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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경윤(敬允) / 의재(義齋) |
본관 | 광산 김씨[1] |
출생 |
전라도
흥양현 대강면 당곡리 (현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매곡리 당곡마을) |
1863년 2월 3일[2] | |
사망 | 1959년 5월 4일 |
전라남도 보성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346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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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63년 2월 3일 전라도 흥양현 대강면 당곡리(현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매곡리 당곡마을)에서 아버지 김종일(金鍾鎰, 1845 ~ 1891. 11. 3)과 어머니 하동 정씨(? ~ 1869. 6. 1)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1907년 1월 1일 송남섭(宋南燮)과 더불어 의병장 양회일을 만나 일본군을 토벌한다는 계획을 상의하였고, 고향으로 돌아와 격문을 뿌려 동지 수백명을 모집하였다.
1909년 3월 휘하 의병 30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흥양군 대강면에서 활동하다 남양면 하와리(현 고흥군 남양면 대곡리 하와마을)에서 엽전 239냥을 모금하고, 같은 달 20일 남면 송천리(현 고흥군 과역면 도천리 송천마을)에서 14원 60전을 모금했다. 그해 4월 흥양군 사창(社倉) 호곡(毫谷)[3]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다수를 사살했다.
또한 그해 5월 10일에는 서면 남양리(현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 남양마을)에서 엽전 100냥, 남양면 거군리(현 고흥군 남양면 신흥리 거군마을)에서 백미 한 섬을 군자금으로 모집했다. 8월에는 남면 과역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다수를 사살했고, 그해 말 대강면 유둔리(현 고흥군 동강면 유둔리)에서도 일본군과 교전하여 다수를 사살했다.
그러나 1910년 초 두원면 운대리 돌산골에서 일본군과 교전 끝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에 1910년 1월 25일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소위 폭동 및 강도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후 1912년 12월 14일 징역 7년형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1914년 5월 24일 소위 칙령(勅令)으로 징역 5년 8개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59년 5월 4일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별세하였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1991년 11월 1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