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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2:22

김류/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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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
2.1. 긍정적 평가
2.1.1. 신중한 행정가2.1.2. 서인의 폭주를 막기 위해 노력한 인물2.1.3. 여러 가지 오해를 뒤집어쓴 피해자
2.1.3.1. 병자호란 시기의 행적2.1.3.2. 일관성이 없었다?
2.1.4. 옹호론 정리
2.2. 부정적 평가
2.2.1. 정쟁을 일삼던 편당적인 권력가
2.2.1.1. 아들 편애
2.2.1.1.1. 석연치 않은 계해년 개시 시행2.2.1.1.2. 아들의 살인죄 방관2.2.1.1.3. 국문(鞠問) 남용 침묵
2.2.1.2. 나만갑과 그 주변인에 대한 집요한 탄압
2.2.1.2.1. 반론
2.2.2. 군사적 무능2.2.3.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면모
2.2.3.1. 인조반정 당시의 행보2.2.3.2. 이괄의 난 당시의 행보2.2.3.3. 병자호란 당시의 행보
2.2.4. 비판론 정리

1. 개요

김류의 평가가 어떠한지 정리해둔 문서다.

2. 목록

2.1. 긍정적 평가

2.1.1. 신중한 행정가

중년시절의 김류는 현실 권력적, 세력가 지향적인 행보로 인조반정, 이괄의 난, 김자점 등극이라는 트리플 크라운에 간접적으로 기여했고, 아랫사람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덕분에 진짜 역적들을 능가하는 더 심각한 백성들의 증오를 받았다. 물론, 당시의 백성들의 입장에선 미워할만 하다. 일련의 사건들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할 뿐, 서인 세력들의 대표격인 인물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류가 정치에 나설 때는 과격한 서인끼리의 삽질로 국력을 깎아먹는 상황에 대한 예방을 하려고 중재자로 활약한 경우가 태반이며, 오히려 서인들이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는 대다수의 사건에서는, 김류가 말빨이나 서인들의 쪽수에서 쳐발려서 반대를 표시했음에도 그의 의견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던 사건이 태반이다. 즉, 인조반정 4대장급 인물들의 간판 중의 하나였으니 까이는 것 자체는 당연하지만, 현실에서 김류의 행보는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상식적인 모습을 많이 남긴 편이다.[1]

2.1.2. 서인의 폭주를 막기 위해 노력한 인물

악평과는 달리, 김류는 초기부터 자신과 생각이 다른 서인들의 삽질을 막으려고 꽤나 노력한 인물이다. 애초에, 인조시대는 서인들을 제외한 붕당의 힘이 대부분 정리되어, 붕당이 아닌 서인끼리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즉, 김류가 일부 서인들의 리더이자 4대장이라고 불렸다고 해도, 김류는 모든 서인들의 리더였던 적은 없으며, 오히려 다른 서인들과 목숨걸고 대립하던 시기를 보냈다. 결국, 김류가 보여준 행적은 큰 삽질을 하려는 급진파 서인에 대한 견제, 혹은 서인끼리 다투어서 국력을 깎아먹는 알력을 조율했던 역할에 가깝다. 애초에 서인들이 살아남기 위한 뻘짓을 했던 혼란기를 제외하면, 김류는 의외로 상식적인 행적을 남긴 공서파의 범인(凡人)의 대표에 가까운 편이다.[2]

후대에는 무능한 인물이라고 까이기도 하지만, 안정과 신중을 중시하는 보수 관료적인 행보야말로 김류의 장점이었다. 김류는 안정된 정국을 만든 이후로는 딱히 다른 파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도리어 이상주의에 미쳐가는 청서파 서인들의 폭주를 견제하느라, 서인들의 사이에서 고립되기도 했다.

2.1.3. 여러 가지 오해를 뒤집어쓴 피해자

김류의 실책이라면, 굉장히 현실적이되 옹졸한 행보를 많이 보였으며, 무작정 왕권을 우선하는 방법론을 성급하게 진행할 뿐, 수많은 백성 및 부하들의 목숨을 허무하게 낭비했다는 점에 있다. 또한 2명[3]의 왕을 세운 킹메이커이기는 하지만, 권력을 위해서 2명의 역사적인 간신들을 방치한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김류는 큰 사고를 친 간신들의 대표 얼굴마담으로서 백성들의 증오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이괄에 대한 고평가가 이루어진 현대 인터넷에서 참으로 많은 왜곡이 떠도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사람은 군사적인 무능함과 일부 졸렬한 대처 때문에 여러가지 오해를 뒤집어 쓰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이괄을 역적으로 몰아죽였다든지[4], 자기 식솔들을 지키려고 병력들을 분산 배치했다든지[5], 김자점을 신임해서 권력의 중추에다 올려놓았다는 왜곡 등등.

하지만, 김류의 탓으로 욕먹는 사건의 태반은 김류한테 직접적인 권한이 없거나, 다른 서인들한테 쪽수로 쳐발려서 김류가 냈던 반대 의견이 묵살되었던 사례들이 압도적으로 많다.[6]

그에 대한 사료를 접할 때는 이런 점을 감안하면서 정적들과 당대 야사에서 그에게 붙인 악소문들이 사실인지를 분간할 필요가 있다. 정보가 한정되어 있었던 당대의 백성들이라면 모를까, 모든 정보를 접할 수 있는 현대인들이 그저 얼굴간판에 가까웠던 성향의 김류한테 당대의 모든 문제점과 유치한 헛소문들을 반복하는 것은, 역사의 알맹이를 보는 관점이 아니라, 결과론적인 증오일 뿐이다. '능양군 혈통은 우생학적으로 쓰레기!' '김류개새끼!' 라고 욕만 써서 당대의 조선을 전부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김류가 서인들만 챙기고 다른 붕당은 쩔이로 만들어 놓은 것을 국론통일과 안정화에 힘쓴 것이 되는 것일까? 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이 시절의 조선이 겪은 정치상황이 왜 회복기의 징검다리로서 평가받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애초에 김류는 정치적 암투를 하는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고, 서인끼리 다툼이 벌어지면 정치 쪽으로는 본인의 생존문제가 아니면 그닥 적극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7] 애초에 광해군이든 인조든 누가 왕이 되었든지간에, 이때 조선의 문제는 광해군의 폭주 이후 내치가 멸망하고 붕당들이 흘려대는 피로 국력 자체가 갈려나가고 있었다는 점인데, 김류로 대표되는 일부 신중론자 서인들은 그 삽질에 가담하기는 했으나 그나마 국력을 회복하고 안정기에 접어드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눈에는 잘 띄지 않아서 잊혀졌으나) 국정의 안정을 다지는데 노력했다.

물론, 기록에서 보여주는 무능함이나 옹졸한 성격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이상의 폄하를 받을 필요는 없는, 음모가로서의 성향은 부족하여 그냥 붕당끼리 국력을 깎아먹을까봐서 걱정하던 신중한 타입의 행정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 바로 김류인 것이다. 천하의 명신 최명길조차도 의외로 김류와 생각이 일치하는 분야가 많을 정도였으니, 판단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정치적인 뒷심이나 다른 서인들과의 관계가 부족한 모습이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2.1.3.1. 병자호란 시기의 행적
호란 당시에는 국가 방어 총책임자인 도체찰사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군관은 죄다 자기 식솔과 재산 보디가드로 써먹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건 김류랑 대립하면서 척화론을 주장하던 중신들의 입에서 나오는 조롱섞인 왜곡 기사이다. 본인은 주화론을 주장하면서도 싸울 준비를 열심히 도왔다. 애초에 정말로 자기 식솔만 중요했으면, 인조를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갔어야 한다.

물론, 호란에서 삽질을 한 그의 아들이나, 김자점 같은 인물들은 애초에 인조반정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점을 비추어볼때, 그리고 그가 그 서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을 돌이켜볼때, 하필이면 그가 세운 임금이 인조라는 점을 생각해볼때, 그가 후대에까지 욕을 먹는 것을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2.1.3.2. 일관성이 없었다?
김류가 인조 정권에서 일관성 없이 정치를 했다는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리다. 김류는 각종 문제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소신있게 펼쳐서 탄핵을 많이 받았다. 당장 아들의 사건에서도 김류는 삭탈 관직되었으며, 그럼에도 김류를 대체할만한 인물이 없어서 계속 복권되었고, 노환으로 퇴직할 때까지 많은 일을 했다.

정치가 아닌 군사적 판단에 있어서는 다소 오락가락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왕이나 기타 조정 대신들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매우 혼란하고 급박한 때 일단 방향이라도 잡는 형태로 판단을 시도했던 것이고, 또 최종적으로는 맞는 판단을 했다. 하필 그 맞는 판단들만 쏙쏙 골라서 전부 거절당해서 문제였을 뿐이다.

2.1.4. 옹호론 정리

현대의 전체적인 평가를 따지면, 기본적인 잡일에 능했던 보수적인 엘리트 관료. 당대의 충신 최명길은 김류에 대해 "신중하지만 큰 식견은 없다"고 평했다.[8] 인조 1년 11월 5일 신유 2번째 기사[9] 즉, 행정 업무에 관해서는 유능하지만, 국가의 책략을 다루기에는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것. 게다가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들은 호란과 각종 삽질의 영향으로 인해 반역자로 전락한 이괄, 심기원이나, 간신이자 역적이었던 김자점, 아집만 가득해서 과격하고 독선적인 행보로 일관하던 이귀를 제외하면 다른 시기 공신들에 비해 평이 꽤 나쁜 편이다.

특히 자식 농사는 안 좋은 것을 넘어 막장이었다. 아들 김경징 병자호란 때 중책을 맡고도 술만 퍼마시다가, 무려 강화도를 청나라에게 공짜로 내주는 과오를 범해 결국 사사당했다. 심지어 손자놈인 김진표는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협박해서 자살하게 하는 패륜을 범했고, 김류는 황당하게 아내와 며느리를 비롯한 가족들을 잃어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아들 때문에 늙어서도 어린 삼사 간원들에게까지 조롱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흔히 라이벌로 이귀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이귀 자신은 과격한 언사로 인해 왕의 신임을 얻지 못해 죽는 날까지 정승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자식 농사 면에선 김류가 한참 처지기도 한다.

