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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0 12:45:02

임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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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3.1. 인질 납치3.2. 열강의 반응3.3. 토비와의 협상3.4. 정부의 최후통첩과 인질의 석방
4. 결과5. 여담6. 참고문헌7. 관련문서

1. 개요

1923년 5월 6일, 산동성 임성에서 토비들이 진포철로의 열차를 점거하여 내외국인 승객 110명을 납치한 사건이다. 문제의 열차가 최신식 미국 열차로 당시 중국에서 남강피라 불리던 열차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남강피 사건이라고 불렀다.

2. 배경

1920년 산동성에서는 심각한 가뭄으로 기근이 퍼졌다. 여기에 전염병까지 덮치면서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였는데 안직전쟁으로 패권 다툼에 정신이 없던 중앙정부는 이를 구제할 능력이 없었고 지방군벌들은 재원 확보를 위해 각종 세금을 부과하여 민중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1920년 안직전쟁에서 안휘군벌이 패배한 이후 안휘군벌 장경요의 잔여 부대는 호남전선에서 패배한 이후 그대로 패잔병이 되었고 아예 토비가 되어 각 지방으로 흘러가게 들어갔는데 산동성에도 많은 토비들이 유입되어 치안이 극히 어지러웠다. 이들 토비들은 돈을 받고 용병일을 하였고 금전 지불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정부군과의 전투도 불사하였다. 또한 외국인들을 상대로 살인강도나 인질극을 벌이기도 했는데 1920년 6월 13일 악주에서 토비가 미국 선교사를 살해했고 1922년 8월 17일 롱해철도에서 토비들이 프랑스인 기관사 1명과 그리스인 기관사 1명을 납치했다. 다행히도 몸값이 지불되어 12월 20일 석방되었으나 1922년 12월 11일에는 미국 지화양행 지배인 찰스 골드먼이 현금 6만원을 수송하던 중 살해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정부는 열강 공사단에 사과하고 사태 해결을 위해 몸값을 지불했는데 이를 본 토비들은 외국인 납치에 더욱 열성이었다[1].

한편 산동성에서는 1920년 장경요의 부하였던 손미주가 봉, 등, 비 3현의 교계지에 모여 산동건국자치군을 선포하고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동생 손미요와 주천송을 부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들 밑에는 5로군이 있었는데 1로군 사령관은 손미주가 겸했고 2로군 사령관이 곽기재(郭琪才), 3로군 사령관이 주천송(周天松), 4로군 사령관이 왕계상(王繼湘), 5로군 사령관이 유청원(劉淸源)이었다.

이들이 1922년 7월 지주와 부호들을 습격하여 21만원을 강탈하자 정부는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토벌했는데 7월 15일 손미주가 전사하자 24세의 손미요가 총사령관에 추임하여 1922년 8월 포독고에서 1500명의 토비를 거느려 정부군 6여단을 격파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에 북양정부는 산동독군 톈중위을 토비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산동군 5,6 혼성여단과 20여단, 5사단을 주어 포독고를 포위공격하게 하였다. 1923년 4월 손미요의 산동건국자치군은 포위되어 식량과 식수가 동이 나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3. 전개

3.1. 인질 납치

손미요는 포독고에서 포위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때 손미요의 숙부인 참모장 손계지가 철도를 습격해 외국인을 인질로 삼아 관병의 포위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했다. 이에 손미요는 임성, 난징, 상하이에 밀정을 보내 5월 8일 미국의 지원으로 황하에 건설된 댐 준공식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준공식에는 여러 인사들과 기자들이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5월 5일 임성경무처장 장문통의 5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경찰 간부들 역시 대거 참석할 것이라는 정보도 들어왔고 손미요는 5월 6일 새벽에 열차를 습격하기로 했다. 작전은 성공하여 중국인 71명, 외국인 39명이 토비들에게 붙잡혔는데 토비들은 관군이 쉽게 공격하지 못하도록 분산수용했다.

토비들은 외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을 강탈했는데 그들이 처음 보는 물건이 많았던지라 모든 물건의 용도를 일일이 물어보았는데 웃긴 일도 있었다. 예컨대 로션의 경우에는 처음에 먹는 것으로 여겼으나 피부에 바르는 것이라는 걸 알게되자 모두 버렸으며 브래지어는 허리띠의 일종인줄 알고 차고 다니기도 했다. 손미요는 독일인 천주교 선교사에게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우리들은 예전에 군인이었으나 해산된 이후 생계가 막막하여 약탈로 연명하는 자들로서, 이번 일은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번에 외국인들을 납치한 것은 정부에게 우리들을 정규군으로 다시 편제시켜 줄 것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돈을 탐하여 저지른 행동이 아니다."

당시 토비들 중에서는 2.7 사건에 참여했던 철도 노동자들이나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영국에 파견되어 일했던 사람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는데 이들은 철도 공정에 익숙하여 손쉽게 열차를 정지시킬 수 있었으며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에 능통한 자들이 있었고 심지어 러시아인을 아내로 거느린 자가 있어 외국인과의 소통이 가능했다.

