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시즌 참가 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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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코레일 FC | |
Daejeon Korail FC | |
<colbgcolor=#323c93><colcolor=#fff> 정식 명칭 | 대전코레일축구단 |
영문 명칭 | Daejeon Korail Football Club |
창단 | 1943년 1월 28일([age(1943-01-01)]주년)[1] |
1961년([age(1961-01-01)]주년) 혹은 1962년 10월([age(1962-10-01)]주년)[2] | |
구단 형태 | 기업 구단 |
소속 리그 | K3리그 |
연고지 변천 |
인천광역시 (2004~2013) 대전광역시 (2014~ ) |
홈구장 변천 |
인천문학경기장 보조경기장 (2004~2007) 인천문학경기장 (2008~2013 / 49,084석) 한밭종합운동장 (2014~2021 / 17,371석) 대전월드컵경기장 보조경기장 (2021~ / 478석) |
클럽 하우스 | 대전광역시 동구 우암로 246번길 65 |
구단명 변천 |
조선총독부 철도국 축구단 (1943~1945) 철도국 축구단 (1945~1948) 교통부 축구단 (1948~?[3]) 철도청 축구단 (1963~1994) 한국철도 축구단 (1995~2003) 인천 한국철도 (2004~2007) 인천 코레일 (2007~2013) 대전 코레일 FC (2014~2019, 2023~ ) 대전 한국철도 축구단 (2020~2022) |
모기업 | 한국철도공사 |
구단주 | 한문희 |
감독 | 김승희 |
주장 | 김동욱 |
웹사이트 및 소셜미디어 | | | | |
우승 기록 | |
전국체전 (3회) |
2000, 2001, 2011 |
내셔널리그 (2회) |
2005, 2012 |
내셔널축구선수권대회 (3회) |
2013, 2015, 2018 |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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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단과 클럽 하우스 |
2019년 K리그1 강호를 연달아 격파하고 FA컵 결승에 오르는 코레일의 기적을 선보이며 한국 축구계를 놀라게 했다.
2. 시즌별 일람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93c4ed><tablebgcolor=#93c4ed> |
대전 코레일 FC 시즌별 일람 |
시즌 | 리그 | FA컵 | 전국체육대회 | |||||||||
리그 | 순위 | 경기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
2020 | K3리그 | 7 | 22 | 8 | 8 | 6 | 30 | 18 | +12 | 32 | 3라운드 | 연기 |
2021 | K3리그 | 9 | 28 | 8 | 12 | 8 | 32 | 30 | +2 | 36 | 2라운드 | 축소 |
2022 | K3리그 | 9 | 30 | 12 | 5 | 13 | 28 | 36 | -8 | 41 | 16강 |
3. 역사
역사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1943년[5]에 창단된 조선총독부 철도국 축구단(이하 '조선철도국 축구단')이 그 모체이다. 대략 교통부 → 철도청 → 한국철도공사로 이어지는 한국철도의 역사와 함께 따라다녔던 축구단이기도 하다.해방 후 1948년에 철도국이 교통부(現 국토해양부) 산하로 들어가자 교통부 축구단이 되었고 1950년에 실업축구대회에도 참가했지만 6.25 전쟁을 거치면서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961년 한국철도 38년만에 첫 우승할까 혹은 1962년 10월에 교통부 산하 공작창의 수장이었던 김명익 대령에 의해 재창단하였고,[6] 1963년 9월 1일 철도국과 공작창 등을 포함하여 교통부의 외청으로 철도청이 신설되면서 철도청 축구단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전까진 정부기관 산하 스포츠팀들이 그렇듯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스카우트에서 뒤처져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후 1996년 철도청이 CI를 "한국철도"라는 명칭으로 공식적으로 일원화 하였다. 그래서 1년전인 1995년부터 한국철도 축구단으로 구단명칭을 변경하여 실업축구단에 참여하였고, 2004년 내셔널리그의 방침에 따라 연고 지역명을 붙이게 되어 인천 한국철도 축구단이 되었다. 이후 2005년 철도청이 공사화되어 한국철도공사가 되고, 2007년 5월 한국철도공사의 CI가 코레일로 통합됨에 따라 인천 코레일이 되었다. 2007년에는 홍보 부족으로 구 명칭과 새 명칭을 혼용했지만, 2008년 변경된 명칭으로 일원화 되었다.
