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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5:26:12

김병현/선수 경력/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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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마이너리그 시절2.2. 1999 시즌2.3. 2000 시즌2.4. 2001 시즌2.5. 2002 시즌2.6. 200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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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병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시절(1999~2003.5.)을 정리한 문서.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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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마이너리그 시절

입단하자마자 사기급의 구위를 보이면서 마이너 리그를 단 세 달만에 끝냈다. 보통 메이저리그에서 내로라하는 유망주들이 마이너리그에서 최소 1~2년 담금질을 거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생각하면 3개월 마이너 생활은 매우 짧긴 하다. 대표적으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특급 유망주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대학을 거쳐 21살에 드래프트된 유망주였는데다가 1년의 마이너 담금질을 거쳤다. 물론 박찬호 대런 드라이포트 같이 메이저 데뷔를 먼저 한 드문 경우도 있다. 이 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바로 콜업된다. 마이너 리그에서 배운 건 딱 하나, 포수 사인 읽는 법이라고 한다.
실제로 김병현 본인은 마이너 시절을 "얘네들 야구 못한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수많은 한국인 선수가 마이너리그조차 벽을 느끼고 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울 따름.

하지만, 이 당시 김병현의 빠른 콜업은 선수생활 전체를 뒤돌아봤을 때 그에게는 독이 되었다고 평가될 때가 많다. 마이너리그에서 배우는 것은 단순히 야구 기술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20살의 어린 선수들이 갑작스럽게 많은 이닝을 던져서 버두치 리스트에 걸리지 않도록 루키부터 AA까지 단계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이닝수를 늘려가며 프로선수의 몸을 만들고 프로선수로서 1년간 풀 시즌을 치르며 몸 만드는 법, 부상 관리법, 혹독한 마이너의 환경에서 멘탈 단련 등 오래 살아남는 메이저리거가 되기 위해 마이너에서 야구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도록 하는 시스템인데, 김병현의 선수 생활을 되돌아보면 공은 뛰어났지만 이런 부분들이 부족해서 결국 재능에 비해 롱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병현이 등판 전 공을 많이 던지지 않으면 몸이 안 풀렸다든가 하는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바로 이런 것을 고치는 법을 마이너에서 배우는 것이다. 이 당시에는 서비스 타임 조절한다고 콜업 시기 장난치는 지금과는 달리 대런 드라이포트, 아리엘 프리에토라는 최고의 유망주를 2년 연속 마이너를 거치지 않고 바로 메이저 무대에 데뷔시키는 등 리그 전반적으로 마이너 기간을 줄이고 재능있는 놈은 팍팍 올려 쓰는 분위기였으며 박찬호 역시 1994년 메이저 리그를 곧바로 경험할 수 있었을 정도였는데, 김병현도 그런 분위기의 수혜를 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재능있다고 급작스럽게 올린 선수들이 상술한 경험부족, 자기관리 미비 등으로 많이 망가져 나갔고 이후로는 서비스 타임 문제도 있긴 하겠지만 리그 전체적으로 김병현처럼 실력이 좋더라도 콜업을 빨리 시키기보다는 마이너를 착실히 밟게 하는 육성방침을 취하고 있다.

2.2. 1999 시즌

메이저 리그 데뷔전에서 뉴욕 메츠의 중심타선 에두아르도 알폰소-존 올러루드- 마이크 피아자를 삼자 범퇴로 처리하여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특히 야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포수인 마이크 피아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강렬한 모습을 보인다. 애리조나에서 처음에는 팀의 마무리 투수를 맡아 2001 월드 시리즈 우승에 공헌한다.

사실 김병현 본인이 밝힌 바로는, 데뷔전 당시 주변의 반응은 마무리로서 폭발적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이때 임팩트가 너무 커서 계속 불펜으로 돌게 된 것이 아닐까 하며 살짝 아쉽다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본인이 처음부터 선호했던 보직은 선발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다만 출장 자체는 마이너 시절에도 불펜 출장이 더 많았다.

1999년도는 시즌 중반에 콜업된 데다가 신인이라 별다른 활약을 하지 않았다.

