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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4:57:40

다카쓰 신고/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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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 이전
1.1. 아마추어 시절
2. 프로 경력
2.1. 야쿠르트 스왈로즈2.2. 메이저 리그 진출
2.2.1. 2004 시즌2.2.2. 2005 시즌
2.3. 일본 복귀2.4. 두 번째 메이저 리그 도전2.5. 한국 KBO 리그 도전2.6. 세 번째 메이저 리그 도전2.7. 대만 CPBL 리그 도전2.8. 독립리그 시절, 그리고 은퇴

1. 프로 이전

1.1. 아마추어 시절

어릴 때부터 히로시마 시민구장에 자주 가서 고향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경기를 자주 보며 야구를 좋아하게 되었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고향의 소년야구팀에 입단하며 야구를 시작하게 된다.

중학교 졸업 후 히로시마 공고에 진학하여, 이때부터 투구폼을 스리쿼터에서 언더핸드로 바꿨으며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86년 투수 1루수로 활약하며 야구부를 봄, 여름 연속으로 코시엔 진출에 성공시켰지만 우승까지 이루진 못했다. 이후 아지아대학에 진학하여 동기인 코이케 히데오와 함께 야구부의 에이스 투수 콤비로 활약하며 4학년 때인 1990년 야구부를 춘계, 추계 연속으로 소속리그인 동도대학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동년의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90년 드래프트 3위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하게 된다.[1][2]

2. 프로 경력

2.1. 야쿠르트 스왈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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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야쿠르트 구단 입단식에서.

입단 당시에는 선발로써의 활약이 기대되는 선수였다. 초기엔 특별히 눈에 띄는 투구를 하지 않았고 초기 2년간의 성적도 6승 4패에 4점대 방어율로 그닥 좋진 않았지만, 노무라 카츠야 감독 휘하에서 오랜 훈련을 거쳐 슬로우 싱커를 주무기로 발전시키게 되었고, 언더핸드 투구폼에서 사이드암으로 바꾼뒤 1993년부터 마무리 투수로 전향을 하여, 이해 시즌 5월 2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프로 첫 세이브를 달성하였다.[3] 그 후 마무리 투수로 시즌 내내 활약하면서 이해 시즌 6승 4패 20세이브를 기록하면서 야쿠르트의 3번째 리그 우승(겸 구단 사상 첫 리그 연패)과 구단 사상 18년 만의 2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한다.

1994년 19 세이브 27 SP로 최다 세이브와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을 차지한 것을 필두로[4], 1996년까지 3년간 야쿠르트의 주전 마무리 투수로 자리잡으면서 노무라 카츠야 감독 시기의 야쿠르트 황금기를 지탱했다. 그러나 1997년엔 부진한 모습을 보이게 되어, 잠시 선발 투수로 보직을 변경했지만 선발로서도 별로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해 결국 이해 시즌은 중간계투+마무리 투수를 번갈아 가며 뛰었다. 이해 시즌 야쿠르트는 5번째 리그 우승과 4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고 타카츠도 일본시리즈에서 팀의 우승을 결정짓는 헹가래 투수가 되는 기쁨을 맛봤지만, 시즌 전체 성적은 7승 4패 7세이브로 예전보단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5] 이듬해인 1998년엔 더더욱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결국 마무리 투수 자리를 잃게 되었고, 시즌 성적도 2승 3패 3세이브 방어율 5.56으로 프로 데뷔 이래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1999년, 노무라 카츠야의 후임으로 취임한 와카마츠 츠토무 감독에 의해 다시 마무리 투수로 복귀하였고, 이해 시즌에 30세이브 31SP를 기록하여 다시 최다 세이브와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화려하게 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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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르트의 황금기를 지탱한 동료 후루타 아츠야와 함께.

2001년에도 37세이브 37SP[6] 최다세이브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팀의 리그 우승에 공헌한다. 일본시리즈에서는 55홈런의 터피 로즈를 필두로 한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막강타선[7]을 무실점으로 묶으며 팀의 우승에 공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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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28일 200세이브의 금자탑을 쌓은 다카쓰.

2003년엔 2승 3패, 34세이브 36SP를 기록, 4년 만에 다시 승리투수가 됨과 동시에 커리어 사상 4번째 최다 세이브+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을 차지하였고 사사키 카즈히로가 보유했던 일본통산 229세이브의 기록을 갱신하였다.