인천 시절의 홈구장은 2007년까지는 숭의종합경기장이었으나, 경기장이 철거되면서 2008년부터 2011년까지는 인천문학경기장 보조구장을 사용하였다. 2012년 인천 유나이티드가 홈구장을 인천축구전용경기장으로 옮기면서 비게 된 인천문학경기장 주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단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인지도는 낮다. 아는 사람만 아는 축구단. 그래도 약팀이라고 보기도 힘든 것이, 2005년 내셔널리그에서 1위를 하고, FA컵에서도 4강에 올랐다[7]. 2011년 전국체육대회에서도 1위를 하고, 내셔널 리그에서도 꾸준히 3~5위권 안에 드는 팀이다.
2012년에는 리그 5위를 차지하며 6강 플레이오프에 오른다. 첫 경기는 4위 창원시청과의 경기. 여기서 2:0으로 승리한 인천 코레일은 3위 강릉시청을 꺾은 리그 6위 용인시청을 상대한다. 이 경기에서도 3:1로 인천 코레일은 승리하며 준결승에 오른다. 준결승 상대는 내셔널리그의 대표강호인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축구단. 정규리그에서 2위를 차지한 울산은 선제골을 넣는다. 하지만 인천은 후반 35분부터 10분 동안 동점골과 역전골을 집어넣으며 울산마저 무너뜨렸다. 남은 상대는 정규리그 1위인 고양 국민은행 축구단.
준플레이오프부터 경기를 치른 인천과 달리 고양은 1위 메리트로 결승전에 직행,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객관적인 전력에서도 인천보다 우위였다. 따라서 경기전 예상은 고양의 승리로 점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결승전 1차전에서 인천은 우세한 경기력을 바탕으로 고양을 1:0으로 침몰시키며 반전극은 시작되고 있었다. 결승전 2차전에서 전반에 인천은 고양에게 1실점을 한채로 경기를 마친다. 1,2차전 점수 합계 1:1. 결승전은 연장으로 접어든다. 연장 전반 종료 직전 코레일은 그림같은 프리킥으로 고양의 골문을 열어젖힌다. 이후 연장 후반에는 2골을 더 넣으면서 우승이 가까워졌고, 종료 직전 고양이 한 골을 만회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2차전 3:2 인천 승. 통합점수 4:2. 이것으로 2012년 내셔널리그 챔피언은 인천 코레일로 정해진다. 리그 5위 팀이 준플레이오프 1차전, 2차전. 플레이오프를 거쳐 챔피언에 오르는 기적을 연출하면서 인천 코레일은 내셔널리그 통산 2번째 우승을 차지하면서 시즌을 마친다.
또한, 2013년 내셔널리그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천안시청을 5:0으로 이기면서 첫 내셔널리그 선수권 대회 우승을 경험하기도 한다.
2013년을 끝으로 연고지를 대전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하였다. 한국철도공사의 본사가 대전에 있다는 점과 기존에 대전이 연고지였던 한국수력원자력 축구단이 경주로 연고지 이전을 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인 듯하다. 인천광역시 체육회에서는 전국체전 출전 팀과 매년 2명을 연고지에서 뽑아 주던 팀을 잃은 것이 아프다. 한국철도공사 입장에서는 본사의 직원들을 동원할 수 있으니, 200여명 정도였던 관중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014년에는 14승 7무 6패 승점 49점으로 정규리그 1위를 기록하며 챔프전에 직행하였다. 챔프전에서 울산 현대미포조선과 대결하는데 원정 경기였던 1차전에서 0-2으로 패했고, 홈경기이었던 2차전에서 1-1로 비기면서 통합 스코어 1무 1패로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2015년에는 8승 9무 10패 승점 27점으로 5위를 기록해 결승 PO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내셔널리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무관을 탈출했다. 2016년에는 지난 시즌보다 리그 성적이 저조하지만 선수권 대회에서는 2위, 전국체전에서 4위까지 올라가 반은 성공했다는 평이 대다수다.