2.3. 2000 시즌

첫 풀타임 시즌인 2000년, 압도적인 삼진 능력을 내세워 8타자 연속 삼진 기록을 세우면서 마무리로 활약했다. 이때 그는 마무리 보직에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선발로 등판하면 털리는 바람에 트리플A에서 선발로 나서고 콜업하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올스타전에 출전할거라고 예상했지만 아쉽게 탈락. 전반기 성적은 ERA 2.11 2승 3패 14세이브 42.2 이닝 71탈삼진.-올스타전에 출전한 2002시즌보다 성적이 좋은건 함정. [1]- 하지만 후반기에는 상당히 부진하여 후반기 평균자책점이 7을 넘어섰고 결국 ERA 4.46 14세이브 111 탈삼진으로 마무리. 부진한 와중에 탈삼진 능력은 변하지 않아서 K/9이 14가 넘어갈 정도로 좋았다.[2] 이 시즌에 선발을 한 번 해봤으나 거하게 털려서 계속 불펜으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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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당시 투구폼

2000년 당시의 투구폼으로 이 투구폼 덕분에 슬라이더가 정점을 찍었지만 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너무 횡변화가 크고 제구가 그닥 좋지 않아 볼넷을 많이 내줬고 이로 인해 부진하게 된 것이다. 이후 투구폼을 바꿔서 슬라이더의 횡 변화가 줄어들었지만 제구가 매우 좋아졌다.

2.4. 2001 시즌

2001년, 삼진 능력은 그대로 였지만 제구력이 고쳐지지 않아 셋업맨으로서 기대한 것보단 못미쳤지만 준수한 역할을 했다. 마무리이던 맷 맨타이가 부상을 당해 중후반기부터 마무리를 맡게 되고 후반기 안정적인 제구력을 가지고 활약을 펼치며 19개의 세이브를 챙기고 평균자책점을 2점대까지 끌어내리며 다이아몬드백스의 가을야구 진출에 크게 기여했다. 이 시즌 평균자책점은 2.94로 전에 비해 호성적인 성적을 거두었고[3] 피안타율은 .173을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불펜투수 1등에 올랐다. 그 외에도 이닝 3위, 삼진 2위를 기록하였다.

2.4.1. 포스트시즌

2001년 NLDS 시리즈 스코어가 1승1패인 가운데 팀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5대3으로 앞선 3차전 8회 2사 1, 2루의 위기 상황에서 구원 등판, 첫 타자 알버트 푸홀스에게 볼넷을 내주어 2사 만루에 몰렸지만 다음타자인 짐 에드몬즈를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내었고 9회 케리 로빈슨에게 3루쪽 번트 안타와 폭투, 후속 타자인 에드가 렌테리아에게 볼넷을 허용한 무사 1, 2루의 상황에서 마이크 매서니를 삼진, 마크 맥과이어에게 병살타를 이끌어내 첫 PS 세이브를 기록하게 되었다.

NLCS 2차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 9회에 등판, 마커스 자일스를 삼진, 훌리오 프랑코 치퍼 존스를 각각 내야땅볼로 처리하면서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지만 팀은 8대1로 패배하였다.

NLCS 4차전, 팀이 7대3으로 앞선 가운데 8회 말 미구엘 바티스타가 3연속 안타로 무사 만루의 위기를 만들자 구원 등판, 자비 로페즈와 마커스 자일스를 상대로 병살타와 내야 땅볼을 이끌어내 위기를 벗어났고, 9회 초 팀이 4점을 더 올린 가운데 타석에서 내야땅볼을 기록한 뒤 9회 말 훌리오 프랑코를 1루 파울 플라이, 치퍼 존스를 1루 땅볼, 브라이언 조단을 중견수 뜬공으로 처리하여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NLCS 5차전, 팀이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앞선 팀이 1점차로 앞선 8회 말 랜디 존슨에 이어 등판했다. 8회 말을 삼자범퇴로 막은 뒤, 9회 말에는 레이 산체스를 삼진으로 잡은 뒤 키스 록하트에게 볼넷을 내주었지만 후속 타자인 마커스 자일스와 훌리오 프랑코를 삼진과 뜬공으로 잡아내어 2이닝 무실점으로 팀을 월드 시리즈로 이끌었다.

NLDS와 NLCS에서 총 4경기 6.1이닝을 던지며 3세이브 무실점 피칭으로 완벽하게 막아냈다. 애틀란타와의 NLCS에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고 내셔널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 모습[4] 다만 나중에 밝히길 이때 컨디션도 별로였고 매커니즘과 밸런스가 많이 망가져있었다고 한다. 짧은 이닝이기에 어찌어찌해서 우격다짐으로 잘 막긴했으나 속으론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 혼란스러웠다고 한다.[5]
2.4.1.1. 월드 시리즈

그리고 운명의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 시리즈. 1, 2차전은 1, 2 선발이었던 랜디 존슨 커트 실링이 무난하게 이겨주면서 등판하지 않았고, 3차전은 양키스가 승리한다. 2승 1패로 애리조나가 앞서가는 상황이었다.

