대초원의 고대인들》 (The Huns, 1993, 사후 출간)
- 《하자르인과 세계사》(Хазары и мир истории)
- 《러시아와 대초원》(Россия и Великая Степь)
- 《민족과 민족성》(Этнос и этногенез)
- 《열정론: 민족의 흥망성쇠》(Этногенез и биосфера Земли) (1979년)
- 《유라시아인의 운명》(Судьба Евразии)
- 《지구의 생물권과 민족》(Биосфера и этнос)
- 《흑해의 역사적 운명》(Исторические судьбы Черного моря)
- 《회고록: 시대와 나》(Мемуары: Время и я)
- 《역사를 통해 본 인간》(Человек в истории)
- 《유라시아주의란 무엇인가》(Что такое евразийство)
- 《유라시아 초원의 민족》(Народы Великой степи)
5. 여담
- 카자흐스탄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새로운 수도 아스타나의 중심 광장에 레프 니콜라예비치 구밀료프 유라시아 국립대학교를 설립해 그의 유산을 기렸다.
-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는 중세 유대인을 기생적이며 국제적인 도시 계급으로 묘사하며, 하자르 제국을 지배하고 초기 동슬라브족에게 "하자르 지배"를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대 문화가 본질적으로 상업적이며 환경과 대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 유라시아주의자이다. 러시아가 단순히 서유럽 문명의 변형이 아니라, 튀르크-몽골 유목 민족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했다고 보았다. 가톨릭 서유럽이 러시아 문명을 잠식하려는 위협적 존재라고 보았고, 이에 맞서 유라시아적 정체성을 통해 러시아가 초원 민족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