2018시즌 FA컵 2018시즌 예선 3라운드에서 광주 FC를 3:1로 이기고 32강에 진출했다.
2019시즌 FA컵 2019시즌 32강전에서 울산 현대[8]를 2:0으로 이기는 대이변을 연출하며 16강에서 서울 이랜드 FC와 맞붙었고 2:0으로 이기면서 8강에서 강원과 맞붙어서 또다시 2:0으로 이기며 프로팀들을 차례차례 밟으며 4강에 진출했다. 이번 FA컵 2019시즌은 대이변의 연속이다. 4부리그 격인 K3리그 어드밴스의 화성 FC가 1부리그인 K리그1의 경남을 2:1로 이기고 K3리그 포함 최초 K3리그 어드밴스팀이 4강에 올라가는 대이변을 연출했다.[9] 4강 1차전에는 상주상무에게 1골을 헌납했지만 후반 추가시간에 동점골을 넣어서 1대1로 마무리 하게 되었다.
4강 2차전에는 태풍 미탁이 올라오는 수중전의 혈투를 펼치게 되었다. 대전 코레일의 선취골로 앞서가나 싶었지만 상주상무의 따라가는 동점골로 1대1로 정규시간 종료 1,2차전 총 집계로 2대2 원정다득점도 동률이 되어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연장전에서는 상주상무가 PK를 얻어 이길것 같았으나 동점골을 넣어 결국 결승에 가는 것은 승부차기로 넘어가게 되었다. 승부차기에서는 상주상무 1번 키커가 실축을 하여 무난하게 이길 것 같았지만 대전코레일 4번 키커가 실축을 하여 3대3이 되어 승부가 안개 속으로 갔다가 상주상무의 4번 키커 김경중의 실축 그리고 코레일이 마지막 승부차기를 무난하게 성공시키며 구단 사상 첫번째, 그리고 내셔널리그 소속 팀으로는 2005년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이후 2번째이자 마지막으로 FA컵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 수원을 제외한 모든 K리그 팬들이 한국철도를 응원하며 위 아 더 월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프로 팀이 아니기에 우승하더라도 AFC 챔피언스 리그 참가 자격은 없다. 안타깝게도 결승 2차전에서 4:0으로 크게 지며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지만, 경기 내내 절대 물러서지 않고 계속 공격해 나가는 등 이번 FA컵을 통해 구단의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내셔널리그 마지막 시즌인 2019 시즌은 4위로 마무리했다. 이후 2020 시즌부터 K3리그에 참가하며 구단 명칭을 모기업의 지시로 인해 대전 한국철도 축구단으로 바꾸며 한국철도 라는 명칭을 다시 쓰게 됐다. 2020년 7월 1일경 문서 처리내역을 보면 新 K3리그 라이센싱 조건 충족을 위한 클럽 법인화가 진행중인 것으로 보인다. #
2022년부터 베이스볼 드림파크 공사로 인한 한밭종합운동장 주경기장의 철거에 따라 대전월드컵경기장 보조경기장을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2023년 1월 3일 팀 명칭을 다시 대전 코레일로 변경하며 3년만에 회귀했다
2027년부터 대전월드컵경기장 보조경기장에 떠나 서남부스포츠타운 주경기장을 새로운 홈구장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3.1. 창단 연도 논란