애리조나가 스코어 3:1로 앞서고 있던 WS 4차전. 커트 실링의 뒤를 이어 8회에 김병현은 아시아인 최초로 월드 시리즈에 등판한다. 김병현은 셰인 스펜서, 스캇 브로셔스, 알폰소 소리아노를 삼진으로 모두 돌려세우면서 무난히 세이브를 챙기는 듯 보였다. 이후 9회 말에도 등판한 김병현. 데릭 지터를 땅볼 아웃처리한 뒤 폴 오닐에게 안타를 허용하지만 버니 윌리엄스를 삼진 아웃으로 처리하면서 다 끝났나 싶었는데…티노 마르티네스에게 동점 투런을 허용하면서 블론세이브를 거두고 말았다. 이후 호르헤 포사다 데이비드 저스티스에게 각각 볼넷과 안타를 허용했지만 셰인 스펜서를 삼진으로 잡아내 간신히 이닝을 마무리하고 연장전에 돌입하게 된다. 양키스의 마리아노 리베라가 애리조나의 타선을 꽁꽁 묶어 둔 상황. 연장전에도 다시 등판한 김병현은 스캇 브로셔스 알폰소 소리아노를 뜬공 처리로 잡으면서 다음 이닝으로 넘어가나 싶었는데… 데릭 지터에게 10구째에서 끝내기 홈런을 맞으면서 결국 패전 투수가 되었다.

바로 다음 날 WS 5차전에도 김병현은 올라왔다. 2:0로 앞서고 있던 9회 말에 등판하였다. 첫 타자였던 호르헤 포사다에게 좌측 2루타를 맞으면서 불안한 출발을 보였으나 셰인 스펜서와 척 노블락을 잡아내며 세이브를 거둘 수 있을 거라 예상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캇 브로셔스에게 동점 투런 홈런을 허용하며 또 다시 무너져버렸다. 결국 연장 접전 끝에 애리조나는 양키스에게 무너졌으며, 전적도 2승 3패로 밀리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경기 직후 김병현은 자신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인터뷰를 하면서 이대로 무너지는 것인가 하는 아쉬움을 자아냈다. 참고로 7차전에서 커트 실링이 강판당한 뒤 올라온 구원투수는 김병현이 아닌 랜디 존슨이었다. 밥 브렌리 감독도 더 이상의 등판이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불펜에서 김병현이 몸을 풀고 있긴 했었다.

김병현이 2경기 연속 불을 지르면서 시리즈가 혼전 양상을 띄게 되었고 결국 2000년대 최고의 WS로 남게 되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발생했다. 김병현이 월드 시리즈에서 부진했던 원인은 정규 시즌에서 지나치게 많이 등판했던게 포스트시즌까지 이르러 과부하가 걸렸던 것이 원인이었다.[6] 더군다나 월드 시리즈 당시 밥 브렌리 감독은 김병현을 1이닝 클로저가 아닌 2이닝 클로져로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발언을 했는데, 전날 2.2이닝을 던진 투수를 다음날에도 바로 올린 것은 무리였다. 불펜 투수의 특성상 공을 던지지 않더라도 위기시 몸을 푼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리가 가는 데다, 김병현은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흡사 임창용이나 권혁처럼 심심하면 툭 튀어나와 틀어막고 내려가는 살려조로 기용된 상태였다. 애초에 젊은 불펜 투수를 정규시즌+포스트시즌 합쳐서 100이닝 넘게 굴린 것부터가 혹사[7]이다. 그 전 해에 이미 70이닝을 굴렀는데도 그리 나온 건 무리를 해도 너무한 것이다. 이미 무리가 쌓인 상태에서 월드 시리즈에서까지 그런 무리한 기용을 하는 것은 감독의 용병술에 문제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이후 6, 7차전을 홈 구장인 뱅크 원 볼파크에서 치르게 된 애리조나는 6차전에서 랜디 존슨의 호투를 앞세워 양키스를 대파했고, 7차전에서는 1:2로 밀리고 있던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올라온 빅유닛의 역투, 그리고 마리아노 리베라를 9회 말에 침몰시키면서 스코어 3:2로 역전승을 거둬 최종 4승 3패로 창단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이라는 역사를 쓴다.

