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노수정(盧秀貞) |
생몰 | 1894년 10월 26일 ~ 1948년 9월 9일 |
출생지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중암리 |
사망지 | 경상남도 함안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노수정은 1894년 10월 26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중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9일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愛在 )·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과 함께 3월 20일 함안읍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미리 태극기를 제작한 후 인근 지역에 계획을 알렸다. 이윽고 3월 20일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의 신창학교에서 학생 50명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군북 장터에 있던 그는 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했다. 오후 1시경, 3천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해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오후 5시경, 5천 명으로 늘어난 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했다. 이에 일본 군경을 무차별 사격을 가해 21명을 사살하고 18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많은 이들을 체포했다. 이때 노수정 역시 체포되었고, 1919년 6월 27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함안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48년 9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노수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