1943년 창단 연도에 관하여 명확한 근거자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해체 후 공백기를 가지다가 1961년 혹은 1962년 10월에 교통부 산하 축구단으로 재창단을 했으며, 그 후 창단 연도는 1961년 혹은 1962년으로 축구계에서 통용되다가 대략 2005년 이후부터 1943년 창단 연도 견해가 나온면서 뒤바뀐 것이기 때문에 창단 연도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내셔널리그 홈페이지 및 한국철도 축구단에서는 공식 창단 연도를 1943년이라고 공표하고 있지만 이 1943년이라는 연도가 공식적인 창단식을 했다거나 하는 명확한 근거자료에 의거해서 나온 연도는 아닌 것을 문의 결과 인정하였다. 즉 예전부터 1943년에 창단했다는 말이 계속 내려오면서 전해진 것으로 명확한 근거자료들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현재 내셔널리그 연맹과 한국철도 축구단에서도 계속 조사중이다. 실례로 전조선축구대회 1927년 대회에 참가한 팀들 중에 철도국 축구단이 존재하며 參加團體廿八(참가단체입팔) 出戰健兒四百餘(출전건아사백여) 실업축구연맹 결성이라는 1939년도 신문기사를 보면 대한민국 최초의 실업축구리그인 경성실업축구연맹에 철도국 축구단이 참가한 것으로 나온다. 실업축구연맹결성 모체가 되는 축구단의 역사가 더 오래될 가능성도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공식 발표대로 1945년에 조선철도국 축구단으로 창단이 되었더라도 해당 축구단이 연속성있게 운영되어 현재의 대전 코레일 축구단으로 이어진 것이 절대 아니며, 또한 1943년 창단 연도 견해는 2005년 이후 나온 견해로 그 이전까지는 축구계와 축구 언론 등에서 교통부 시절 재창단한 1961년 혹은 1962년이 창단 연도로 통용되었다.네이버 옛날신문에서 1990년대 기사를 보면 1961년 창단으로 일괄되게 보도되고 있으며, 철도청 축구단과 관련되어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문헌자료인 월간축구 1982년 10월호 36P에서는 1962년 10월 창단으로 나오고 있으므로 1961년과 1962년 중 어느 창단 연도가 정확한 재창단 연도인지는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 네이버 옛날신문 - 1961년 창단으로 보도하고 있는 1990년대 신문기사 결론적으로 현재 공표하고 있는 1943년 창단 연도는 외국의 유서 깊은 축구단처럼 1943년에 창단되어 현재까지 연속성있게 역사와 전통이 이어진 축구단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며, 이렇게 한번 해체 후 공백기를 가지고 재창단을 했던 축구단들의 경우 기준없이 축구단 마음대로 오랜 역사를 쓰고 싶은 구단은 모체 창단 연도를 사용하고, 서울 이랜드 FC처럼 신생구단임을 내세우고 싶은 구단은 후신 창단 연도를 사용하는 등 일관된 기준이 없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즉 모체인 조선철도국 축구단의 1943년 창단 연도가 정확한 것인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비유하자면 서울 이랜드 FC가 2014년에 신생 구단으로 창단하였고 당대에 계속 이렇게 인식되고 기록되다가 50년 정도 세월이 지난 후 " 서울 이랜드 FC의 모기업인 이랜드그룹이 1992년에 창단했던 이랜드 푸마라는 축구단이 있었네, 축구단 역사는 오래될 수록 좋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후대 사람들이 운영 주체가 동일한 기업이었다는 이유로 창단 연도를 1992년으로 변경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10]. 즉 결론적으로 1943년부터 연속성있게 구단이 운영된 것이 아닌데 1943년을 창단 연도로 공표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논란이다.
