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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2-07 12:55:58

라슈트


파일:라슈트 이란.jpg
1900년경 지어진 시청사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도시
رشت

라슈트 | Rasht
지역 길란주
면적 180km²
인구 956,971명 (2016년)
인구밀도 3,778명/km²
시장 사예드 아미르호세인 알라비
홈페이지 http://rasht.ir/
파일:이란 우체국.jpg
20세기 초에 세워진 우체국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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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 북부 길란 주의 주도. 시가지는 카스피해 엘부르즈 산맥 사이에 위치한다. 이란에서 11번째로 큰 도시이자 북부 지역 최대의 도시이다. 약 전주시 만한 넓이에 인구는 96만에 달하여 이란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이다. 15km 떨어진 항구인 반다르 안잘리를 통해 바다 건너 러시아와 교류가 활발하다. 별명은 '비의 도시' (شهر باران)과 '유럽의 관문'이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 덕에 근대 들어 러시아의 잦은 침공에 시달렸으며, 현재도 카스피해 송유관이 지나가기에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현대 이란에서는 대표적인 산업 도시로 중시되었으며, 도시 북쪽에 잔갈 라슈트 국제 공항이 위치한다. 시내에는 근대 유럽 풍의 건축물이 많고, 서남쪽으로 40km 떨어진 산중의 휴양지 마술레가 주요 관광지이다.

2. 역사

파일:이란 라슈트 2.jpg
1895년 라슈트 그림

682년에 처음 언급되었고, 13세기부터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지명은 뜨개질이란 의미인 레슈탄에서 유래되었다. 사파비 왕조 시대에 라슈트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1669년 코사크 군벌 스텐카 라진의 습격을 시작으로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이 나타났다. 1714년 지진을 겪은 도시는 1722년 12월 러시아-카자르 전쟁 당시 표트르 1세에 의해 점령되었다. 10여년간 러시아 지배를 받던 도시는 나디르샤가 러시아와 대오스만 동맹을 맺으며 체결한 1732년의 라슈트 조약으로 나머지 북부 이란과 함께 페르시아령으로 회복되었다. 러시아와의 지속적인 교류로 라슈트는 이른 근대화를 겪었다. 19세기 카자르 왕조 시대에는 이란의 첫 국립/공립 도서관, 첫 극장, 첫 국립병원, 첫 은행 (세파흐 은행), 첫 약국 (카룬 약국), 첫 여학교, 첫 소방서, 첫 비단 공장, 첫 상하수도, 첫 버스 체계가 성립되었다. 또한 첫 근대적인 신문인 나심 에 쇼말이 간행되었다.

러시아, 영국, 오스만 제국이 첫 공사관을 세운 곳 역시 라슈트였다. 1858년 라슈트의 인구는 약 30만명이었다. 1901년 라슈트는 역병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20세기 초엽 진행된 입헌 혁명 당시 라슈트 출신의 미르자 큐차크가 주요 지도자였다. 1차 대전 시기인 1917년에는 러시아군이 반다르 안잘리와 라슈트를 점령하였고, 1920년 미르자 큐차크를 지도자로 하는 페르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라슈트를 수도로 하여 성립되었다. 다만 1921년 레자 샤 팔라비의 공격에 다시 페르시아령이 되었다. 1937년에는 러시아로부터의 도로세를 걷으려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1974년에는 서독의 도움으로 라슈트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란 혁명 이후로도 라슈트는 꾸준한 해외 투자를 받으며 독자 노선을 유지하는 이란에서 상당히 국제적인 도시로 남아있다. 현재까지도 러시아의 공사관이 위치하며 많은 해외 관광객들을 유치한다.

3. 야경

파일:라슈트 이란 1.jpg
근대화의 상징인 시청사와 우체국의 야경
파일:이란 라슈트.jpg
시청사의 야경. 겨울에는 영하권까지 내려가기 때문에 밤에는 서늘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