어쨌든 인조반정, 그리고 이후의 굵직한 사태에 간접적인 기여를 했으며, 역사적으로 본다면 도의적인 책임 정도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이상의 어떠한 인물평가를 하기에는 직접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행동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니고, 평화기에는 치적도 많이 쌓은 편이다. 이괄의 난이나 인터넷에서 묘사하는듯한 프리메이슨 같은 절대악 수준의 인물은 아닌, 주변에 가지각색의 기라성 같은 또라이들이 넘쳐났던 당대의 간신들에 비해선 평범한 소인배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2.2. 부정적 평가

2.2.1. 정쟁을 일삼던 편당적인 권력가

위에서는 김류가 정치적 암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김류는 자기 뜻대로 인사(人事)가 진행되지 않으면, 반드시 원한을 품고 보복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이가 있으면 팍팍 밀어줬지만, 반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참소하여 좌천시켰다. 그나마 이귀, 최명길 등 호락호락하지 않은 중신들을 상대할 때는 티격태격 하는 정도로 그쳤지만, 건드려도 탈이 없을 만만한 사람을 상대할 때는 철저히 짓밟고 핍박했다. 그는 팔이 안으로 굽던 편당적인 위인이었다.

그가 편파적인 인물이라는 대표적인 예로는 아들 김경징에 대한 편애를 들 수 있다. 무오 식년시 강경과 신유년 별시가 부정행위가 심하여 급제를 무효로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경징이 신유년 별시에 급제한 상태였기 때문에, 조정 신료들은 김류의 눈치를 보아 급제자들을 대상으로 최종 시험을 다시 시행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아야 했다. 김경징이 군관을 장살하여, 사헌부가 처벌을 주장했을 때는, 나만갑이 대사헌 정엽의 사위라는 이유로 김류에게 원한을 샀다. 김경징이 일개 범죄자를 국문으로 처리하려 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을 때는, 그 행태를 비판했던 양사의 간원들이 역으로 벌을 받아 체직되었지만, 김류는 그러한 일련의 상황을 지켜만 볼 뿐 침묵했다. 이렇듯 김류는 아들이 관련된 사안에서는, 아들의 편을 들거나 침묵했고, 아들을 비판하는 사람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는 반감을 품고 보복을 꾀했다. 김류가 아들의 편을 들지 않은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은, 병자호란 당시 김경징의 행실에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모두 격노하여 들고 일어나, 김경징은 물론이고 김류와 집안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때였다.

소북의 영수 남이공을 대사헌[10]으로 천거했을 당시의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남이공의 등용은 김류가 고도의 정치적 계산 아래 행한 인사였다. 당시 조정 신료들이 이를 비판하자, 김류는 그들과 대립하여 힘 싸움을 벌였고, 나만갑 등 나이 어린 관료들[11]을 참소하여 가차 없이 외직으로 좌천시켰다.

또 다른 예로는, 김세렴과 관련된 사건이 있다. 김세렴은 광해군 때 폐모론 논의에 불참한[12] 벌로 유배를 갔다가 반정 초에 등용된 인물인데, 김류가 그 재능을 매우 아꼈다. 인조 7년 당시 김세렴은 전랑 추천에 올라 있는 상태였는데,[13] 이조정랑 김육은 김세렴은 전랑의 자격이 없다고 여겼고, 그래서 이조전랑 심지원에 의해 전랑 추천자 명단에서 김세렴이 삭제되었다.[14] 그런데 전랑 추천자 명단에 나만갑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김류는 나만갑이 김세렴을 모함했다고 여겼다. 그 결과 나만갑은 김류의 참소를 받아 중도 부처의 형벌을 받았고,[15] 김세렴을 추천 명단에서 삭제하게 한 김육 역시 문외 출송되었다.[16] 자신이 밀어주는 인물이 등용되지 않은 데 대한 보복을 한 것이다.
(전략)김류가 아뢰기를,

"(중략)김세렴(金世濂)은 류희발(柳希發)의 사위이면서도 혼조(昏朝) 때에 다른 입장을 견지하였으니, 그 지조가 가상합니다. 그리고 재능도 있었으므로 신이 전조(銓曹)에 있을 때 그의 사람됨을 보고 애지 중지하였습니다. 지난해 난리가 일어났을 때 김세렴이 조모의 상을 당하여 아버지 대신 복을 입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얼토당토 않는 말로 그를 비난하고 상복을 벗은 후에도 청직(淸職)에 의망하지 않았으니, 정말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중략) 나만갑(羅萬甲)은 위인이 부박하여 걸핏하면 많은 말을 하고 나서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전랑(銓郞)에 적합하겠습니까. 나만갑을 쓰고 김세렴을 내친다면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있어 무엇이 이보다 더 불공정하겠습니까. (중략) 요즘 듣건대, 나만갑이 전판(銓判)[17]을 비방하기 때문에 전판도 그 자리를 불안하게 여기고 있다 합니다. (중략) 나만갑은 사람됨이 매우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상(上)께서 그를 다시 발탁하여 등용하신 뒤로 그의 우기(愚氣)가 더해져 제반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마치 자기 혼자 담당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중략) 외직(外職)에 보임(補任)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후략)
인조 7년 7월 11일 갑오 1번째 기사
상(上)이 나만갑(羅萬甲)을 멀리 유배보내고 김육(金堉)을 나국(拿鞫)하라고 특명을 내렸다.(후략)
인조 7년 7월 12일 을미 2번째 기사
(전략)김세렴은 총명한데다 기억력이 좋아 일찍이 장원급제하였다. (중략) 반정 초에 그를 불러 수찬(修撰)에 제수하였는데, 김류가 더욱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늘 말하기를,

"김세렴은 진정한 학사(學士)이다. 경연에서 학문을 강론하는 데에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하였다. 그러다가 김류가 이조 판서가 되자, 그를 추천하여 전랑(銓郞)으로 삼고자 하였다. (중략) 이조 정랑 김육(金堉)이 사명(使命)을 받고 출발하려 할 즈음에 좌랑 심지원(沈之源)에게 말하기를,

"김세렴이 이미 복을 벗었으나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그 전에 추천한 것을 그대로 쓰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대가 헤아려 처리하라."

(중략) 김류가 이를 듣고는, 나만갑(羅萬甲) 등이 평소 김세렴과 사이가 좋지 않아 모함한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그 뒤에 경연에서 아뢰기를,

"나만갑은 경박한 사람으로 전상(銓相)의 권리를 침해하였습니다."[18]

하였다. 이에 상이 또한 유언비어를 듣고 의심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마침내 크게 노하여 나만갑은 중도 부처하도록 명하고, 김육은 금부에 내린 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모함하였다고 하며 문외 출송시켰다.
인조 8년 4월 24일 계유 2번째 기사
2.2.1.1. 아들 편애
김류의 아들 김경징은 행실에 문제가 매우 많은 인물이었다.(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김류는 그의 아버지이며 동시에 조정의 권신이었으므로, 김경징을 계도할 당위성과 힘이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아들과 관련된 사안에선 조정의 신료들을 압박하거나 혹은 인조의 뒤로 숨어 침묵했다. 그 결과 김경징은 특혜를 누리거나 잘못에 비해 가벼운 처벌을 받았으며, 이는 김경징이 천지분간 없이 날뛰는 계기가 되었다. 즉, 김경징의 만행에는 김류도 책임이 있다.
2.2.1.1.1. 석연치 않은 계해년 개시 시행
인조 1년,( 1623년) 사간원이 계축년 이후의 파방(罷榜. 과거 급제자 발표를 취소함.) 등을 청했다. 계축년은 1608년으로 광해군이 즉위한 해이다. 즉, 광해군 즉위 이래 시행된 모든 시험은, 부정이 의심되니 전부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 중에서도 무오( 1618년) 식년시 강경(講經)과 신유 별시(1621년 10월 20일)가 특히 논란이 많았다. 관련 출처
문과 초시 초장에는 강경과 제술의 두 가지 시험 방법이 있으며, 이중 강경은 구술시험에 해당한다. 강경에는 책을 보지 않고 물음에 답하는 배강과 책을 보고 뜻을 말하는 고강이 있었다. #
고강에는 칠서강(七書講)·사서강(四書講)·이서강(二書講)·일경강(一經講) 등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문과 식년시 초장에는 칠서강을 행했고 이것을 가장 중요시했다. 응시자가 편명을 기록한 찌들이 담긴 통에서 하나를 뽑고, 이어서 대문(大文)의 수를 기록한 찌들이 담긴 통에서 하나를 뽑으면, 시관이 이것을 강지에 기록하고 시험을 시행했다.[19] #
그런데 광해군 때는 강경에서 부정행위가 만연했다고 한다. 응시자가 미리 자신이 원하는 주제를 선정하고, 시험 날 시관이 해당 응시자로부터 준비된 자표를 받아 강지에 기입했던 것이다. 무슨 문제를 풀 것인지 사전에 서로 짰던 셈이다. 이 때문에 식년시(1615년) 강경 시험 이후에는 어떤 사람이 길가의 대문 벽에다가 ‘문장과 재사가 이처럼 성대한 것은 2백 년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네. 자기 원하는 칠대문을 줄줄 외고 있으니 자표를 서로 짠 것은 귀신이나 알겠지.(文章才士盛於斯 二百年來始見之 七大文通從自願 字標相應鬼神知)’라고 시를 지어 붙이기도 했는데, 세간에서 조롱거리 삼아 이 글을 항상 읊고 다녔다고 한다. 광해군일기 정초본 109권, 광해 8년 11월 27일 갑오 8번째 기사 1615년 식년시 특이사항
결국 1618년 8월 12일 무오 식년시 때, 이 문제가 크게 불거져 전시를 연기하였다. 그리고 전시를 언제 시행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계속 시간만 흐르다가, 광해군일기[중초본] 173권, 광해 14년 1월 25일 신유 1번째 기사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류희분(광해군의 처남)에게는 아들과 조카 5명이 있었다. 이중 4명이 신유년(1621년) 10월 20일 별시에 응시했고, 다른 한 명은 같은 달 있었던 알성시에 응시했다. 당시 시험관은 이들의 이름과 자를 부챗살에 적어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이들 다섯이 합격하자, 사람들은 오류(五柳, 다섯 류씨)라고 불렀다.[20]
신유년(1621년) 10월 20일 별시에서 이덕형의 아들과 박홍구의 아들이 함께 합격했다. 그러자 시험관은 ‘죽은 재상의 아들과 현 재상의 아들을 서로 비교할 수 없다.’고 여겨 박홍구의 아들을 합격시켰다.[21] 신유년 별시 특이사항
이것이 논란이 되어 신유 별시는 합격자 발표를 하지 않고 미루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조(該曹, 형조)와 대신들은 이 두 시험을 모두 파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류의 아들인 김경징이 신유년(1621년) 10월 20일 별시에서 참방[22]된 상태였기 때문에, 시험 합격자들만 따로 추려서 재시험을 치르자고 의견을 굽혔다. 그리하여 무오년(1618년) 식년시 강경의 합격자와 신유년(1621년) 별시 합격자 가운데,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거둔 자들을 대상으로 인조1년(1623년) 8월 12일 개시(改試)를 시행하였다. 덕분에 김경징은 과거시험을 처음부터 다시 준비하는 수고를 덜고, 나아가 곧장 최종 시험을 치르는 특혜를 입었다. 인조 1년 개시 특이사항
(전략)
"계축년 이후에 역적의 괴수가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과거를 가지고 당파를 심는 길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사정을 두거나 차술(借述)[23]케 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각년의 모든 방(榜)을 일일이 조사하여 삭제하기도 하고 파방하기도 하여 선비들의 분한을 풀어주소서."