그리고 대전 한국철도 축구단도 문제인 것이 1943년을 창단 연도로 공표하려면 그래도 축구단 관련 당시 흑백 사진이라도 하나라도 찾거나, 이런 자료가 없으면 서고라도 뒤져서 1943년도 1대 감독부터 현재 감독까지의 감독 연혁 등 기초적인 문헌 자료라도 정리하는 노력 혹은 과거 축구단의 감독, 선수, 행정가들을 수소문해서라도 어떻게 1943년 창단 연도가 유래된 것인지 밝힐 노력을 해야 되지만, 1943년 창단 연도 견해가 처음 나온 대략 2005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구단 소개문에 "1943년 조선철도국 축구단으로 창단" 텍스트 한 문장으로 공표하는 것 이외에는 근거자료 발굴 등 진척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또한 축구 언론 포함 축구계도 역시 문제인 것이 "대전 한국철도 측에서 1943년 창단이라고 공표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 의문도 제기도 하지 않고 공식 구단 소개문에 기재해 주고, 언론사에서는 1943년 창단으로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네이버 옛날 신문을 검색하면 1990년대에 모든 언론사에서 한국철도 축구단의 창단 연도를 1961년으로 일괄 기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네이버 옛날신문 - 1961년 창단으로 보도하고 있는 1990년대 신문기사, 아래 첨부된 대전 한국철도 축구단과 관련하여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언론 문헌 사료인 월간축구 1982년 10월호 36페이지 기사에 의하면 1962년 10월 창단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1982년이면 조선철도국 축구단 관련해서 당대에 뛰었던 선수들도 여전히 축구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들도 꽤 남아있고, 자료들도 의지를 가지고 조사하면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을텐데도 조선철도국 축구단에 대한 일절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철도국 축구단은 축구계에서 1961년 혹은 1962년 창단으로 완전히 인식되었던 것으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즉 2005년 이전에는 1943년 조선철도국 축구단으로 창단 이런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덧붙여 1943년이라는 창단 연도를 2005년 이후 대전 한국철도 축구단이 최초로 스스로 정립을 하고 그 후 인터넷상에서 퍼진 것인지, 아니면 인터넷상에서 대전 한국철도는 1943년 창단된 조선철도국 축구단을 모체로 한다는 글들이 게시되는 것을 대전 한국철도 축구단 측에서 발견하고 이를 받아들여서 창단 연도를 정립한 것인지 이 부분도 사실 불분명하다.
한국실업축구연맹 히스토리 북 내 실업축구 역사 중 대전한국철도축구단이 1943년보다 더 이전에 창단됐을 수 있다는 흔적도 찾을 수 있다. 1930년대 서울에서 공기업, 은행 등 실업팀이 회원으로 가담한 경성 실업 축구연맹이 창설됐는데, 이 때 대회 자료 중 대전한국철도축구단의 전신인 철도청축구단의 경기 기록이 있다. 1939년 열린 제1회 실업축구리그에서 철도청축구단이 경성구락부를 5-1로 꺾으며 우승을 거뒀다고. 축구계에서는 이 대회가 현대 한국 실업 축구의 시발점이라고 본다고 한다.
* 월간축구 철도청 축구단 소개 기사 - 1982년 10월호 36~38페이지
4. 우승 기록
- 전국실업축구연맹전(1회): 2000년 춘계대회
- 한국 내셔널리그(2회): 2005, 2012
- 전국체전(3회): 2000, 2001, 2011
- 내셔널축구선수권대회(3회, 최다우승): 2013, 2015, 2018
5. 선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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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코레일 FC 2024 시즌 스쿼드 |
1
김철호 · 3
황준석 · 4
김윤진 · 5
송민종 · 6
박승렬 · 7
전보민 · 8
손경환 10 이상협 · 11 박예찬 · 13 류승범 · 14 김동욱 · 15 장성록 · 16 유승범 · 17 박찬빈 18 하재현 · 19 이인규 · 20 문진용 · 21 오찬식 · 22 박재우 · 23 장현수 · 24 최영훈 · 26 김광희 27 장동혁 · 29 김태환 · 31 황치윤 · 33 한승진 · 37 곽철호 · 77 공다휘 · 97 김무건 |
김승희 ·
김찬석 ·
이광진 ·
김형운 이상옥 · 우제명 |
* 본 문서는
간소화한 것입니다. 스쿼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타 구단으로 임대한 선수는 제외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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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코레일 FC 2022 시즌 스쿼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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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 이름 | 포지션 | 국적 | 생년월일 | 신체 조건 | 비고 |