2.2. 메이저 리그 진출

2.2.1. 200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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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의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2003년 시즌 오프, 해외 FA를 행사해 연봉 75만 달러의 단년 계약(성적에 따라 2년차에도 계약 가능한 옵션이 붙었다)으로 메이저 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해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입단 첫 해인 2004년에는 6승 4패 19세이브 4홀드 평균자책점 2.31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WHIP도 0점대를 찍었으며, 무엇보다도 35세의 나이에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투표에서 2등을 했다.[8] 이 성적을 바탕으로 시즌 오프 때 옵션을 행사하여 연봉 250만 달러의 단년 재계약을 하였다.

2.2.2. 200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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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음 해에는 미스터 제로의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방어율이 6점대에 거의 다다를 모습을 보일 정도로(5.97) 심하게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시즌 도중인 7월 18일 전력외통보를 받고 8월 1일 방출. 그 후 곧바로 8월 12일 뉴욕 메츠와 마이너 계약을 한 후 9월에 다시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지만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한 채 시즌 종료 후 다시 방출된다. 시즌 종합 성적은 2승 2패 8세이브 4홀드 방어율 5.20(...) 여담으로 이해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88년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면서 우승 반지를 획득했다.[9]

2.3. 일본 복귀

2.3.1.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절

이후 후루타 아츠야가 새로이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고, 팀명에 연고지 도쿄가 붙은 친정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 테스트를 받고 2006년 복귀하게 된다. 시즌 초에는 중간계투로 활약했지만 당시 야쿠르트의 셋업 투수 겸 마무리 투수조인 이시이 히로토시, 이가라시 료타[10]가 부진하는 바람에[11] 다시 마무리 투수로 복귀한다. 이해엔 팀 최다의 13세이브를 기록하였고 덤으로 사사키 가즈히로에 이어 미·일 통산 300세이브를 기록한다.

이듬해인 2007년에도 마무리 투수로 뛰었으나, 시즌 도중인 6월 말 아키타현 원정경기 중 머물던 호텔 욕실에서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왼발 엄지발가락에 전치 3주의 골절상을 입으면서 전력에서 이탈했고, 이후 부상 여파인지 블론세이브가 늘면서 결국 8월 도중 2군으로 강등, 시즌 말 다시 마무리 투수로 복귀했지만 결국 최종전 전날인 10월 10일 전력외 통보를 받으면서 야쿠르트에서 방출되었다.[12][13]

이후 현역생활을 이어갈 것을 표명하고 NPB 트라이아웃에 참여했지만, 2차례나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입을 원하는 구단이 나오지 않으면서 결국 NPB를 떠나게 된다.

2.4. 두 번째 메이저 리그 도전

이후 2008년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스프링캠프에 초청 선수로 참가했다. 하지만 시범경기에서 9점대 방어율을 찍는 처참한 모습을 보이며 결국 시즌 개막 전 방출되었다. 이후 메이저리그 데뷔팀이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입단 테스트에 도전했지만 불합격했다.

2.5. 한국 KBO 리그 도전

2.5.1. 우리 히어로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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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메이저 리그 재입성은 이뤄내지 못하고, 2008년 6월 우리 히어로즈의 대체 외국인선수로 입단, 한국 무대를 밟게 된다.(계약금 6만 달러, 연봉 12만 달러) 팀이 워낙 침체됐던 시기여서 18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했지만,[14] 그래도 1승 무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0.90으로 호투하며 이렇다할 마무리 투수가 없었던 히어로즈의 뒷문을 잘 지켰다. 그러나 공격력 보강을 위해 외국인 야수를 구하겠다는 구단의 방침 때문에 재계약은 하지 못했다. 첫 세이브 영상

턱돌이가 다카쓰 신고를 응원하기 위해 기모노를 입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

다카쓰 이후에는 2010년부터 손승락이 히어로즈의 뒷문을 책임졌다. 짧은 시간에 등판도 적었으나 호성적을 남긴 덕에 히어로즈 구단 최고 마무리 투수는 다카쓰였다는 우스갯소리도 종종 나온다.[15]

2.6. 세 번째 메이저 리그 도전

2009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 때 이미 나이가 무려 40세였기에 결국 메이저 리그 승격은 이뤄내지 못했다.