하니, 상이 예조에 계하하였다.(중략)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그 사이에 혹은 정당하게 참방한 자가 있으니 뒤섞어 파방하는 것은 부당할 것 같습니다. 삭제해야 할 사람만 삭제해야지 전체를 파방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그 뒤 경연에서 다시 품하여 친경 별시(親耕別試)와 함께 강시(講試)를 다시 행하고 합쳐 한 방을 만들기를 청하였다.이 두 방은 흉도들이 가장 심하게 부정을 행한 것이어서 공론이 모두 파방해야 한다고 했으나, 김류(金瑬)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별시(別試)에 참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조와 대신이 그 형세에 견제되어, 처음엔 조사해 삭제하기를 청하더니 끝내는 다시 시험보이자고 하였다. 유신의 처음에 행사의 구차함이 이처럼 심하므로 식자들은 공도가 행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인조 1년 3월 17일 정미 1번째 기사
2.2.1.1.2. 아들의 살인죄 방관
인조 2년 7월, 김경징은 군관을 곤장 때려 죽였다. 인조는 훈계 정도로 넘어가려 했지만, 사헌부는 법에 따라 죄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형조에서 이 사안을 다루다 인조의 심기를 거슬려서, 형조판서 이시발이 하옥되어 심문을 받은 후 면직당했다.[24] 인조는 김경징에 대한 형량을 다시 고하라고 명령했고, 사헌부는 형량을 낮추어 김경징의 벼슬을 삭직하는 선에서 끝냈다. 그리고 이때 김류는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이 당시 대사헌은 정엽이었다. 그래서 나만갑은 정엽의 사위라는 이유로 김류 부자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다. 그러다가 나만갑이 남이공의 체직(遞職 벼슬을 갈아냄.)을 주장하자 김류는 제대로 분노가 폭발했고,(남이공을 천거한 사람이 김류였다.) 그 결과 나만갑은 김류의 견제 아래 한동안 외직을 전전해야 했다.(자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후술한다.)
공조 참판 김경징(金慶徵)이 군관(軍官)을 장살(杖殺)하고 상소하여 대죄(待罪)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뒤로는 이 사람을 경계삼아 삼가 형장(刑杖)을 남용하지 말라."

하였는데, 헌부가 유사(有司)로 하여금 법에 따라 죄를 정하기를 청하였다. 그 뒤에 형조가 조율(照律)하여 아뢰니, 상이 양단(兩端)을 잡는 것을 노여워하여 판서 이시발(李時發)을 유사에게 내리라고 명하는 한편 다시 조율하게 하였다. 헌부가 또 정원이 김경징의 소를 봉입(捧入)하였다 하여 추고하기를 청하였다.
인조 2년 7월 16일 무진 4번째 기사
2.2.1.1.3. 국문(鞠問) 남용 침묵
1632년, 김경징은 자신의 종이 자신을 저주했다고 고발했다. 이 과정에서 박승황의 아내 말질정도 국문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위관 김상용은 “고의로 살인을 도모한 죄를 받는 것은 옳으나, 삼성(三省,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에서 국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간언했다.

국문은 역모 같은 국가 안위와 관련된 사건이나 혹은 중대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 죄인을 심문하는 것을 말한다. 단지 범죄를 꾀했다는 이유만으로 국문까지 행하는 것은 도가 지나친 처사였다. 사헌부와 사간원도 김상용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인조는 이를 묵살했고 오히려 양사의 사람들이 체직되었다. 결국 말질정은 장을 맞다가 죽었다. 이때도 김류는 침묵을 지켰다.
경기 감사 김경징(金慶徵)이 상소하기를,

"불행하게도 사패(賜牌)한 계집종이 남몰래 옛 주인의 사주를 받고서 감히 신의 집을 모조리 없앨 꾀를 내어 부엌·굴뚝·기둥·지붕에다 흉측한 물건을 묻어두었는데, 음험하고 사특한 짓이 빌미가 되어 어미의 병이 위독해졌습니다. 자식된 자의 망극한 정으로는 그의 살점을 저며도 분함을 씻기에 부족합니다만, 신은 일단 법조(法曹)에 고발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 소를 보고 금부에 명하여 사주한 자를 잡아다 국문해서 공신(功臣)을 모해한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다. 금부가 저주한 죄인 칠향(七香)이 끌어댄 박자흥(朴自興)의 처와 박승황(朴承黃)의 처를 잡아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박자흥의 아내는 이이첨(李爾瞻)의 딸인데 잡아들이라는 명이 있었다는 말을 듣자 즉시 자살하였고, 계집종 칠향은 형문(刑問)을 받고 승복하였다. 말질정(末叱貞)은 바로 박승황의 아내로서 신문(訊問)해도 승복하지 않았는데 위관(委官) 김상용(金尙容)이 ‘말질정의 박가(朴家)의 절친(切親)으로 설혹 그 일을 관여하여 알았더라도 고의로 살인을 도모한 죄를 받아야 옳지, 함께 삼성(三省)에서 국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아뢰고, 양사도 삼성에서 국문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引避)하여 체직되었으나, 상이 끝내 상용의 의논을 따르지 않아, 말질정이 끝내 장하(杖下)에서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박승황(朴承黃)이 자기의 형인 박승종(朴承宗)과 평생 동안 서로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말질정이 박승종의 부자(父子)에게 무슨 연연한 생각이 있기에 몰래 앙갚음할 꾀를 품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할 처지에 빠졌겠는가. 다만 이 일이 김류(金瑬)의 집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위관 이하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곧장 형추(刑推)를 청하여 삼성에서 국문하다가 결국 장사(杖死)하기에 이르렀으므로 물의가 이를 그르게 여겼다.
인조 10년 12월 1일 갑자 1번째 기사
2.2.1.2. 나만갑과 그 주변인에 대한 집요한 탄압
서인 중, 인조반정에 직접 참여한 이들을 공서,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을 청서라고 한다. 인조 3년(1625년) 4월 5일, 소북의 영수 남이공이 대사헌으로 임명되었는데, # 김류의 천거로 인한 것이었다. 청서파의 거두 김상헌은 해당 인사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공서의 일원이던 이귀 역시 김류를 비판했다.
청서의 소장파였던 박정, 유백증, 나만갑, 김반, 이소한 또한 남이공의 대사헌 발탁을 비판했는데, 인조는 장관과 상의도 없이 나섰다는 이유로 그들 다섯을 외직으로 좌천시키려 했다. 김류 역시 “박정과 나만갑이 주도하고, 나머지는 그들을 따라 나선 것이니, 박정과 나만갑은 중벌을 주되 다른 셋은 처벌을 가볍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처벌에 찬성했다. 이에 김상헌, 이준 등 조정 신료들은 “박정 등이 장관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잘못이 맞지만, ‘남이공은 대사헌에 적격이 아니다.’라는 그들의 의견은 일리가 있다. 벌을 주는 것은 과하다.”고 맞섰다.

이에 인조는 당사자인 남이공은 외직인 함경감사로 발령했고, 박정과 나만갑은 귀양 보냈으며, 김류를 비판한 이귀를 파직시키는 것으로 응답했다. 김류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전략)이때 남이공이 외람되이 헌장(憲長)을 차지하여 인망(人望)이 부족하였는데 김류가 천거해 임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한마디도 입 밖에 내어 논하지 못하였다. (중략) 최명길(崔鳴吉)과 장유(張維)가 모두 진정시켜 보합(保合)을 유지할 것을 말하였으나 박정은 듣지 않고 유백증, 교리 나만갑(羅萬甲)·김반(金槃), 부수찬 이소한(李昭漢)과 더불어 차자를 올리기를,

"(중략)대사헌 남이공은 약간의 재국(才局)은 있다 하지만 그 행신과 처사에는 본디 칭송할 만한 선한 점이 없고 류희분(柳希奮)·박승종(朴承宗)과 심복이 되어 청의(淸議)에 버림받은 지 오래입니다. (중략) 신들도 남이공의 기왕의 허물을 가지고 오늘날 전체를 버릴 소지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풍헌(風憲)(사헌부)의 중책을 결단코 이 사람에게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공론이 날로 격발하여 막기 어려우니, 삼가 속히 체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중략) 옥당이 장관을 기다리지 않고 버젓이 차자를 올려 그를 물리치려 하니, 이는 참으로 무슨 심사인가. 남이공이 이 직임에 있은 지 지금 이미 달포가 지났으나 대신·대관 중에 한 사람도 그가 적합하지 않음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옥당은 공론을 가탁하여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를 배척하니, 무례하기 그지없다. 이 버릇이 자란다면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할 것이니, 나는 매우 한심하게 여긴다. 이 뜻을 정원은 알라."
인조 3년 5월 7일 갑인 2번째 기사
상이 하교하기를,

"(중략)박정(朴炡) 등 다섯 사람을 논사(論思)하는 시종(侍從)의 지위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아울러 체직시키고, 해조로 하여금 궐원에 따라 외방에 보직시키게 함으로써 그 버릇을 징계케 하라."

하였다. 도승지 김상헌(金尙憲) 등이 아뢰기를,

"(중략) 박정 등이 장관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스스로 차자를 올린 것은 구규(舊規)를 어긴 것이긴 하지만 ‘상의하지 않았다.’고 말씀한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이공이 헌장(憲長)에 합당치 않다는 논의도 또한 박정 등이 졸연히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중략)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의 아량은 하늘처럼 넓으시니 필시 재차 생각하실 것이기에 신들은 삼가 붓을 쥐고 기다립니다."

(중략)이조 판서 김류가 경연에 입시하였다가 아뢰기를,

"(중략)이 논의는 박정에게서 발론되었고 장관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았으니, 또한 도리를 잃은 것입니다. 나만갑(羅萬甲)은 본시 기가 성한 사람이어서 일 벌이기를 좋아하니 조정이 장차 안정되지 못할 단서가 있습니다."