1 | 박태원 | GK | 1994년 4월 7일 | 188cm, 82kg | |||
4 | 김윤진 | DF | 1995년 3월 30일 | 185cm, 78kg | |||
5 | 최규백 | DF | 1994년 1월 23일 | 188cm, 77kg | |||
6 | 김경연 | MF | 1992년 11월 3일 | 173cm, 75kg | |||
7 | 김영규 | FW | 1995년 1월 4일 | 168cm, 66kg | |||
8 | 송민우 | MF | 1993년 12월 13일 | 180cm, 70kg | |||
9 | 최치원 | MF | 1993년 6월 11일 | 178cm, 73kg | |||
11 | 박예찬 | FW | 2001년 1월 16일 | 170cm, 63kg | |||
12 | 황치윤 | GK | 2002년 4월 2일 | 187cm | |||
13 | 손경환 | DF | 1993년 4월 2일 | 178cm, 76kg | |||
14 | 박요한 | MF | 1994년 12월 17일 | 181cm, 74kg | |||
15 | 방찬준 | FW | 1994년 4월 15일 | 184cm, 78kg | |||
16 | 송수영 | FW | 1991년 7월 8일 | 172cm, 68kg | |||
17 | 김동욱 | MF | 1990년 4월 4일 | 179cm, 79kg | |||
18 | 김민혁 | DF | 2000년 3월 24일 | 180cm, 72kg | |||
19 | 이인규 | DF | 1992년 9월 16일 | 184cm, 80kg | |||
20 | 김규환 | DF | 1998년 6월 23일 | 184cm, 76kg | |||
21 | 유승범 | MF | 2004년 5월 28일 | 182cm | |||
22 | 박찬빈 | FW | 2000년 1월 21일 | 177cm | |||
23 | 정성욱 | GK | 1998년 3월 4일 | 186cm, 75kg | |||
24 | 최영훈 | DF | 1993년 5월 29일 | 185cm, 79kg | |||
26 | 이찬울 | MF | 2002년 11월 7일 | 182cm, 74kg | |||
27 | 장동혁 | MF | 2003년 11월 3일 | 180cm, 70kg | |||
30 | 김해식 | DF | 1996년 2월 12일 | 173cm, 67kg | |||
35 | 김병오 | FW | 1989년 6월 26일 | 183cm, 85kg | |||
37 | 곽철호 | FW | 1986년 5월 8일 | 186cm, 81kg | |||
44 | 권성윤 | FW | 2001년 3월 30일 | 176cm, 69kg | |||
66 | 강태욱 | DF | 1992년 5월 28일 | 176cm, 71kg | |||
77 | 공다휘 | FW | 1994년 1월 8일 | 176cm, 69kg | |||
94 | 구본혁 | MF | 1998년 2월 9일 | 175cm, 68kg | |||
구단주: 한문희 | 감독: 김승희 | 홈구장: 한밭종합운동장 |
6. 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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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코레일 FC 역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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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현창 |
2대 김승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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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한국철도 역대 감독 | |||
대수 |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초대 | 이현창 | 2003 ~ 2006 | - |
2대 | 김승희 | 2007 ~ 현재 | 전국체전 우승 (2011) |
7. 유니폼
2022 시즌 대전 한국철도 축구단 유니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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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업 | 프린팅 | 유니폼 메이커 | |||||||||||||||||||||
8. 사건 사고
- 2020년 6월 6일, 화성 FC와의 대한축구협회 FA컵 2라운드 경기에서 연장 후반, 양팀간 몸싸움을 포함한 다툼이 벌어졌다.
-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 2:2로 양팀이 팽팽히 맞서던 연장 후반, 화성 FC의 공격수 김레오가 상대 수비 실수를 틈타 페널티 박스로 들어오자, 대전 한국철도 장원석이 공에 머리를 가져다 대는 상황에서 김레오가 넘어졌다. 설태환 주심은 장원석이 손을 뻗어 김레오를 넘어뜨렸다고 판단해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판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대전 한국철도 선수들의 집단 항의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장원석과 황준석이 경고 누적으로 퇴장했다. 경기가 재개된 뒤 키커로 나선 최치원이 침착하게 골을 넣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점수는 3:2로 화성의 우세가 되었다.