2.7. 대만 CPBL 리그 도전

2.7.1. 싱농 불스 시절

2010년엔 싱농 불스와 계약을 한다. 이로써 4개국의 리그를 경험한 최초의 일본인 선수가 된다.[16]이제 호주가서 쿠옹과 세이브왕 경쟁만 하면 된다..는 둘다 은퇴

2010년 시즌엔 1승 2패 26세이브 2홀드, 방어율 1.88로 리그 최강급의 모습을 보였다. 근데 잘하는 건 좋은데 승부조작으로 질이 떨어질대로 떨어져서 이런지도 모른다. 전기 우승 당시 마무리 투수를 맡아서 우승을 결정짓는 투수에게 주어지는 특권인 헹가래 투수가 되었고, CPBL 세이브 순위 2위의 호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다만 본인도 이제 점점 나이가 차오른다는걸 느끼는지 올 시즌은 전력투구모드였다고 한다.

아무튼 싱농이 전기 우승팀이 되어 대만으로 진출하자마자 바로 타이완 시리즈로 가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타이완 시리즈에서 싱농 불스가 4연패로 무너지면서(...) 결국 타이완 시리즈 우승은 이뤄내지 못했다.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나이 탓인지 결국 시즌 종료 후 재계약 불발로 방출되었다.

참고로 이 시즌 무피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반 정도를 보낸 히어로즈 시절에도 홈런을 1개 허용했는데 대만에서는 풀 시즌을 뛰고도 한 개도 맞지 않았다.

2.8. 독립리그 시절, 그리고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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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리그에서 돌아온 이후 일본 독립리그 야구단인 니가타 알비렉스 BC에서 뛰게 되었다.

팬들은 이제 은퇴하고 훌륭한 코치나 감독이 되어서 뛰어난 투수들을 많이 길러내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너무 현역만을 고집하는 탓에 코치나 감독이 될 기회마저 없는거 아닌가하고 걱정하는 눈치다. 쿠도 키미야스와 비슷한 현역중독에 걸린거 아니냐는 소리도 있다. 1년차인 2011년에는 세이브왕을 차지할 정도로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2012년 시즌은 알비렉스에서 감독 겸 선수로 뛰었다.

하지만 2012년에는 감독 겸 선수인데 선수로는 1경기도 안 나오다가 결국 44세의 고령을 이기지 못하고 2012년 9월 4일 선수 은퇴를 결정하였다. # 은퇴 경기에서는[17] 경기 종료 뒤 야쿠르트에서 팀의 황금기를 함께한 동료였던 후루타 아츠야가 다카쓰의 공을 받는 이벤트를 연출하기도 했다.[18]