참고로 7차전에서 리베라가 무너졌던 패턴은 안타-야수선택에서 투수 실책으로 올 세이프-번트를 댔으나 3루 송구 아웃-적시타-데드볼-적시타. 리베라가 결정적인 순간에서 포스트시즌에서 무너졌던 적이 2010년까지 생각해볼 때 딱 세 번 있었는데 그 중 한 번이 이때였다. 나머지 두 번은 2004 ALCS 보스턴전 4, 5경기다.

김병현은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우승 못했으면 은퇴할 생각도 했었다고 밝혔다. 설마 진짜로 그랬겠냐마는, 만약 우승을 못했으면 자신의 피칭으로 인해 우승을 못했을 것이라는 자책감에 빠져 더 좋은 성적을 못 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우승 직후 커트 실링은 김병현에게 "앞으로 애리조나를 책임질 젊은 투수가 될 것이다."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확실한지는 모르겠으나 실링이 인터뷰에서 "우리는 BK가 아니었으면 월드 시리즈 진출도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설명은 MBC ESPN에서 방송한 애리조나의 기적에서 자세하게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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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후 가진 백악관 만찬에서 조지 W. 부시와 함께.
2001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 자격으로 백악관을 방문한 이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은 사진촬영 자리에서 김병현 선수 바로 뒤에 자리잡으며 마치 감싸안거나 뒤에서 받쳐주는 듯한 모양새를 연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고위급 정치인의 행동은 하나하나 의미가 담긴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 젊은 김병현을 격려함과 동시에, 911 사건으로 뒤숭숭해진 시점에 월드 시리즈 대흥행으로 국내 분위기 수습에 일조한 주연 선수에 대한 정치적인 연출의 뜻일 것으로 추정된다.

2.5. 2002 시즌



2001년 월드 시리즈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인 2002년에는 풀타임 마무리로 뛰면서 42번의 세이브 기회중에 36번을 성공시키고[8] ERA는 2.04를 기록하며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고 올스타 게임에도 선정되었다.[9] 2002년 김병현의 2차스탯 관련글.

표면적으로는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지만 팀내 입지는 불안했는데, 다름아닌 밥 브렌리 감독과의 갈등이었다. 시즌 초 브렌리 감독은 새로 영입한 좌완 언더핸드 마이크 마이어스를 김병현 대신 마무리로 중용했고, 이에 김병현은 자신의 팬카페에 글을 올리는 와중에도 감독의 투수기용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불편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이후 고정 마무리로 중용되며 잠잠해지나 싶었지만, 현지시간 5월 30일 샌프란시스코 전 등판때 마운드 위에서 브렌리 감독이 배리 본즈를 고의사구로 거르라는 지시에 항명하는 제스쳐를 보여 구설수에 올랐고, 이 때문에 투수조 고참인 토드 스토틀마이어로부터 한소리를 듣기도 했다.

급기야 7월 27일 샌디에이고 전에서 브렌리 감독이 9회에 마이크 마이어스를 먼저 등판시켜 자신에게 세이브 기회를 챙겨주지 않은 것에 분노가 폭발해, 다음날 '오늘 못 던지겠다'며 등판 거부를 선언했다. 게다가 이날 경기를 앞두고 브렌리 감독이 김병현에게 "다른 선수들에게도 영향이 가니 마운드에서 표정관리 좀 해라"는 식으로 성토했고, 김병현은 이에 대해 " 랜디 존슨도 경기 안풀리면 표정관리 안되던데, 나한테 그런거까지 요구하지 마라"는 식으로 맞받는 일마저 있었다. 어쨌거나 이날의 등판 거부 사건으로 인해 김병현은 구단에 제대로 찍혀버리고, 이듬해 트레이드되는 빌미가 된다.

파일:BK_3.png
이 자료에서 언급된 날짜는 한국시간 기준이며, 오류가 있는데 워싱턴이 아닌 샌디에이고다. 게다가 이 당시는 워싱턴 내셔널스가 아닌 몬트리올 엑스포스였다. 엑스포스가 워싱턴 D.C.로 연고지를 옮긴 것은 2005년 시즌부터인데 이 자료가 연고지 이전 후에 만들어진 것이라 그렇다.