- 문제는 곧이어 터졌다. 연장 후반전 추가시간 대전 한국철도 이관표가 공을 몰고 가는 화성 FC 최치원을 백태클로 저지했다. 그러자 화성 FC 선수들이 이관표를 밀쳐 불만을 표시했고, 얼마 뒤 양 팀 선수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 신영록 화성 FC 플레잉코치가 그라운드로 들어와 이관표의 목을 잡고 거세게 나무라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이들이 둘을 떼어놓아 심각한 폭력 사태로 번지진 않았지만, 선수와 코치 간 무력 충돌로까지 번진 난투극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대전 한국철도 코치들도 상대 돌발행동에 분을 삭이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기가 3분 가까이 지연된 끝에 김승희 대전 한국철도 감독과 김학철 화성 FC 감독이 악수로 마침표를 찍었다. #
- 대한축구협회는 이후 심판 소위원회를 열고 논의한 결과 해당 판정을 정심으로 결론내렸으며, 관계된 선수와 코치들을 상대로 징계 절차를 검토하기로 했다. #
9. 서포터즈
아즐블랑코라는 서포터즈 그룹이 존재한다.10. 엠블럼
2002년까지 사용했던 인천 한국철도 로고.
내부 캐릭터는 한국철도공사의 舊 마스코트 치포치포.
2003년부터 사용하는 새 엠블럼과 유니폼. 기관차를 말하는 철마를 철로 된 말로서 표현하여 엠블럼을 만들었다. 이후 2023년 대전 코레일로 복귀하면서 이 엠블럼을 다시 쓰게되었다. (다시 쓰는 엠블럼에서도 별 두개는 빠져 있다.)
2020년 팀명 변경으로 엠블럼도 약간의 변경이 불가피했는데 2020년부터 K3리그에 참가하는데도 내셔널리그 우승을 상징하는 별 2개는 빼지 않았었으나, 2022년 FA컵에 참가하는 엠블럼 기준으로는 2개의 별이 빠져 있다.
11. 여담
- 2018년에는 기존의 흰색이 아닌 빨간색을 홈 유니폼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1년만에 다시 하얀색으로 변경했다.
- 축구팬 사이에서 불리는 별명으로 로코모티브 대전이 있다. 여러 언어에서 로코모티브는 기관차를 뜻하는데 국가의 철도청이 축구단 운영에 개입하고 있는 경우 팀 이름 앞에 로코모티브를 붙이는 일이 많이 있어서 붙여진 별명이다.[11]
-
모기업이
한국철도공사이다 보니 KTX는 기본적으로 제공받고 경기를 다닌다고 하며 팀에 공헌도가 있는 선수들을 한국철도공사의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 그리고 이번 2019년 FA컵 결승에도 한국철도공사 정규직 특채가 걸려있다. 다만 모든 선수가 다 정규직 전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12년에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한 후, 김승희 감독이 팬들과의 식사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 자리에서 내셔널리그 우승으로 정규직 전환되는 선수가 2명이라고 밝혔다. 이를 미루어 보면, 인사고과와 관련된 점수가 있고, 대회 우승 및 준우승 등으로 점수를 부여하며, 그 점수를 만족시키는 사람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최소 몇 년 정도는 한 팀에서 꾸준히 공헌할 수 있는 선수여야 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 2019년 한국 내셔널리그 참가 당시 기준 대전 한국철도의 경우 선수 최저 연봉이 3천만원 중반대이며, 출전 수당으로 한경기에 단 1분만 뛰어도 20만원이 나온다고 한다. #
- 스포츠니어스 대표기자 김현회에 따르면 2019년 한국 내셔널리그 해체 당시 이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구단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유는 노조의 세가 강한 공기업 특성상 비용이 올라가는 통합 K3리그 참가에 부정적이어서 잔류하는 팀이 있다면 내셔널리그에 남으려 했지만 대부분의 구단이 통합 K3리그에 참가하게 되면서 결국 K3리그에 참가하게 되었다.
- 베이스볼 드림파크 공사로 인해 2022년부터 홈구장인 한밭종합운동장을 사용하지 못한다. 한밭종합운동장은 서남부종합스포츠타운 예정지로 이전하게 되며, 새 종합운동장이 조성되기까지 충남대학교, 대전체육고등학교 등이 육상 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실업축구팀 코레일 홈구장으로는 대전월드컵 보조경기장이 활용된다. # 이후 서남부권에 대체 경기장이 완공 되면 홈구장도 그곳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 2014년 인천에서 대전으로 연고지를 이전했지만 2018년까지 경기만 대전에서 하고, 경기도 안양시에서 숙소생활을 했다. 이후 안양 숙소가 노후화되어 2019년 대전시 동구 가양동에 클럽하우스를 마련해 이전하면서 완전한 대전 연고 세미프로구단이 되었다.
