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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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ED00><colcolor=#000000> 정의당 부평구 지역위원장 김응호 金應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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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2년 12월 12일 ([age(1972-12-12)]세) |
충청남도 서산시 | |
학력 |
성연초등학교 (졸업) 성연중학교 (졸업) 서령고등학교 (졸업) 인천대학교 (기계공학) |
소속 정당 |
[[정의당| |
현직 | 정의당 부평구 지역위원장 |
경력 |
정의당 부대표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운영위원 재인천충남도민회 지도위원 |
링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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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출신 정치인.2. 생애 및 활동
1972년 12월 12일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태어나 성연초, 성연중, 서령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였다.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학창 시절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이를 바탕으로 인천대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인천대는 지금은 우수한 입결을 자랑하는 국립대학법인이지만, 김응호가 입학하던 당시에는 선인재단이 운영하던 사립학교로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내내[1] 언론 사회면을 장식했던 학교로 [2] 1994년 시립대로 전환되었고 이후 국립대로 전환되며 학교가 가파르게 성장했다. 김응호는 선인재단 시절 인천대에 입학했다. 사실 인천대가 시립대에서 국립대로 전환되는데는 인천광역시 정치권에서 한 가닥하던 김응호의 입김도 크게 작용했다.1995년 인천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인천광역시 일대의 주요 현안이었던 굴업도 핵 폐기장 반대 운동 등 여러 학생 운동에 앞장 서다 3년 4개월의 수형 생활을 했으며 이후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기사
그 이후 민주노동당에 입당하여 시민운동가로 활동했다. 이 무렵 문학산 패트리어트 미사일기지 배치 반대 운동, 계양산 골프장 저지 운동, 부평 미군기지 반환운동과 부평 미군기지 주변 환경오염 정화를 위한 활동을 했다.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인천광역시 부평구 을에 출마했지만 민주당 홍영표 후보에게 밀려 4위로 낙선했다.
2015년 정의당 3기 당직선거에서 전국위원과 부평구 지역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 #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정의당 인천광역시장 후보로 나섰으나 4위로 낙선하였다.
2019년 정의당 5기 당직선거에서 인천시당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천 부평구 을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20년 정의당 6기 당직선거에서 부대표로 당선되었다.
3. 기타
노회찬의 6411 버스 연설이 나왔던 진보정의당 창당대회 때 사회를 맡았다고 한다. 4분 20초인천연합 계열 NL 정치인이다.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rowcolor=#000000>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09 | 2009년 재보궐선거 | 인천 부평 을 |
[[민주노동당| |
3,468 (5.60%) | 낙선 (4위) | |
2018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인천광역시장 |
[[정의당| |
37,472 (2.82%) | ||
2020 |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 인천 부평 을 | 7,994 (6.04%) | 낙선 (3위) | ||
2024 |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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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1 (1.62%) | 낙선 (4위) |
역대 선거 벽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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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 지선 (인천광역시장) | 21대 총선 (인천 부평구 을) | }}}}}}}}} |
[1]
1980년대에는 전두환 정권의 언론 탄압으로 보도가 없다가, 1986년 학내 민주화 운동으로 휴교령을 거쳐, 1992년 MBC PD수첩에 보도되면서 선인학원의 비리가 보도되어 만천하에 드러나 파장이 일었다. 물론 당시 유명 대학들도 비리는 많았으나 언론에선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2]
1980년대 당시의 대학 입시제도는 전기대, 후기대로 양분화되어 있어 대다수 대학들이 전기에 몰려 있었으며 전기에서 1회의 기회로 낙방하면 우수한 성적의 소유자들도 후기대학으로 진학하는데 당시의 후기대학으론 인천대, 명지대, 경기대 정도 이며 이과로선 광운대등 이였으며,경쟁률이 꽤 높았으나 커트라인과 평균성적의 차이가 컸다,주로 눌러 앉은 재수 삼수생들이 많았다. 이후 1980년 말엽부터 이후 각 대학들이 전, 후기 분할모집이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