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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상대등(上大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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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승 | ← | 김숭빈 | → | 김수종 |
? ~ 819년
신라의 상대등.
원성왕 8년(792년) 헌평태자 김의영이 태자가 되자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2년 뒤인 794년 김의영이 사망하자 시중 자리에서 물러나고 후임 시중은 태손 김준옹의 동생 김언승이 되었다.
이후 헌덕왕 원년(809년) 상대등에 임명되었으며, 헌덕왕의 즉위를 당헌종에게 고하고 문극을 하사받았다. 이후 10년간 상대등의 직위에 있었으며 819년 사망해 후임 상대등은 태제 김수종이 되었다.
김의영의 태자 책봉 및 사망 시점이 그가 시중으로 활동했던 시점과 일치하는 점 때문에 헌평태자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태자로 지명되었을 당시 김의영도 꽤나 장성한 나이였으므로, 흥덕왕 사후 정상적이라면 차남인 헌평태자 가문에서 차기 국왕이 배출되었겠지만 정작 왕위 계승권이 있던 건 3남인 김예영[1]의 가문이었다. 그의 가계가 이후 왕위계승권에서 배제된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김헌창의 난에 가담했기 때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
태자책봉 등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때 최소한 의영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