- 1990년대 초반까지는 대회에서 늘 꼴찌를 도맡는다고 해서 꼴도청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1999년 이현창 감독 부임이후 2000년 6월 춘계 실업연맹전에서 무패 우승을 하면서 강팀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성적이 좋아지면서 모기업 한국철도 역시 구단 버스를 제공하고 열악한 숙소를 개선시켜 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12]
12. 주요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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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총독부 철도국 축구단이라는 이름으로 창단, 가장 오래된 내부 기록이 1943년인데 1927년 전조선축구대회에 철도팀이 있었으니 실제 창단은 그보다 더 일찍 했을 가능성이 크다.
[2]
교통부 산하 축구단 교통부 내
공작창 수장인 김명익 대령이 창단을 주도했으므로 공작창 위주로 창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3]
교통부 축구단 명칭을 사용한 축구단이 정확하게 언제 해체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4]
참고로 가장 오래된 프로 축구단은
포항 스틸러스로
1973년에 창단했다. 물론 창단 당시는 프로 구단이 아니었다.
[5]
재창단 연도는 논외로 하고, 모체인 조선철도국의 1943년 창단 연도 또한 불확실해서 내셔널리그 연맹과 대전 한국철도 구단 측에서도 조사중이다. 아마도 예전 기록이 6.25 전쟁 및 관리 부실로 분실해서 그런 듯. 네이버 옛날신문을 검색하면 1939년에 작성된 실업축구연맹결성으로 당시 철도국 축구단이 경성실업축구연맹에 참가한 것으로 나오며 1935년에는 철도국이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다는 기록까지 나왔기 때문에 모체가 되는 축구단의 역사는 더 오래될 수도 있다. 아무튼 1943년이라는 연도가 틀릴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한다.
[6]
창단 연도 논란 단락의 월간축구 1982년 10월호 36P 기사 사진 참고
[7]
문제는 이때 같은 내셔널리그 팀인 울산 현대미포조선이 결승에 올라가서 성과가 상대적으로 묻혀 버렸다.
[8]
FA컵 진행 당시
K리그1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9]
이 때문에
대전 시티즌을 내셔널 리그로 보내고 대신 한국철도를 K리그로 보내자는 드립도 있었다. 한국철도공사가 공기업이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10]
공식적으로는
고양 Hi FC의 전신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1]
대표적으로 러시아의
FC 로코모티프 모스크바, 우즈베키스탄의
로코모티프 타슈켄트 FK가 있다.
[12]
이전까지 전용훈련장이 없어서 한강 둔치에서 조기축구회와 연습 경기를 하기도 했고, 구단버스도 없어서 원정을 갈 때 선수들의 개인차량을 나눠타서 이동했고 식사는 집에서 싸온 김밥에 휴게소에서 산 라면으로 떼우기도 했다. 숙소도 열악해 비만 오면 물이샜고, 조리사가 없어서 이현창 감독이 장을 봐오면 그의 부인이 음식을 만들어서 선수들을 먹였다고 한다.
[13]
코레일의 레전드이자 원클럽맨,코레일에서 코치직을 맡았고 현재 코레일의 감독으로서 2019년 사상 첫
대한축구협회 FA컵 결승 진출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14]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에 실패해
부천 SK로 입단하기 전까지 이 팀에서 선수로 활동했다,철도청에 들어오기 전에 충북 제천시 한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로 잠시 일했는데 당시 별칭이 무장공비였다.
[15]
코레일 소속으로 공식 경기엔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그래도 코레일 출신 축구인들 중 인지도로는 손에 꼽는 편.
[16]
2019년 FA컵 결승 진출의 주역중 하나이자 코레일의 레전드
[17]
이때 당시에는 현재 뛰는 센터백,수비형 미드필더가 아닌 미들라이커로서 코레일의 득점을 책임졌던 선수였다. 또한 현재 센터백이나 수비형 미드필더치고 득점력이 뛰어난것이 이때부터 알수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