(중략)김류가 또, 따라 참여한 사람은 외직에 보임하지 말자는 뜻으로 재삼 진계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에 집의 이준(李埈), 장령 강대진(姜大進)·김영조(金榮祖), 지평 황뉴(黃紐) 등이 아뢰기를,

"(중략)남이공은 재주는 버릴 수 없으나 그 행적에는 하자가 있으니, 옥당의 논의도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논의의 발단은 경솔한 잘못을 면치 못하나 그 마음의 소재는 서로 경알하는 사심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중략) "

하고, 정언 이경석(李景奭)은 아뢰기를,

"(중략) 장관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차자를 올렸으니, 경솔한 실책을 면키 어렵습니다. 그러나 말을 들어주는 방도는 다만 마음의 공사(公私)와 일의 곡직(曲直)을 볼 뿐입니다. 마음이 정말 공정하고 일이 진실로 정직하다면 혹 경솔하고 과격하다 하더라도 현명한 군주는 이것을 이유로 말한 자를 죄주지 않습니다. (중략) "

하고, 사간 이윤우(李潤雨), 헌납 권도(權濤), 정언 고부천(高傅川)은 아뢰기를,

"(중략) 소북(小北)과 대북(大北)이 수십 년 동안 나라를 병들게 하고 윤기를 무너뜨린 변괴가 있었는데, 그 일을 주장하고 창시한 자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일일이 추론(追論)하려하면 양사(兩司)에 두는 것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백집사(百執事)를 수행하게 하는 것만도 다행인 것입니다. 어찌 연소배가 처사를 경솔하게 한 잘못을 가지고 다시 엄한 전지를 내려 모두 체직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를 규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 차자를 올려서 변명했으니, 신들은 옥당과 그 죄가 균등합니다. 옥당과 함께 체척(遞斥)의 벌을 받게 하소서."
(후략)
인조 3년 5월 17일 갑자 2번째 기사
특명으로 박정(朴炡)을 함평 현감(咸平縣監)으로, 유백증(兪伯曾)을 이천 현감(伊川縣監)으로, 나만갑(羅萬甲)을 강동 현감(江東縣監)으로 삼았다. 이 3인은 모두 강경하고 정직하여 과감히 말하였다. 경연의 직에 있으면서 관원의 부정을 규핵(糾劾)하였는데 일시에 외직에 보임되니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후략)
인조 3년 7월 3일 기유 1번째 기사
(전략)사신은 논한다. 지금 세 신하(박정, 유백증, 나만갑)가 외직에 보임된 것은 모두 김류가 얽어 배척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일시의 사대부가 모두 그의 행사를 바르지 않게 여겼다. 이에 이르러 겉으로 구해(救解)하는 빛을 보였으나 은연중 이 세 신하를 왕비·왕숙문의 당에 비하였으니, 아, 너무도 심하다.(후략)
인조 3년 7월 5일 신해 1번째 기사
(전략)이귀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의 말을 쓰지 않으시니 신이 우러러 아뢰고 싶지 않으나, 다만, 이 일은 존망이 달려 있는 것이므로 침묵만 지킬 수 없습니다. (중략) 지금, 세 학사(박정, 유백증, 나만갑)가 외직에 보임된 것은 참으로 불행인 것입니다. 근일 이것 때문에 사대부들 사이에 기상이 수참(愁慘)합니다. 나만갑(羅萬甲) 같은 자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벌할 만한 죄가 없고, 재능이 많고 천성이 곧으니 버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신이 김류에게 묻기를 ‘나만갑이 무슨 죄가 있는가?’ 하였더니, 김류 또한 ‘그가 무죄하나 다만 그 마음씨가 험함을 죄준다.’고 하였습니다.[25] 사람을 논함에 어찌 마음을 주벌하는 법을 쓸 수 있겠습니까. 나만갑의 죄는 정엽(鄭曄)의 사위가 된 데에 불과합니다. 정엽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박정과 함께 김류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살인한 죄를 논하였는데 오늘날 나만갑이 외직에 보임된 것은 여기에서 싹튼 것입니다.(중략) 신이 일찍이 전하께 말씀드리기를 ‘만일 한쪽의 말만 들으면 반드시 간사함이 생긴다.’ 하였는데 지금 과연 그렇습니다. 김류가 겉으로는 조정한다는 것으로 상달하기 때문에 전하께서 그를 믿고 이 세 사람을 내쫓기까지 하였습니다. (중략) 김류는 과연 권세가 중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리와 범처럼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거의(擧義)한 50여 인이 모두 김류에게서 마음이 떠났는가 하면 심지어 ‘7증(七憎)’이니 ‘5증(五憎)’이니 하는 말까지 있습니다. 지난번 김류가 최명길에게 말하기를 ‘공들이 무슨 까닭으로 여러 명사를 모아 나를 모함하려 하는가?’ 하자, 최명길이 ‘공은 무슨 까닭으로 세 학사를 외직으로 내보냈는가? 사람들이 모두 영공을 사나운 범에 견주고 있다.’ 하니, 김류가 ‘영공이 아니면 누가 나를 위해 말을 다하려 하겠는가.’[26]"왜 나한테만 뭐라 그러는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더구나, 신이 한 일은 김류가 반드시 남김없이 공척(攻斥)하는 데이겠습니까. (중략) 김류는 혐원(嫌怨)에 따라 사람을 모함하고 배척하였으며 또 심기원(沈器遠)·최명길·장유(張維)·신경진(申景禛)의 무리를 모함하고자 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또 그 아들 경징이 서로(西路)에 봉명 사신(奉命使臣)으로 가서 거칠고 비루한 일을 많이 행하여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합니다."
(후략)
인조 3년 7월 12일 무오 1번째 기사[27]
상이 하교하기를,

"찬성 이귀가 조정을 업신여기고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니 일이 극히 놀랍다.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여 훈신이 제멋대로 하는 버릇을 징계하라."

하고, (후략)
인조 3년 7월 12일 무오 2번째 기사

물론 이것만 가지고 김류를 비판할 수는 없다. 공서의 대두가 달갑지 않았던 청서, 청서의 견제가 껄끄러웠던 김류, 서인과 공서의 독주를 제재하고 싶었던 인조, 김류와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고 싶었던 이귀 등,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결과가 바로 남이공의 대사헌 발탁에 대한 갈등이기 때문이다. 이를 김류의 권력욕이 빚어낸 정쟁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게 평면적인 시각이다.

김류가 이 건으로 비판을 받는 것은, 자신의 의견에 반발한 사람들을 집요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김류는 매번 나만갑을 참소하여 외직으로 좌천시켰다. 나만갑의 지인들까지 싸잡아 함께 지방으로 내몰았으며 심지어 나만갑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조차 괘씸죄로 지방관으로 쫓아냈다. 때문에 나만갑은 인조 9년(1631년) 서용되기까지, 김류에 의해 본의 아니게 외직을 전전하게 된다.
(전략)김류가 아뢰기를,

"(중략)나만갑(羅萬甲)은 위인이 부박하여 걸핏하면 많은 말을 하고 나서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전랑(銓郞)에 적합하겠습니까. 나만갑을 쓰고 김세렴[28]을 내친다면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있어 무엇이 이보다 더 불공정하겠습니까. (중략) 요즘 듣건대, 나만갑이 전판(銓判)(여기서는 이조판서를 말한다.) 을 비방하기 때문에 전판도 그 자리를 불안하게 여기고 있다 합니다. (중략) 나만갑은 사람됨이 매우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상께서 그를 다시 발탁하여 등용하신 뒤로 그의 우기(愚氣)가 더해져 제반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마치 자기 혼자 담당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중략) 외직(外職)에 보임(補任)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후략)
인조 7년 7월 11일 갑오 1번째 기사[29]
(전략)이귀가 아뢰기를,

"나만갑에게 병통이 없지는 않지만 기절(氣節)만은 가상했기 때문에 소신이 원수(元帥)에게 추천하려고도 하였습니다. (중략) 신이 듣건대, 김경징(金慶徵)이 나만갑에게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이 찬성 댁에는 자주 가면서 우리 집에는 오지 않느냐?’ 하니, 나만갑이 대답하기를 ‘이 찬성께서는 나를 아들처럼 대해 주시어 모든 시비에 관한 문제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시지만, 너희 집에서는 나를 서리배로 취급하기 때문에 내가 가지 않는 것이다.’ 하였답니다. 그런데 좌상(김류)은 성격이 온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 너무 심하게 의심한 나머지 항상 외직에 보임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중략) 결과가 이렇게 되자 훈신들도 모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후략)
인조 7년 7월 16일 기해 2번째 기사
특별히 대제학 장유(張維)를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삼았다. 그 전에 장유가 차자를 올려 나만갑을 신구(伸救)하였는데, 차자의 말 가운데에 ‘어미와 영결(永訣)하게 되었다.’는 등의 말이 있었으므로 상이 장유가 만갑의 당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러던 중에 장유가 그의 말[馬]을 빌려주어 만갑으로 하여금 어미를 모시고 가게 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자, 상이 노여워하며 이르기를, "그의 차자 내용을 보면 ‘그의 어미와 영결하게 되었다.’고 말을 하였는데 또 말을 빌려주어 그 어미를 태우고 가게 했으니, 이는 임금에게 거짓으로 고한 것이다." 하고, 마침내 이렇게 제수하는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대체로 태학사(太學士)를 고을의 수령으로 내보내는 일은 과거에 없었던 일이므로, 명이 내려지자 조야(朝野)가 모두 경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장유는 염정(恬靜)한 인물로서 본래 경망스러운 거동이 없었는데 더구나 군부(君父)를 기망하면서 동류(同類)를 곡진히 감싸주겠는가. 어미와 영결하게 되었다고 한 말은 정리상 그의 절박한 상황을 거론함으로써 상을 감동시켜 깨닫게 해드리기 위한 기대에서였다. 그리고 그 모자(母子)가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자신의 말을 빌려주어 급한 처지를 구제해 준 것은 같은 조정의 동료로서 서로 돌보아주는 의리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것을 가지고 죄안(罪案)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인조 7년 7월 21일 갑진 1번째 기사
나만갑(羅萬甲)을 해주(海州)에 유배하였다. 처음에 나만갑은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중죄인을 서울과 가까운 곳에 유배시킬 수는 없다." 하여, 지역을 바꿔 유배한 것이다.
인조 7년 7월 29일 임자 1번째 기사
(전략)
상이 이르기를,

"나만갑에게 붕당을 조성하는 자취가 현저히 나타났기 때문에 김류(金瑬)가 그 풍조를 개혁하려 한 것이니, 어찌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전일 경연에서 어떤 이가 말하기를 ‘나만갑은 열 번을 쫓겨나도 그 마음을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인조 7년 8월 7일 기미 1번째 기사[30]
박정(朴炡)을 남원 부사로 좌천시켰다. 이는 상이 박정을 나만갑(羅萬甲)의 당으로 여긴데다가 남원이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이기 때문에 특별히 임명한 것이었는데, 시론이 박정을 애석하게 여겼다.
인조 7년 9월 10일 신묘 1번째 기사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만언차(萬言箚)를 올렸다. (중략)