2.6. 2003 시즌

2003년 시즌을 앞두고 본인이 원하는 선발 투수로 전업했다.[10] 마무리 투수 때에 비해서 탈삼진율이 크게 떨어졌으나 괜찮은 성적을 내었다. 미국 현지 4월 14일 콜로라도 로키스의 타자 프레스턴 윌슨을 상대하던 도중 윌슨의 스윙에 의해 부러진 방망이를 발목에 맞고 부상을 당한 후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김병현이 후일 언급하길 이 부상으로 투구 밸런스가 무너졌으며 결국 커리어를 갉아먹고 야구 인생을 제대로 꼬이게 만들었다고.[11] 결국 선발 보직 관련 등으로 인해 애리조나 구단과 갈등을 빚다가 7이닝 무실점으로 마지막 애리조나 등판을 마치고 2003년 5월 30일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 된다. 2003년 애리조나 성적은 7경기 선발 1승 5패 ERA 3.56으로 퀄리티 스타트를 4번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1승밖에 올리지 못했으며 43이닝 33탈삼진으로 크게 떨어진 탈삼진율을 보였다.


[1] 2002년 전반기 성적은 ERA 2.34 44경기 22세이브다. 아마도 세이브수가 영향을 미친 듯 하다. [2] 실제로 넷 상에서 떠도는 김병현 움짤은 거의 대부분 2000년도다. [3] 다소 높은 평균자책점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즌 김병현의 전반기 성적은 3.51이었다. 후반기에 2.31을 찍으면서 기어코 2점대로 시즌을 마감한 것이며 무엇보다 2001년은 대 약물이 범란한 타고투저때인 것을 생각하자. [4] 참고로 2001 NLCS에서의 마지막 타자가 무려 훌리오 프랑코이다. 프랑코가 직전 해에 KBO 리그에서 뛰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 또한 묘한 맞대결. [5] 이런 막연한 불안감은 결국 후술할 월드 시리즈에서 터지고 만다. [6] 김병현 본인 스스로도 훗날 인터뷰에서 '2001년 당시에는 축이 점점 기울고 있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라고 밝혔다. [7] 같은 월드 시리즈에서 상대편 마무리였던 마리아노 리베라의 경우 내구성이 좋기로 유명했지만 당시 월드 시리즈 마지막 7차전 당시 블론을 할 때 조 토레 감독의 관리책임 논란이 나왔다. 마리아노 리베라는 당시 정규시즌 50세이브 기록 달성을 위해 80이닝을 출장했고 포스트시즌 14이닝 가량을 던졌고 실제로 다음해 시즌 말 어깨통증으로 인해 풀시즌을 소화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 김병현은 2001년 정규시즌에서만 마리아노 리베라가 포스트시즌과 정규시즌을 다 합친 이닝 수보다 4이닝 더 많은 98이닝을 구원으로 등판해서 막았다. 누가 뭐래도 어린 투수에 대한 명백한 혹사다. [8] 6번의 블론세이브가 다소 높을 수도 있겠지만 ERA 0.78을 기록한 블레이크 트레이넨도 블론세이브가 5번 있었다. 물론 세이브 기회가 적었는데도 블론세이브가 꽤 있었다는 건 아쉬운 사실이나 당시는 엄청난 타고투저였다. [9] 올스타 경기 성적은 0.1이닝 2피안타 3실점(2자책)평균자책점 54.00 블론세이브. [10] 사실 그간 워낙 보직 관련 갈등이 컸던 탓에 선발로의 보직 변경에는 '어디 너 하고싶은대로 해봐라'는 식의 기류도 없잖아 있었다. 물론 김병현 이전 애리조나의 마무리 투수 역할을 맡고 있었던 맷 맨타이가 2002년 말부터 토미 존 서저리에서 복귀했기 때문에 큰 무리 없이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김병현이 2001년부터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된 것 역시 맷 맨타이의 토미 존 서저리로 인한 장기공백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복귀한 맷 맨타이도 2003년 잠깐 29세이브를 올린 게 전부고 다음해 화염마무리로 변해 보스턴으로 트레이드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은퇴한다. [11] 당시 방망이 조각에 맞은 후에 감독인 밥 브렌리가 직접 마운드에 올라와서 부상을 체크하기도 했는데, 본인이 괜찮다면서 계속 투구를 이어갔었다. 이후 은퇴하고 나서 편애중계에 출연해서 말하길 그 당시에 더 던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참고 던진 게 두고두고 자신의 인생에서 제일 후회되는 일로 회상했다. 그때 이후로 그 당시 자신의 결정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둡게 성격이 변하면서 자꾸 숨고 했던 게 그때의 일로 인한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