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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2-20 22:55:42

남원군주의

파일:군정십책.png

1. 개요2. 내용3. 외부 링크

1. 개요

南原君奏議. 조선 전기의 문신인 양성지(梁誠之, 1415 ~ 1482)가 당시 왕이었던 세조에게 상주(上奏)한 글들을 직접 모아 편찬한 책.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서적12사상소문(書籍十二事上疏文)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양성지가 관료 재직 시절 세조에게 직접 상주하였던 글들을 모아 성종 13년인 1482년, 사망하기 직전에 편찬한 상소문 모음집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3年, 壬寅 年, 明성화<成化>18年 기록에 따르면 봉장 10여통을 들고 춘추관(春秋館)의 요속(僚屬)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평소에 선왕께 아뢴 것인데 《사기(史記)》와 아울러 기록할 만하다.’[1]고 하였으나 성종의 요속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크게 자책하며 이르기를 '세조(世祖)께서 나를 왕좌지재(王佐之才)가 될 만하고 제갈량(諸葛亮)에게 견주기까지 하였다.’[2] '하지만 이제 노부는 쓸모가 없다'[3]고 하고는 전후(前後) 소장(疏章)들을 모아 집에서 간행하고 이름을 《남원군주의(南原君奏議)》라 정한 후 사망하였다고 한다.

간략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군정십책(軍政十策), 비변십책(備邊十策) 등이 포함된 버전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양성지의 상소문들에 대해 세조 때에는 왕이 전적으로 동의하고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세조 사후에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양성지 자신도 철저히 무시받다가 사망했다. 말년에 세조께서 날 왕좌지재라 부르며 제갈량에 비견하곤 하셨다고 주장했을 때 성종의 신하들이 '광릉(光陵)의 하교(下敎)가 농담(調戲)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4]며 비웃었을 정도였으니 어지간히 무시당했던 듯.

이 외에도 양성지의 문집인 눌재집(訥齋集)에는 양성지가 생전 세조에게 올렸던 주의(奏議) 34편, 상소문 330여 조가 남아 있어 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연구해 볼 수 있다.

3. 외부 링크



[1] 是余平昔所奏也(시여평석소주야) 可幷載史(가병재사) [2] 世祖稱我(세조칭아) 爲王佐之才(위왕좌지재) 至比諸葛亮(지비제갈량) [3] 大怒自責曰(대노자책왈) 老夫無用(로부무용) [4] 聞者知光陵之敎(문자지광릉지교) 出於調戲(출어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