사신은 논한다. (중략) 나만갑이 과연 죄가 있어 축출된 것이 아니며 장유와 박정을 외직으로 내보낸 것도 역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으니, 최명길이 차자를 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중략) 아, 김류의 처사가 과중하였으니 남의 말이 있는 것은 의당하나, (후략)
인조 7년 10월 3일 갑인 2번째 기사[31]
(전략)특지(特旨)로 유백증(兪伯曾)을 가평 군수(加平郡守)로 삼았다. 유백증을 나만갑(羅萬甲)의 편당이라 하여 쫓아낸 것이었다.
인조 7년 10월 3일 갑인 5번째 기사
대사간 이식(李植) 등이 상차하기를,

(중략)지난번 대신들이 탑전에서 나만갑을 계론(啓論)했던 뜻은 외직으로 보내어 억제시켜 보려던 것에 불과하며, 그들이 사제(私製)에서 논한 바를 들어봐도 역시 전랑(銓郞)의 의망을 정지시키고 지방 수령에 제수하고자 했을 따름이었습니다. (중략) 지금 전하께서는 대신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죄주기를 한층 가중시켜서 그 여파가 연루자에게 점차 확대되어 시끄러운 단서가 어지럽게 생겨나 도리어 대신들로 하여금 미안한 바가 있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당론을 진정시키고 알맞게 다스리는 도리이겠습니까.(후략)
인조 7년 10월 9일 경신 1번째 기사[32]
(전략)김세렴은 총명한데다 기억력이 좋아 일찍이 장원급제하였다. (중략) 김류가 더욱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늘 말하기를,

"김세렴은 진정한 학사(學士)이다. 경연에서 학문을 강론하는 데에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하였다. (중략) 김류가 이를 듣고는, 나만갑(羅萬甲) 등이 평소 김세렴과 사이가 좋지 않아 모함한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그 뒤에 경연에서 아뢰기를,

"나만갑은 경박한 사람으로 전상(銓相)의 권리를 침해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또한 유언비어를 듣고 의심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마침내 크게 노하여 나만갑은 중도 부처하도록 명하고, (후략)
인조 8년 4월 24일 계유 2번째 기사[33]

나만갑이 조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김류가 실각했기 때문이었다. 1631년, 인조는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추숭[34]하는 것을 논의했는데, 이때 김류는 강하게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로 말미암아 인조의 분노를 사서 체직당했고, 그렇게 김류의 기세가 한풀 꺾인 후에야, 나만갑은 비로소 제대로 관직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1623년 관직을 받아 1637년 귀양을 갈 때까지[35] 14년 가까이 정계에 있었는데 그중 절반이 넘는 세월(8년)을 김류의 참소로 한직을 전전했던 것이다.이름에 ‘갑’자가 들어가서 그런가 반평생을 갑질당하며 살았다
상이 대신인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좌의정 김류, 우의정 이정구(李廷龜) 등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추숭(追崇)하는 예를 오래 전부터 경들과 강정(講定)하려 하였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중략) 김류는 아뢰기를,

"(중략)사대부들이 모이기만 하면 반드시 이 일로 다투고 있습니다만, 온 조정의 의논은 모두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니, 소신도 의견이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중략) 신의 소견은 이것뿐이니, 절대 고치지 못하겠습니다. 이 일로 처벌을 주신다면 신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저 밖에 나가 엄한 처벌을 기다릴 뿐입니다."
(후략)
인조 9년 4월 20일 계해 1번째 기사
좌의정 김류가 면직되었다. 김류가 추숭하는 일을 극력 간쟁하여 굽히지 않다가 드디어 세 차례 정사(呈辭)한 끝에 체직되니, 조정이 모두 놀라며 탄식하였다.
인조 9년 4월 30일 계유 4번째 기사
전 교리 나만갑(羅萬甲)을 특별히 서용하였다. 이에 앞서 김류가 우상으로 있을 때 만갑이 부의(浮議)를 선동하여 자못 제멋대로 하는 조짐이 있다고 여겨, 상에게 아뢰었기 때문에 상이 곧 벼슬을 깎아 내쫓았었다. 마침 가뭄 때문에 사면을 받아 방면되었다가, 김류가 파직되자 상이 특명으로 서용하였다.
인조 9년 11월 13일 임오 2번째 기사

나만갑과 김류 사이의 불화 때문에, 병자록(나만갑의 저서)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는 나만갑 입장에선 분통을 터뜨릴 일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억압을 가한 사람은 김류이건만, 오히려 피해자인 나만갑을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을 나쁘게 묘사하는 날조꾼’으로 몰아가는 짓이기 때문이다. 병자록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지만, 그래야 하는 이유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왜 병자록을 맹신해서는 안 되는가? 왜 김류와 나만갑은 사이가 나빴는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류는 나만갑이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자, 모든 권력을 총동원하여 그를 외직으로 내몰고 중앙으로 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래서 둘의 사이는 매우 험악했다. 병자록을 읽을 때는 이를 감안하여 읽는 것이 좋다.

나만갑과 김상헌은 병자호란 이후 안동에 거주하며 교유를 지속하였고, 나만갑의 손녀와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항이 혼인하게 되어 사돈을 맺게 된다. 그 후손들인 안동 김씨, 특히 장동 김씨들은 김조순 이후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일원이 된다.
2.2.1.2.1. 반론
병자록의 경우에는 작자 나만갑의 악감정이 개입해 제대로 된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사실을 취사 선택해 기록하거나 거짓을 기록하는 일이 많아서 신빙성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 김류와의 불화 문제만으로 신빙성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나만갑은 거짓말을 많이 해서 스스로를 날조꾼으로 몰아간 것이지, 사이가 안 좋은 사람에 대해서 나쁘게 묘사했다는 이유만으로 날조꾼이 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만갑은 김자점이 12월 6일에 봉화를 보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고 기록했지만, 그의 기록은 상상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서 청군은 12월 8일에 압록을 넘었다. 게다가 김자점은 사태 파악을 위해 노력했으며 도원수로서 병력을 모아 대응에 나섰다.

최명길에 대해서는 김류 이상으로 저주를 퍼붓고 행적을 왜곡해서 기록했다. 인조는 출성할 때, 융복을 입었는데 이는 청측에서 인조를 죄인으로 간주하고, 항복한 죄인은 용포를 입을 수 없다는 요구를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만갑은 청측에서는 의복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최명길이 억측으로 군주에게 융복을 입혔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오달제와 윤집이 끌려갈 때는 청에 아첨하고 척화를 주장한 죄를 자백할 것을 강요했다고 기록하고 최명길을 간사한 쥐새끼라고 모욕했다.

또한 나만갑은 산성 수비군들이 척화신들을 내보내라 요구하며 소요를 일으킨 일에 대해서도 그 배후가 최명길이라 기록했다. 반면, 나만갑과 동일하게 남한산성에 머무르고 있었던 남급의 남한일기에서는 이를 유언비어로 취급했다.

나만갑은 실록에 기록된 김상헌의 국서 파손 행위에 대해서도 김상헌은 최명길을 꾸짖고 통곡했지만, 최명길은 웃으면서 다시 붙이면 된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반대로 남한일기에서는 김상헌의 호통에 대한 최명길의 항변과 이성구가 종묘 사직의 보존을 이유로 김상헌을 비판한 내용을 기재하고 있다. 나만갑은 자신의 기록 속 최명길에게 항변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다.

나만갑과 같은 공간에 있던 김상헌이 쓴 남한기략에서는 김류가 자신의 능력으로는 체찰사 직책을 수행하기 어렵다며 김신국에게 양보하려 하고, 매사 소극적이고 전투를 두려워하는 겁쟁이처럼 묘사된다. 김상헌의 기록에 따르면, 김류는 여러 번 기회가 왔음에도 지속적인 출전 요구를 거부했고, 전투를 차일피일 미룬 것 때문에 막상 싸웠을 때는 시기를 놓쳐 패배를 자초한 자다. 그런데, 나만갑은 김류가 내려가지 않으려는 병사들을 독촉해서 패전을 자초했다고 기록했다. 같은 척화파 사이에서도 말이 맞지 않는 것이다.

현대의 법정에서도 피고나 원고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증인의 증언에 대해서는 신빙성을 의심한다. 이는 상식이다.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어느 개인에 대해 깊은 악감정을 가진 개인이 쓴 기록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작자가 피해자란 이유로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피해자면 사실을 날조해도 된다는 것인가? 나만갑이 분통을 터뜨리건 말건,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2.2.2. 군사적 무능

평시의 업무 능력은 그래도 중간은 가는 수준이었으나, 전쟁이나 전투에서는 상당히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김자점과 인조에게 책임을 돌리나 실상 인조가 판단을 그르치게 된 것에는 김류의 무능함 또한 상당한 몫을 차지했다.

인조반정 당시 계획이 누설되자, 한시가 급한 상황에 대장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집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 찌질한 모습을 보였다.[36] 결국 이괄이 대장으로 추대되어 거사를 주도했고, 김류는 심기원과 원두표가 찾아와 설득한 끝에야 밖으로 나서 반정에 합류했다. 겁이 나서 숨어있던 주제에 이괄한테 대장 노릇을 하려 들어서 싸움이 붙은 것은 덤이다.
(전략) 의병은 이날 밤 2경에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김류가 대장이 되었는데 변란을 고발했다는 말을 듣고 포자(捕者)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 가고자 하였다. 지체하며 출발하지 않고 있는데 심기원과 원두표(元斗杓) 등이 김류의 집으로 달려가 말하기를, ‘시기가 이미 임박했는데, 어찌 앉아서 붙잡아 오라는 명을 기다리는가.’ 하자 김류가 드디어 갔다.