3.2. 열강의 반응

임성 사건 발발 직후, 중국의 외국인들은 이를 의화단 사건 이후 최대 배외 사건으로 규정하여 정부에 교민들의 안전과 보호를 강력히 주문했다. 상하이, 베이징, 한커우 등지의 미국 상회 및 교민협회에 미국 국무부에 "중국의 모든 수륙 교통기관에 외국 군대를 주둔시켜 감독하며, 외국 경찰대를 전국의 주요 지방에 주둔시켜야 한다."라는 요구를 전달했고 5월 10일 베이징과 톈진의 영미협회도 긴급합동회의를 계최, 외국인 보호를 위해 진포철로에 외국군을 주둔시켜 달라는 결의안을 내놓았다. 6월 1일 상하이 거주 외국거류민 5천명도 대회를 개최, 외국인의 안전 보장을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북양정부에 요구했다.

주 스위스 영국 공사는 영국 교민의 피해상황을 국제연맹 비서처에 보고하고 교민들에 대한 안전보장과 피해배상을 중국에 요구했다. 멕시코 역시 자국 교민의 피해 상황을 국제연맹에 통지하고 협조를 요청했으며 이탈리아 왕국도 국제연맹회의를 개최해 중국의 철도를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국 언론 역시 중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가장 반응이 강력했던 곳은 영국이었는데 이는 진포철로가 영국이 많은 돈을 투자한 영국의 세력권 안에 있는 철로였기 때문이었다. 5월 16일 공사단회의에서 영국은 당고에서 연합해군시위를 벌여 중국 정부에 무력으로 압박을 넣자고 주장했는데 미국 공사 셔먼이 열강의 무력간섭은 외국인 인질의 살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반대하며 북양정부로 하여금 외국인 인질을 구출하게 하자고 주장하면서 무산되었다.

영국 내부에서는 강경조치를 취해 영국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6월 19일과 6월 30일, 영국 정부는 미국 국무부에 서한을 보내 중국에 강경대응을 하여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유사사건의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공사 조던은 다음과 같이 입장을 표했다.
"중국의 무질서 상태는 정부가 무능력한 소치이다. 따라서 단순히 몸값을 치러 인질을 구해내는 방법은 장래 이와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간접적으로 장려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 중국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제연맹 혹은 기타 기관을 통해 외국인 장교가 지휘하는 경비재를 조직하여 철도를 관리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토비들이 일본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인질 중에 일본인이 없다는 이유로 사건의 배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
"열강이 워싱턴 회의에서 일본의 철병을 강요하였는데, 만일 일본군이 여전히 산동에서 질서를 유지했더라면 임성 사건은 근본적으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이 사건의 배후들이 자신들이라는 소문에 적잖게 당황했는데 1923년 5월 10일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작성한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금번 토비사건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번 납치사건에 외국인질 가운데 일본인 피해자가 한사람도 없어 일본이 이번 사건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오해하고, 심지어 토비 가운데 일본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무고도 있는 모양이다.

3.3. 토비와의 협상

5월 7일 손미요는 관부에 인질을 보내 협상을 위한 3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5월 8일 각국 공사단은 외교단 회의를 개최, 포르투갈 공사 프레타스를 대표로 임명해 국무총리 장소증에게 엄중히 항의, 외국인 인질들을 안전하게 구출하고 외국인 재산에 대한 안전보장을 요구했다. 5월 9일 외교차장이 인질들을 무사히 구출하고 나서 토비를 토벌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총통 리위안훙도 산동독군과 산동성장에게 대책을 강구할 것을 지시했다. 정부는 산동성의 신사인 당금원, 이병장에게 협상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임시판사처(瓣事處)를 설립하였다.

5월 12일 당금원과 이병장이 손미요를 만나 그들의 행동을 질책하면서 정부와 담판할 것을 권했다. 손미요와 곽기재는 승낙하면서 관군의 우선적 철수와 관향의 지급, 정식군대로의 편제와 병기 지급을, 톈중위 등의 면직을 요구했다. 5월 13일에는 미국인 앤더슨과 강소독군 치셰위안의 교섭원 온세진(溫世珍)이 손미주를 찾아 서양인들을 먼저 석방할 것을 제의했으나 손미요는 포독고를 포위하고 있는 관군을 백리 밖으로 철수시킬 것을 먼저 요구했다. 그리고 관군이 철수한다면 일부 인질을 석방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관군 철수 이후 자신들을 정규군으로 편제해주고 성의 표시로 무기를 지급해줄 것을 요구했다. 만약 이것까지 이루어진다면 다시 외국인 인질들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지막으로 정부가 대표를 파견해 관군 편제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편제가 완료되면 인질들을 모두 석방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표들은 동의하였다.

