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주 방면 독립운동가, 金明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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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7년 |
사망 | 1920년 11월 3일 |
서훈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
1867년생으로 알려졌으나 출생지는 알 수 없다. 중국 지린성 혼춘현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배일 사상을 선전하고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다가 1920년 11월 3일 혼춘현 작개동에서 간도 참변을 자행하던 일본군에게 체포된 뒤 총살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김명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인천광역시 출신 독립운동가, 金明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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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10월 9일 |
경기도 인천부 | |
사망 | 1965년 4월 10일 |
경기도 인천 | |
서훈 |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 |
1900년 10월 9일 경기도 인천부 내리 152번지에서 출생했다. 1919년경 인천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그해 3월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확산되자 동급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이에 일경은 학교 교원을 통해 동맹휴교 중인 학생들을 철저히 감시하였고, 김명진 등은 교원들로부터 심한 감시와 통제를 받자 이를 벗어나기 위해 통신망을 절단할 계획을 세웠다.
김명진, 이만용, 박철준 등은 1919년 3월 8일 오후 9시경 인천공립보통학교에 잠입하였다. 박철준은 망을 봤고, 김명진은 2창에서 준비한 전선 절단용 가위로 2층에 있는 전선을 절단하고 수화기를 박살냈다. 이만용은 중간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조직적인 동맹휴학을 계획하다가 이 일이 발각되면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김명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1919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전신법 위반, 절도 혐의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60일 본형 산입)을 선고받았고 #, 1919년 7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절도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되 나머지는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 그는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면서, 상고취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기초하는 의사발동으로 범죄가 인다. 그런데 제1심 및 제2심에서 받은 유죄 판결은 부당하여 복종할 수 없는 위범이 됨에 따라 상고한다.
그러나 1919년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 판결을 받아 형이 확정되면서 옥고를 치렀다. # 이후 인천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5년 4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김명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영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金命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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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8년 12월 15일 |
경상북도
영천군 진혈면 수도동 (현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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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5년 6월 25일 |
경상북도 영천군 | |
서훈 | 2008년 건국포장 |
1908년 12월 15일 경상북도 영천군 진혈면 수도동(현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동)[1]에서 출생했다. 1927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였고, 영주청년동맹 평은지부에 참여하여 1928년 4월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출생지이자 거주지인 수도리에서 1928년 10월 아도서숙의 운영위원을 맡아 문맹 퇴치, 우리글 교육, 민족정신 양양 등을 꾀했다.
1929년 영주 농민조합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7월 영주, 봉화지역 농민 청년층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있을 때 그를 비롯한 아도서숙의 관계자 18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60일간의 취조를 받은 후 석방되었다. 이 일로 아도서숙은 1933년 7월경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후 농민조합의 재건을 꾀한 김명진은 1932년 9월 안동의 사회운동가 안상윤(安相潤)이 검거를 피해 수도리로 숨어들자, 박승서의 집에서 김종진의 소개를 통해 안상윤을 만나서 영주의 사회운동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안상윤이 "영주 운동의 소장이 남아 있는 여러분의 활동 여하에 달려 있으니, 수도리를 중심으로 소수라도 재건조직을 도모하자"고 제안했다. 김명진은 이에 동의하여 안상윤, 김종진 등과 함께 재건 조직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1932년 10월 5일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김명진은 반제부 위원, 안상윤은 지도부 위원, 김종진은 적농부 위원을 각각 맡았다. 지도부는 적색농조, 반제운동에 대한 당면 전술을 지도하였으며, 적농부는 정기적으로 농민강좌회를 개최하여 계급의식을 주입하고 의식분자를 획득하여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반제부는 소부르주아지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여 반제동맹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1932년 10월 6일 안상윤이 안동으로 돌아간 뒤, 김명진은 동지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마르크스-레닌의 사회주의 이론을 습득하였고, 1932년 11월 17일 러시아 혁명일에 기념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1932년 12월 7일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에서 활동하던 족친 김계진과 함께 혁명적농민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1933년 5월 혁명적농민조합은 노동절을 맞아 봉화의 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와 함께 연대 투쟁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1934년 7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미결구류일수 300일을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 이후 영주에 조용히 지내다 1955년 6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김명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2009년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4. 괴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金明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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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7년 |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 읍내동 | |
사망 | 미상 |
서훈 | 2012년 건국포장 |
1887년생이며,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 읍내동 출신이다. 1919년 3월 30일 이태갑, 장성원, 함재원, 홍봉운, 김수백, 연병룡, 노도원, 신강면 등과 함께 괴산군 청안면 청안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들은 군중을 이끌고 우편소를 공격해 파괴하고, 체포된 수 명의 동지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주재소로 돌진해 주재소의 창문을 파괴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7월 1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10개월 선고받았고 #, 1919년 8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개월을 재차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김명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1]
예안 김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