이귀·김자점·한교(韓嶠) 등이 먼저 홍제원으로 갔는데, 이때 모인 자들이 겨우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고 김류와 장단의 군사도 모두 이르지 않은 데다 고변서(告變書)가 이미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군중이 흉흉하였다. 이에 이귀가 병사(兵使) 이괄(李适)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 김류가 이르러 전령(傳令)하여 이괄을 부르자 괄이 크게 노하여 따르려 하지 않으므로 이귀가 화해시켰다.(후략)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

병자호란 때도 그의 무능함은 여전했다. 청군이 양철평(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 일대)까지 왔기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해놓고, 뜬금없이 “과천과 금천을 경유하여 강도(강화도)로 이동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적이 이미 지척까지 와 있고, 어디에 얼마만큼의 병력이 위치하는지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당연히 삼사는 극력 반대했지만, 인조는 김류의 말대로 새벽에 바로 성을 나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보라가 심해서 다시 돌아와야 했지만.
그 뒤로도 김류는 강화도로 가자는 발언만 되풀이했다. 심지어는 “대신 십여 명만 데리고 충원(忠原)이나 영호남으로 피하자.” “야습으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자.” “극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은밀히 적진을 가로질러 가자.” 같은 말까지 꺼냈다. 전략도 전술도 없이 그저 요행수만 바라는 졸장의 전형이란, 김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전략)대가가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 (중략) 상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중략) 김류가 아뢰기를,

"고립된 성에 계시면 외부의 구원도 없게 되고 마초와 양식도 부족할 것입니다. 강도는 우리에게 편리하고 저들에게는 침범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또 저 적은 뜻이 상국(上國)에 있으니, 반드시 우리를 상대로 지구전(持久戰)을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강도로 가시는 것이 편리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어 김류의 귀에 대고 하문하기를,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하자, (중략) 김류가 아뢰기를,

"경기(輕騎)로 금천과 과천의 들을 가로질러 가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삼사가 모두 간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어가를 옮길 계획을 정하니, 하룻밤 사이에 성 안이 온통 들끓었다.
인조 14년 12월 14일 갑신 3번째 기사
대가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나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것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성으로 되돌아 왔다.(후략)
인조 14년 12월 15일 을유 1번째 기사
(전략) 김류와 성구(병조판서 이성구)가 여러 차례 강도로 어가를 옮길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인조 14년 12월 15일 을유 4번째 기사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중략) 김류 등이 아뢰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훈구(勳舊) 십여 명을 데리고 미복 차림으로 동문을 나가 곧장 충원(忠原)으로 향하거나 영남이나 호남으로 가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후략)
인조 14년 12월 17일 정해 2번째 기사
(전략) 김류가 대답하기를,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니, 좋은 계책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복(微服) 차림으로 나가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중략) 지금 만약 군사를 뽑아 습격을 한다면 비록 차질이 있을 듯하지만, 만약 한 면을 유인하여 죽이고 돌아갈 길을 연 다음 날랜 말을 타고 달려 나간다면 약간의 요행이라도 있을 수 있으니, 신이 포수를 보내어 야습하게 한다면, 이왕자(二王子)의 군영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공격이 아마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중략) 김류가 아뢰기를,
“적의 기세가 매우 왕성하고, 고립된 성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비록 굳게 지키려고 하더라도 마초(馬草)와 군량도 부족하니 어찌합니까? 옛날에 송(宋)나라의 고종(高宗)은 단기(單騎)로 적지(敵地)에서 도망쳐 나와서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지금의 상황도 이러한 방법 이외에는 달리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장사를 뽑아서 좌우에서 호위하면서 날랜 말로 달려 나간다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한데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후략)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12월 17일(정해) 맑음

인조 14년 12월 29일에는 남한산성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치고는 청군에 싸움을 걸었다. 적이 응전하지 않자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리다 후퇴했는데, 그때 역으로 기습을 당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했다.
수성전에서 적을 공격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술은, 야습과 같은 빈틈을 노린 기습이다. 적을 도발하여 바깥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공성하는 쪽이 행하는 전술이다. 또한 청군은 기병이 주력이며, 기병은 평원에서의 전투에 강하다. 그런데 김류는 대낮에 평지로 병력을 이동시켜서는, 당당하게 적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야말로 범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격이다. 일부러 져주려던 건가 의심까지 든다. 오죽하면 인조조차도 “기병을 상대로 왜 평지로 내려갔느냐.”고 지적하며 넌지시 김류를 꾸짖었을 정도였다.
재미있는 건, 이때 조선군은 성 밖으로 나섰지만, 김류는 성 위에서 지켜보며 명령만 내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투를 지휘하는 사람이, 부하 장병들만 사지로 몰아넣고, 자기는 안전한 곳에서 혓바닥만 놀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휘관은, 사망할 경우 지휘 체계가 무너져 군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으니, 최전선보다는 후방에 자리하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다. 그러나 그냥 뒤로 빠진 것도 아니고 아예 성에서 나오지도 않은 것은, 원활한 지휘를 위한 조처가 아니라, 자기 몸 하나만 무사하면 된다는 보신책으로밖엔 볼 수 없다.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인조 14년 12월 29일 기해 3번째 기사
(전략)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지휘를 잘못하여 참패하였으니, 황공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보병과 기병의 형세는 현격하게 다른데, 경솔하게 평지에 내려갔으니 어떻게 패하지 않겠는가. 중원(中原)에는 평지에 내려갔을 경우 처벌하는 군율이 있는데, 이는 패몰하게 될까 염려해서이다."
(후략)
인조 14년 12월 30일 경자 2번째 기사

2.2.3.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면모

김류는 시류에 영합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심지어는 아무렇지 않게 종전과 상반된 입장으로 선회하기도 했다.
2.2.3.1. 인조반정 당시의 행보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인조반정을 살펴보자. 직접 나서서 거사를 계획해놓고는, 그 사실이 누설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집에 틀어박혀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심기원과 원두표의 설득으로 집을 나서자, 이번에는 도로 대장 행세를 하며 이괄에게 명령질을 했다. 하룻밤동안 반정의 우두머리에서 방구석폐인으로, 다시 킹메이커로, 입장이 시시각각 변했다. '반정공신이 되느냐 vs 역적으로 죽느냐' 하는 건곤일척의 상황임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추태가 아닐 수 없다. 김류가 유유부단하게 있는 동안 성미가 과격했던 이괄이 임시대장이 되어 군을 이끌고 궁을 점령하자 다시 반정군 대장 노릇을 하려다가 이괄과 크게 다투게 된다.
2.2.3.2. 이괄의 난 당시의 행보
이괄의 난 당시의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이괄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김류는 이괄을 옹호하며 고변을 부정했다.[37] 그러나 그 이괄이 정말로 반란을 일으키자, 입장을 급선회하여 고변에 언급된 사람들을 모조리 사형에 처했다. 처음부터 시종일관 이괄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던 이귀조차도 "일단 국문하여 사실부터 밝히자."고 반대했지만, 김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사실 이괄을 옹호한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국문에 참여한 추관들조차도 무고(誣告)가 의심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38][39] 또한 이괄이 병력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해오고 있던 상황이어서, 누가 역적이고 누가 누명을 쓴 사람인지 세심하게 판별할 여유도 없었다. 연루자들에 대한 이귀의 신중론이 무시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관련자를 전부 죽인다.'는 김류의 선택지 역시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김류는 "이들이 내응하여 이괄을 도와 서울에서 난리가 터지면 어쩔 것이냐."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억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이괄과 소통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도성에는 이괄의 공세를 막아낼 전력이 없어서 어차피 피신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역적 처형은 핑계였을 뿐, 김류는 단지 이괄을 두둔한 전적 때문에 자신도 역적으로 몰릴까 두려워 강경론을 펼친 것에 불과했다. 이는 반란을 진압한 후 이귀가 "억울하게 처형당한 사람들을 신리(申理)[40]해달라."는 차자를 올리자, 김류 또한 동의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기자헌(奇自獻)에게 사약을 내리고, (중략) 37인을 참(斬)하였다. (중략) 좌찬성 이귀(李貴)는 국문하여 사실을 밝힌 뒤에 논죄하여 죽이고 귀양보내려 하였으나, 판의금(判義禁) 김류(金瑬)는 ‘역적 이괄이 군사를 일으켰는데 안팎이 체결하여 헤아릴 수 없는 변란이 서울에서 일어난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그리고 대신·추관이 날마다 국청(鞫廳)에 나아가 참여하면 방어하는 방책을 어느 겨를에 규획(規劃)하겠는가. 곧 죽여 없애야 한다.’ 하였는데, 대개 신경진(申景禛)·심명세(沈命世) 등이 힘껏 권하고 문사랑(問事郞) 등 여러 사람도 대부분 도왔기 때문이다. 김류가 드디어 들어가 상에게 청하였는데 삼공(三公)도 이론이 없으므로, 상이 드디어 따른 것이다.
인조 2년 1월 25일 경진 5번째 기사
(전략) 김류가 아뢰기를,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38인이 일시에 형벌을 받은 원통함을 신리(伸理)하여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때 역적의 공초에 내응하기로 했다고 했는데 반역의 보고가 곧바로 이르렀으므로 인심이 황혹되어 그날 밤에 안에서 난이 일어나는 변이 있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리하여 신흠이 신 및 두세 훈신과 함께 서로 의논하여 청대(請對)해서 일시에 처단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어찌 옥석이 함께 탄 잘못이 없겠습니까. 만약 분명하게 분변할 수 있다면 인심이 반드시 통쾌하게 여길 것이니 이는 바로 좋은 일입니다."
(후략)
인조 3년 10월 18일 계사 1번째 기사
2.2.3.3. 병자호란 당시의 행보
조선은 병자호란 전에 미리 강화도로 피신할 수 있었다. 인조 14년 2월에는 윤방이, 같은 해 6월에는 최명길이, 강화도로 피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은 묵살되었고, 결국 그 해 12월 조선은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윤방과 최명길의 의견이 기각된 이유는, 당시 조정의 여론이 척화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변사도 척화파에 동조했다. 아니, 비변사야말로 척화파의 온상이었다. 인조 대에 이르러 그 기능이 강화된 비변사는 서인의 권력 기반이 되어 있었다. 비변사가 곧 서인이고, 서인이 곧 척화파였다. 척화파는 물러서지 말고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성들을 남겨두고 섬으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후금에 국서를 보낼 때는 ‘청’이라는 국호를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청’이라는 국호를 쓰는 것은 후금을 황제국으로 인정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대사간 윤황이 상소하기를,

"(중략) 아, 우리 나라는 사방이 수천 리로서 토지가 넓고 인민이 많기가 저 오랑캐에 비해 곱절이나 됩니다. 그런데도 단지 강도(江都)만을 보장의 지역으로 여겨 궁궐을 수축하고 창고를 채워 피란할 계획만 하고 있으니 임시만 편안하게 지내려는 계책은 제대로 세웠다고 하겠으나, 팔도의 백성들은 어찌하겠습니까. (중략) 신은 통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후략)
인조 14년 2월 10일 을유 1번째 기사
(전략) 윤방이 아뢰기를,

"오랑캐 사신이 성을 내고 갔으니, 우리 나라는 끝내 오랑캐의 침략을 당할 것입니다. 마땅히 방어할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 도성은 결코 지키지 못할 것이니 미리 강도에 들어가서 조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도승지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

"오늘날 강구할 것은 방어할 방법이지 피란에 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강도로 들어가는 일은 바로 두 번째의 일입니다."