그런데 5월 14일 밤, 토비들은 자신들의 조건이 충분하지 못했다면서 관군이 완전철수하고 자신들의 정규군 편제와 통제범위에 대한 요구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지환 박사는 이것이 토비들이 정부가 군사행동을 취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그 기회를 틈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5월 15일 교통총장 오육린은 육군검열사 펑위샹에게 토비들이 관군 3개 여단의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칭다오, 하남의 토비들을 모아 원병을 청하고 있다면서 시급히 해결되지 않으면 사태의 해결이 무기한 연기될 수 있다고 타전했다. 5월 20일에는 일부 토비들이 손미요와 합세하기 위해 관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3.4. 정부의 최후통첩과 인질의 석방

5월 15일 이탈리아 왕국이 주중 이탈리아 공사를 통해 베이징정부 외교부에 중국이 시급히 임성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무정부상태로 간주하여 자신들이 직접 토비들과 교섭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각국의 무관들이 연합군을 조직하여 본국의 훈령이 떨어지는대로 출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상하이를 통해 전해졌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정부는 토비들을 진압하고 열강들의 개입을 막고자 했다.

5월 22일 산동독군 톈중위와 교통총장 오육린이 토비를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우페이푸, 리위안훙, 장소증이 모두 찬성했다. 공사단도 중국정부를 지나치게 압박하면 일이 꼬일 것을 우려하여 인질의 안전을 조건으로 중국정부의 무력진압에 동의했다. 차오쿤은 공사단의 태도 완화를 확인한 후 대총통이 보증하는 최후의 조건을 제시한 후, 토비들이 이를 받아들여 실행에 옮긴 후 인질이 석방되면 타협할 것이되 토비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병력을 집중하여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정사기를 토비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직예, 산동, 안휘 등 4개 성의 군대를 차출해 현지에 파견하고 공군까지 동원했다.

정부가 강경해진 것을 확인한 손미요는 산동의 천주교 사제 렌퍼를 통해 군대의 철수, 토비의 혼성여 편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4개국 공사의 보증을 요구했고 이에 정부는 인질 선제 석방, 총을 가진 사람만 정규군으로 편제한다는 협상을 제시했다. 6월 12일 오후 4시, 북양정부의 미국인 고문 앤더슨이 보증하는 가운데 합의가 이루어졌다. 토비 중 총을 가진 3천명을 산동신편려로 편제하고 손미요를 여단장으로 임명하며 편제를 원치않는 자는 정부가 돈을 주어 귀가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편제 여부를 떠나 모든 사람에게 20원 씩을 지급하고 모든 인질을 석방하기로 하였다. 앤더슨과 신사들이 실시를 보증하는 가운데 토비와 정부는 십리하에서 협정에 서명하고 인질들을 석방했다.

4. 결과

약속대로 토비들은 산동신편려로 편제되어 손미요가 여장으로, 곽재기가 1단장, 주천송이 2단장이 되었고 나머지 인물들은 영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923년 회선 사건으로 대총통에 당선된 차오쿤은 신임 산동독리 정사기에게 손미요를 죽일 것을 지시했다. 이는 손미요를 따라 외국인들을 납치하여 정규군으로 편제해줄 것을 요청하는 사례가 폭증하였기 때문이었다. 손미요가 정규군으로 편제된 직후, 산동의 101개 현 중 43개 현에서 정규군 편제를 요구하는 토비들의 준동이 있었고 토비들이 임성 사건을 흉내내어 잇달아 철로를 습격하였기 때문이다. 1923년 10월 12일 오후 10시, 낙양에서 쉬저우로 가던 기차를 토비들이 습격하여 12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11월에는 토비들이 프랑스 신부와 선교사들을 납치해 정규군 편제를 요구했다. 11월 13일에도 토비들이 진포철도에서 부농 10명을 납치해 인질극을 벌였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언론들은 임성 사건을 관대하게 처리하여 정부가 토비들의 준동을 전염시켰다고 비난했고 결국 차오쿤은 토비들의 준동을 막기 위해 손미요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1923년 12월 19일 정사기는 손미요와 일행 11명을 유인하여 살해했다. 이에 산동신편로 병사들이 자신들도 죽을까 두려워 달아나자 정부는 이들에게 돈을 주어 집에 보내고 7만원의 무기구입비를 지출하여 이들로부터 총기를 구입하여 회수했다.

5. 여담

당시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여운형이 해당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사건이 일어난 임성 지역에 방문한 적이 있다. 여운형은 이를 바탕으로 동아일보에 『임성토비탐험기(臨城土匪探險記)』를 기고했다. #

6. 참고문헌

7. 관련문서


[1] 현재 모든 국가들이 테러리스트의 인질사태를 '교섭은 없다'며 강경책으로 밀고 나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번 이런식의 유화적인 해결책을 쓰면 오히려 '호구'로 여기고 또다른 인질극을 벌여 더욱 놓은 몸값을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