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89년 11월 28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서후면 대석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교리 한석골마을 392번지) |
|
사망 | 1969년 10월 21일 (향년 79세) |
경상북도 안동군 | |
본관 | 신 안동 김씨[1] |
자 | 성진(聲振) |
호 | 송강(松岡)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827호 |
상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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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89년 11월 28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서후면 대석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교리 한석골마을 392번지)에서 아버지 김제동(金濟東, 1873.10.25. ~ 1910.2.6.)과 어머니 구 안동 김씨(1869 ~ 1927.8.14.)[2]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20년 음력 5월, 흠치교에 가입한 뒤 고문 아래 12인조에 소속되었고, 이후 신도 및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노력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1921년 6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의 공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3] 형무소로 이감되었다.[4] 이에 공소를 제기하여 1921년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2부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5] 이후 상고까지 제기하였으나, 1922년 2월 27일 상고심에서 결국 상고가 기각되면서[6]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고, 1969년 10월 21일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사망했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본래 안동시 서후면 명리에 안장되었으나 2008년 5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첨사공파(僉使公派) 29세 현(顯) 항렬. 족보에 기록된 일명은 김옥현(金玉顯).
[2]
김영준(金榮俊)의 딸이다.
[3]
1921년 6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판결문
[4]
1921년 6월 22일 집행원부
[5]
1921년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2부 판결문
[6]
1922년 2월 27일 형사사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