하였다.
인조 14년 2월 29일 갑진 1번째 기사
완성군 최명길이 차자를 올려 강도(江都)에 이어하기를 청하자, 묘당[41]이 불가하다고 하여 일이 중지되고 시행되지 않았다.
인조 14년 6월 13일 병술 3번째 기사
금나라 한(汗)의 글에 답하여 만상(灣上)에 보내면서 격(檄)으로 칭했는데, (중략) 비국(비변사)이, 격서의 첫머리 말에 청국(淸國)이란 국호를 쓰지 말자고 청했는데, 그 뒤에 마침내 그들이 일컫는 바에 따라 청국이라고 써서 보냈다.
인조 14년 6월 17일 경인 2번째 기사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듣자오니, 국서의 외면에 ‘청국(淸國)’이란 두 글자를 쓰기로 정하였다는데 (중략) 지금 ‘청’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곧 그들이 건국하면서 참람하게 부른 명칭인데, 우리가 그들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는 좇고 하나는 좇지 않는 것이니 사리에 미안할 뿐만이 아닙니다. (후략)
인조 14년 11월 24일 갑자 1번째 기사

조정 신료들 가운데 주화론자는 이귀, 최명길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김류는 서인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척화를 주장했다. 그러다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돌연 주화론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김류에게 주화니 척화니 하는 신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나에게 이로운가.’였다. 그저 척화가 대세였기에 그에 순응했고, 승산이 희박한 전쟁을 책임지게 되자 주화파로 돌아섰던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청군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이동했지만, 그것은 청군의 진격속도가 너무 빨라서 선택한 궁여지책이고, 원래 계획은 강화도로 피신하는 것이었다. ‘강화도는 안전하다.’는 것이 당시 조선 조정의 인식이었기 때문이다.[42] 세자빈을 비롯한 왕족 일가와 공경대부의 가족들이 모두 강화도로 대피한 것도, 왕가의 신주를 모조리 그곳으로 옮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김경징 역시 그 안전한 강화도에 가 있었다. 그리고 김경징을 강도검찰사로 천거하여, 합법적으로 강화도로 대피시킨 것은, 바로 아버지인 김류였다.

병자호란의 패전 이후, 김류는 그 책임을 자신을 제외한 다른 척화파에게 돌렸다. 청이 척화파를 압송할 것을 요구하자, 그는 직접 청으로 보낼 사람을 지목했다. 뿐만 아니라, “척화파가 나라를 망쳤다.”면서, 척화를 주장한 사람들의 처벌을 주장했다. 하지만 청으로 끌려간 사람과 처벌받는 사람 중 김류의 이름은 없었다. 전쟁 이전까지 척화를 주장했던 그는 어느새 최명길과 더불어 주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김류가 비판을 받은 것은, 그가 주화를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다. 서인 정권의 잘못을 억울하게 뒤집어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정치적 스탠스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던 기회주의적 행보, 국가의 안위가 걸린 전쟁에서 단지 집안의 안위를 위해 인사권을 남용한 이기적인 행태,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었음에도 남에게 모든 잘못을 떠넘긴 몰염치함. 이 세 가지 잘못이야말로 김류가 비판받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주화고 척화고 다 떠나서 욕먹을 짓을 했기 때문에 욕을 먹은 것이다.
이홍주(李弘胄) 등을 보내 지난번의 국서를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도록 하였는데, 답서를 받아 가지고 돌아 왔다. 그 글에,

"(중략) 맹서를 어기도록 앞장 서서 모의한 그대의 신하에 대해 짐이 처음에는 모두 죽인 뒤에야 그만 두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대가 정말로 성에서 나와 귀순하려거든 먼저 앞장 서서 모의한 신하 2, 3명을 묶어 보내도록 하라. (후략)
인조 15년 1월 20일 경신 3번째 기사
김류·이성구(李聖求)·최명길이 입대하였다. (중략) 김류가 아뢰기를,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의 의논이 당시에는 정론이었다고 하더라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그르친 죄를 피할 길이 없으니, 그들이 나가기를 자청한다면 좋겠습니다. 홍익한(洪翼漢)은 현재 평양(平壤)에 있는데, 저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처치를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후략)
인조 15년 1월 22일 임술 3번째 기사
시강원 설서 유계(兪棨)가 상소하였다.

“(중략) 전하께서 꼭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모두 잡아 보내려 하실 경우, 대소 신료 중에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놔두시겠습니까? 신이 지난해에 경연에 입시하여 영의정 김류가 화친을 배척하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는데, 신사(信使)는 보낼 수 없으며 청나라에 글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김류 또한 화친을 배척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독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지금 만약 김류 등은 묘당(비변사)에 편히 있게 하고 단지 평일에 시행되지도 않은 헛말을 한 사류(士流)만 택하여 간사한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할 경우, 신은 신하를 대우하는 전하의 의리 역시 두텁고 얇은 차이가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략)”
인조 15년 1월 23일 계해 12번째 기사
(전략)
김류가 아뢰기를,

"오늘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붙잡아 보내야 할텐데, 사람들이 모두 엄호하면서 곧바로 지목하려 들지 않습니다. 저들이 이미 앞장서서 모의하여 맹세를 무너뜨린 자를 대상으로 삼았고 보면, 지난 봄에 논주(論奏)한 자와 그 뒤로 준론(峻論)한 자는 의당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수한 자 외에도 지난 봄에 그 일을 말한 사람이 한두 사람 뿐만이 아닐 뿐더러 그 경중(輕重)도 모르는 판인데, 또 어떻게 취사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그 당시의 삼사 및 오늘날 자수한 자를 아울러 잡아 보내면 저들이 반드시 숫자가 많은 것을 기뻐하리라 여겨집니다."
(후략)
인조 15년 1월 28일 무진 3번째 기사
영의정 김류(金瑬),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우의정 이성구(李聖求), 병조 판서 신경진(申景禛), 공조 판서 구굉(具宏),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 호조 판서 이경직(李景稷)이 회의하여 나라를 그르친 사람들의 죄를 경중(輕重)으로 나누어 서계(書啓)하기를, (후략)
인조 15년 2월 19일 기축 3번째 기사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중략) 지난해 가을·겨울 이전에는 김류가 화친을 배척하는 논의가 매우 준열하여 ‘청국이라 쓰지 말아야 하고 신사(信使)를 보내서는 안 된다.’고까지 말하다가, 전하께서 특별히 ‘적이 깊이 들어오면 체찰사는 그 죄를 면할 수 없으리라.’는 분부를 내리신 이후로 화친하는 의논에 붙어[43] 윤집(尹集)[44] 등을 묶어 보내고 윤황(尹煌)[45] 등의 죄를 논할 것을 김류가 실로 주장하였습니다. 자신이 장상(將相)을 도맡아 마침내 임금이 성을 나가게 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논열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당초 청인(淸人)이 동궁(東宮)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때에 김류가 곧 입대(入對)하여 따라가기를 바라더니, 동궁이 북으로 떠날 때에는 감히 늙고 병들었다고 핑계하였습니다. 동궁이 또한 이미 북으로 가고 나서는 김류가 감히 질자(質子) 김경징(金慶徵)이 ‘어미의 복을 입고 있다.’고 그 이름 아래에 적었는데, 이 때문에 구굉(具宏)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동궁의 작위(爵位)가 김경징에 못 미치는가. 중전의 초기(初朞)가 겨우 지났는데 김경징이 감히 어미의 상을 핑계하는가.’ 하니, 김류의 낯과 목이 붉어졌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어리석은 데에서 나왔겠습니까, 방자한 데에서 나왔겠습니까? (중략) 김경징이 검찰사(檢察使)가 된 것은 김류가 스스로 천거한 데에서 나왔는데, 대개 온 집안이 난리를 피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중략) ”

하였는데, 소(疏)가 올라가니 상이 끝내 금중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인조 15년 6월 21일 무오 1번째 기사

2.2.4. 비판론 정리

옹호론에서는 김류를 가리켜, ‘현실적인 감각을 갖춘 주화론자’, ‘당대 조선의 몇 안 되는 상식인’, ‘서인 정권의 폭주를 막는 데 실패하고 그들의 과오를 모조리 뒤집어 쓴 억울한 피해자’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부 틀린 주장이다. 그는 주화론자도 아니었고, 상식적이지도 않았으며, 서인 정권의 폭주를 막으려 분발한 사람도 아니었다. 김류에 대한 비판을 정적들이 만들어 씌운 누명, 야사에 의해 날조된 거짓, 척화파의 시각으로만 바라본 편견 등으로 간주하는 것 또한 잘못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에 관한 부정적인 기록을 모조리 반대파의 왜곡이라 치부하는 것이야말로 이분법적 구도에 매몰된 행위이다.

물론 김류가 정치적인 감각과 실무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소북의 영수 남이공을 대사헌으로 천거한 것은, 서인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조를 만족시키고, 청서의 공격을 분산시킬 방패막이를 들인다는 점에서 김류 본인의 정치적 실리까지 챙긴, 고단수의 인사였다. 같은 반정공신인 이귀가 죽는 순간까지 정승 자리에 오르지 못했던 것과 달리, 삼정승을 두루 거쳤던 것을 보면, 인조의 후광을 입었음을 감안해도 일처리 재주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정원군[46] 추숭과 강빈 사사에 반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인조의 말에 무조건 맞장구만 치는 예스맨도 아니었다. 어느 정도 강단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나쁘지 않은 능력과 본인에게 주어진 권력을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데만 악용했다는 점이다. 아들에 대한 과도한 편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 밀어주고 그것을 막는 이가 있으면 가차 없이 탄압하는 편당적인 태도. 국운이 걸린 중요한 사안에서 자신의 이득만을 따져 정치적 스탠스를 이리저리 바꾸던 기회주의적 행보. 김류가 국정을 주도한 것은 그의 가문과 당여들에겐 행운이지만, 조선에겐 불행이었다.

특히, 병자호란을 맞은 조선에게는 더욱 큰 불행이었다. 전쟁 전에 미리 강화도로 피신할 기회가 있었을 때는 무시하더니, 남한산성에 틀어박힌 후에야 생뚱맞게 강화도 타령을 늘어놓았다. 경솔하게 병력을 움직여 장병들의 목을 청군에게 갖다 바쳤다. 인사권을 남용해 아들 김경징을 당시로선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겨지던 강화도로 보냈다. 청나라에서 척화파들을 보낼 것을 요구하자, 자신이 언제 척화를 주장했냐는 듯이 입을 다물고 다른 사람들을 떠밀더니, 나아가 나라를 망친 척화파들을 처벌하자며 날뛰었다. 그는 나라의 안위보다 본인과 집안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인물이었고,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파렴치한 위인이었다. 김류는 전화에 휩싸인 조선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아니, 없느니만 못했다.