[1] 타카츠 본인은 고향팀이었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 입단을 희망했지만, 당시 카프에선 언더스로 투수 영입을 원하지 않아서 카프 입단은 이뤄지지 못했다. [2] 여담으로 동기 코이케 히데오는 이해 드래프트에서 무려 노모 히데오와 공동 최고기록인 8구단 드래프트 1위 지명을 받게 된다. 그러나 코이케는 입단 희망 구단(세이부, 야쿠르트, 요미우리)을 밝혀 놓은 상태였고, 그에 반해 당시 최약체 비인기팀으로 악명 높았던(...) 롯데 오리온즈가 교섭권을 획득하자 입단을 거부하고(드래프트가 생중계되고 있는 그 현장에서 "(롯데의 지명이) 쇼크네요"라고 말했다.) 사회인 야구로 가게 된다. 그런데 사회인 야구 리그에서 뛰던 도중 부상을 당하게 되면서 기대치와 평가가 대폭 하락해 버렸고, 1992년 다시 드래프트에 참가해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에 드래프트 1위로 입단하지만 부상 등으로 인해 결국 1997년 다승왕 획득을 제외하면 아마추어 시절의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프로에선 51승 47패의 다소 초라한 성적만을 기록하고 은퇴했다. [3] 하지만 이날 마쓰이 히데키 프로 첫 홈런의 제물이 되었다(...) [4] 세이브 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이시게 히로시와 공동이었다. 참고로 이 해를 끝으로 NPB에서 20세이브 미만의 최다 세이브 수상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 [5] 다만 방어율은 2.04로 전년도보다 1점 이상 내려갔다. [6] 세이브와 SP가 똑같은 이유는, 승리투수를 기록하지 못해서다(...) 전년도인 2000년에 무승에 그치며 10년 연속 승리투수 기록이 좌절되었고, 타카츠의 무승은 2002년까지 계속되었다(...) [7] 이 때 긴테쓰의 타선은 '이테마에 타선'(いてまえ打線, 오사카 사투리로 '박살내라'라는 뜻의 속어라고 한다)이라 불리면서, 팀 방어율 꼴찌의 부실한 투수진에도 불구하고 팀타율 .280, 팀홈런 211개의 무지막지한 타선의 힘으로 퍼시픽리그 정상에 올랐다. 이 당시 긴테쓰의 타선은 101홈런을 합작하며 홈런왕(로즈), 타점왕(나카무라)를 독식한 터피 로즈, 나카무라 노리히로와, 17홈런 치고 95타점을 챙긴 이소베 코이치 등의 클린업 트리오뿐만 아니라 요시오카 유우지, 카와구치 켄시 등 3할-20홈런급의 쟁쟁한 타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8] 이 해 AL 신인왕은 오클랜드의 유격수 바비 크로스비가 차지했다. 여담이지만 3위는 다름아닌 꼴자스 빠따에 고통받은 잭 그레인키. [9] 우승 반지 항목 참조. 메이저리그는 우승 시즌에 로스터에 등록되어 있었다면 활약상과 관계없이 반지를 준다. [10] 각각 당시 일본인 좌/우완 투수 최고구속기록 보유자였다. 팬들에게는 '로켓 보이스'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11] 이시이는 어깨 수술, 이가라시는 토미 존 수술(팔꿈치)을 받았다. 이가라시가 2008년부터 재기에 성공해 잠깐이나마 메이저리그 무대도 밟아보고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일본시리즈 우승도 경험한 뒤 현재까지도 선수생활을 계속하는 것과 달리, 이시이는 5년간 재활했지만 은퇴경기를 빼면 1군 마운드를 한 차례도 밟지 못하고 2011년 은퇴. 여담으로 이시이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부터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는 등 부진했기에, 돈트렐 윌리스와 함께 반농반진으로 이승엽에게 큰 무대에서 홈런을 맞고 커리어가 박살난 투수들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12] 후루타 아츠야가 감독 사임 겸 선수 은퇴를 선언하자마자 바로 전력외 통보를 받았는데, 이것은 야쿠르트 프런트와 사이가 좋지 못한 후루타와 친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13] 실제로도 후루타의 선수 은퇴경기였던 10월 7일 히로시마 카프와의 홈경기에서 9회초 수비에서 마지막으로 포수 마스크를 쓴 후루타와 배터리를 맞추어 삼자범퇴로 마무리했을 정도였다. 또한 마찬가지로 후루타와 절친한 후배였던 좌완 에이스 이시이 카즈히사는 이해 시즌 종료 후 FA를 행사하여 도망치듯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했고, 외국인 강타자 알렉스 라미레스도 야쿠르트를 떠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명목상으론 라미레스와 야쿠르트 간의 희망 계약기간+연봉이 맞지 않아서였지만 실상은 후루타의 퇴진 때문이란 설이 유력하다.) 이후 스토브리그에서 마무리감을 찾던 야쿠르트는 사이드암 투수인 임창용을 값싸게 영입하며 마무리 자리를 맡겼고 다카쓰의 빈자리를 메꾸게 된다. [14] 이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가 있는데, 일본의 NHK에서 일본과 미국을 거쳐 대한민국에서 활약하는 신고의 모습을 취재하여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로 기획하고 한국에 취재 팀을 파견하였으나 때마침 소속 팀인 우리 히어로즈가 부진해 그의 마무리 등판 기회 자체가 부여되지 않아 한동안 그가 세이브를 올리는 모습을 취재하지 못하였다. 거기다 베이징 올림픽으로 올림픽 브레이크까지 겹쳐서 NHK 스태프들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다카쓰를 취재하지 못하였다. 한국의 야구 팬들 사이에서는 이러다가 NHK 직원들이 집에 못 가는거 아니냐는 농담 반 걱정 반의 우스갯소리가 나왔고, 머나먼 세이브라는 인간극장을 패러디한 유머글도 나왔다. # 결국 한번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기어이 세이브 장면을 찍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팬들은 NHK의 장인 정신에 박수를 보냈다. 두산 베어스 이리키 사토시도 똑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15] 야구에 만약이란 건 없다지만 그가 등판기회가 더 많았더라면 더 많은 세이브를 올렸을지 모른다. [16] 이 이후에 4개국의 리그 경험한 선수는 국적을 넓히면 아리엘 미란다 제이크 브리검이 4개국의 리그를 경험한 선수가 되었다. [17] 이날 한 타자만 상대하여 아웃을 잡고 0.1이닝 던졌다. 그리고 그것이 2012년의 유일한 등판. 사실상 선수로서는 2011년이 마지막이다. [18] 여담으로 후루타의 은퇴 시합에서 현역 마지막으로 배터리를 이룬 투수 역시 다카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