결국 요약하면 김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벼락출세한 소인배. 잡무나 처리하는 하급관리 정도가 그의 그릇에 딱 맞는 수준이었다. 권력만 누리고 책임은 회피하는 모습이나 가족과 일당을 우선시하는 편파적인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듯, 결코 국가 대계를 논하는 자리에 올라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1] 애초에, 서인끼리도 서로를 정적으로 생각하며 죽이기 일쑤였고, 김류 본인도 영의정에 올랐던 시절조차도 권한이 절대적이기는커녕 같은 서인들한테 욕이나 처먹고 목숨의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인조한테 맞서거나 파직을 당한 경력까지, 의외의 모습도 많은 편이다. 김류가 옹졸하고 악한 짓을 한 것도 맞지만 일부의 대중이 인식하는 '음모의 대가' 캐릭터와는 전혀 다르다. [2] 대표적으로 소북계 실무관료들을 서인정권에 대거 입각시켰다. 남이공,김신국과 같은 소북 출신 인사들은 김류의 보호 아래 인조 시기에도 관직을 보전할 수 있었다. [3] 인조, 효종 [4] 의외의 사실이지만, 김류는 신중론자였기에 인조와 함께 이괄을 준비없이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이괄을 더욱 강경하게 몰아붙인 사람은 이괄을 스카우트하고 칭찬까지 했던 이귀였다. [5] 그럼 김류 자신도 호위 병력을 버리고 평생을 동안 충심을 바친 왕이랑 같이 자살이라도 하려고 남한 산성에 틀어박혔다는 뜻이 된다. 척 봐도 말이 안 되는 소리. 물론, 이 사람의 잡다한 실수와 오판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6] 실제로 김류의 탓으로 욕먹는 사건들의 전말을 알아보면, 오히려 김류는 반대파에 섰는데 다른 서인들이 김류를 죽일듯이 닥달하고 쫓아내서 김류의 의견이 묵살되어버렸기에 사건을 예방하지 못한 예시가 많다. [7] 애초에, 서인들도 많은 생각을 지닌 여러 무리의 집합이었다. 광해군 = 천사, 인조 = 악마, 서인들 = 악마의 무리 정도로만 정리하는 유치하고 단편적인 역사관 안에서는 당대의 현실을 이해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8] 최명길은 이귀에 대해서도 큰 의논을 내기는 좋아하나 구체적인 내용이 엉성하다고 했다 [9] 최명길의 인물평에 대해, 사관은 "지가 얼마나 잘났다고 사람들을 함부로 품평하는가."라는 식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후일을 알고 있는 현대인 입장에선 이렇게나 완벽한 평가도 없을 것이다. [10] 사헌부의 수장, 정2품의 고위 정승급 자리 [11] 나만갑은 김경징보다 3살 어리다. 김류 입장에선 아들뻘 되는 인물이었다. [12] 폐모론에 간접적으로 반대하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13] 김류가 이조판서였을 당시 전랑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김류가 이조판서였던 때는 인조 5년이고, 인조 7년에는 김상용이 이조판서였다. 인조 5년 당시, 정묘호란이 발발했고 김세렴은 무군사(撫軍司) 종사관으로 종군했는데, 전쟁 때문에 전랑 추천 명단에 오르기만 하고 인사는 시행되지 않았던 듯하다. [14] 김세렴은 정묘호란(1627) 당시 조모가 세상을 떠나자, 강릉에서 상복을 입었다. 그런데 그가 거처했던 곳이 경치가 매우 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상(喪)을 핑계로 관광을 즐겼다는 의혹을 받은 듯하다. [15] 中途付處. 거주지와 가까운 곳으로 유배 보내 그곳 수령의 처치에 맡겨 살게 하는 형벌이다. [16] 門外黜送. 관직과 관품을 모두 추탈(推奪)하고, 도성 밖으로 추방하여, 도성 안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17] 이조판서 김상용을 말한다. [18] 전상(銓相)은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통칭하는 말이다. 문맥을 따지면, “이조판서 김상용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의미가 된다. [19] 『논어』 강서를 친다고 가정하자. 만약 응시자가 첫 번째 통에서 「학이편」을 뽑고, 두 번째 통에서 12번을 뽑았다면, 시관은 강지에 『논어』 「학이편」 12번째 대문이라 기록하고, 응시자의 고강을 들은 후 성적을 평가한다. [20] 신유년 별시 급제자 중 류씨는 병과 4위 류두립(柳斗立), 병과 7위 류정립(柳正立), 병과 10위 류중립(柳中立), 병과 35위 류익립(柳益立) 4명뿐이다. 이중 류정립과 류익립이 류희분의 아들로, 류익립이 형이고 류정립이 동생이다. 류두립은 아버지가 류희량(柳希亮)이고, 류희량은 류희분의 동생이다. 그리고 류중립은 아버지가 류희발(柳希發)인데, 류희발은 류희분의 동생이고 류희량의 형이다. 신유년 알성시 급제자 중 류씨는 을과 1위 류명립(柳命立) 한 명뿐이다. 류명립은 류희분의 아들로, 류정립과 류익립의 동생이다. 따라서 오류(五柳)란, 류두립, 류정립, 류중립, 류익립, 류명립, 이들 다섯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1] 신유년 별시의 병과 36위 박취장(朴就章)은 박홍구(朴弘耉)의 삼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박홍구의 아들은 박취장으로 보인다. [22] 參榜. 과거에 급제하여 방목(榜目, 문과 급제자의 명부)에 이름이 오름. [23] 남이 지은 글을 자신의 답안지에 적어 자기 글인 것처럼 써내는 행위. [24] 판서 직만 면직되었고, 겸직하고 있던 다른 직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25] 즉, 요즘식으로 속되게 말하면 김류는 사석도 아닌 곳에서 대놓고 아몰랑 건방져서 그래라고 지껄인 것이다. [26] 남들을 모함할 땐 그렇게 열성이더니 막상 본인이 남들 다 아는 사실로 문책을 받으니 이에 반박도 못하고 그저 [27] 나만갑 등이 외직으로 좌천된 것이, 김류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28] 위에서도 말했지만, 김세렴은 김류가 아끼던 인물이었다. 김류는 이렇듯 자신이 아끼는 사람은 추천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모함하는 편파적인 인물이었다. [29] 위에서 언급했던, 김세렴이 전랑 추천자 명단에서 삭제된 사건이다. [30] 나만갑의 좌천이 김류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다. [31] 내용 자체는 최명길의 만언차를 비판하고 있으나, 나만갑, 장유, 박정 등의 좌천이 과도한 처벌이며 김류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임은 인정하고 있다. [32]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나만갑에 대한 김류의 탄압이 병적인 수준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33] 위에서 언급된, 김세렴이 전랑 추천자 명단에서 삭제된 사건에 관한 내막이다. [34] 追崇.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왕족에게 왕의 칭호를 주는 것. [35] 모친상을 당했을 때 수사(水使) 기종헌에게 돈을 주고 전선(戰船)을 산 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모함을 받은 것이라는 말도 있다.) 1639년에 사유(赦宥 죄를 용서받음.)를 입어 풀려났으며 1642년에 세상을 떠났다. 인조 15년 11월 4일 무진 2번째 기사 인조 20년 12월 11일 병자 3번째 기사 [36] 실록에는, 거사가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어차피 망한 거, 나 잡으러 올 놈이라도 죽인다.’는 비장한 생각을 품고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심지원과 원두표가 찾아오고 밖으로 나섰다는 기록이나 병자호란 당시의 무능한 모습을 합쳐 생각해볼 때, 그저 혼란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7] 실록에 김류가 직접적으로 어떤 발언을 했다는 식의 기록은 없다. 다만 "반란 고변이 있을 적에, 김류는 이괄을 두둔했다."는 양사의 간언이 있어, 이를 통해 당시 김류가 이괄을 옹호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38] 고변자 중 한 명인 문회는 이후에 또 역모를 고변했는데, 공을 얻기 위해 무고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절도에 정배되었다. 공신이 되기 위해 고변을 남발하던 인물이었다. 또한 고변에서 역도로 거론된 인물 중에는, 이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분투했던 정충신도 있었다. 고변에 연루된 이들을 몇날며칠에 걸쳐 국문했지만, 억울하다는 말만 무성했으며 오히려 도중에 고문을 이기지 못해 죽거나 혹은 자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 상황이 이러니, 추관들은 무고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고, 역으로 '고변자들을 처형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이귀의 반대로 고변자들은 죽음을 면했지만,( ... 그때 추관이 무고라고 여겨서 고변한 자 한흔을 죽이고, 또 문회와 이우 등을 아울러 죽여서 옥사를 뒤집을 계획을 하려고 했다. 공(이귀)이 ‘옥사를 다스리는 초기에 고변한 자를 먼저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탑전에서 힘껏 아뢰어 죽이지를 못했다. ...) 감옥에 갇히는 신세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괄이 정말로 반란을 일으킨 연후에야 석방되었다. [39]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 역시, 고변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자기가 죽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 이괄의 아들 이전을 잡아들이려 했고, 그 이유는 당연히 역모에 대한 조사였다. 이괄로서는 신변의 위험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들이 역적인데, 그 아비가 무사할 리 없지 않은가. [40] 억울한 사람을 위해 변명해주다. [41] 비변사를 말한다. 비변사의 다른 호칭으로는 묘당, 비국 등이 있다. [42] 실제로도 맞는 말이었다. 남한산성은 식량이 저장된 창고가 성 바깥에 있어서, 포위되면 장기전이 힘들고 외부와의 연락이 단절된다는 단점이 있었다.(실제로 병자호란 때 그렇게 낭패를 보았다.) 하지만 강화도는 평야를 끼고 있고, 물길을 통해 다른 지역과 연락이 가능했다. 강화도로 이동하자는 김류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청군이 코앞에까지 들이닥쳤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43] 인조 14년 8월 20일 신묘 2번째 기사이다. 기록 최하단에 인조가 “청군이 깊이 들어오면 체찰사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 체찰사는 김류였다. 인조 11년 2월 12일 갑술 5번째 기사 인조 14년 3월 20일 을축 2번째 기사 인조 14년 5월 26일 기사 1번째 기사 [44] 오달제, 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강화 조건으로 척화파들을 보낼 것을 요구하자, 이들 셋은 “최명길이 주화를 주장할 때, 그를 비판한 것은 바로 자기들이었다.”며 자진해서 청으로 압송됐다. [45] 척화를 주장하던 강경파 중 한 명이다. [46] 인조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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