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길채근(吉采根) |
이명 | 길육도(吉六道), 길운도(吉云道) |
본관 | 해평 길씨[1] |
출생 | 1911년 1월 2일[2] |
전라남도
장흥군 부동면 건산리 (현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439번지)[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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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0년 8월 29일[4] |
전라남도 장흥군 | |
묘소 | 광주광역시 남구 효덕동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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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5선 국회의원을 지낸 길전식은 그의 4촌 동생이고[5], 독립유공자 길양수와 길덕동은 모두 그의 6촌 재종제(再從弟)이다.[6]
2. 생애
1911년 1월 2일 전라남도 장흥군 부동면 건산리(현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439번지)에서 아버지 길두섭(吉斗燮, 1884. 7. 12 ~ 1954. 10. 6)[7]과 어머니 영월 엄씨(1884. 7. 5 ~ 1957. 9. 26)[8] 사이의 7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건산리 119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옮겼고, 이어 장흥면 동동리 207번지[9]로 이주했다.그는 1933년 12월 정진수(丁瑨壽)·유재성(劉載星)· 김두환 등의 동지들과 함께 장흥농민조합(長興農民組合)의 결성을 추진했다. 이후 1934년 1월 27일 장흥군 장흥면을 책임지역으로 담당하여 농민들에게 야학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동지를 규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1935년 12월 21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예심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으나, 모종의 이유로 공판에 회부되었다. 1936년 1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의 1심에서는 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검사 측에서 공소를 제기하여 그해 3월 2일 열린 2심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법정투쟁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곧 검사 측에서 공소를 제기하여 결국 1937년 7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징역 1년 6개월형(원심 미결 구류일수 중 365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결국 옥고를 치렀다.
1938년 1월 19일 출옥한 후에는 장흥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0년 8월 29일에 별세했다. 사후 그의 유해는 광주광역시 남구 효덕동에 안장되었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
영암·장흥파 22세 주(柱) 근(根) 항렬.
[2]
해평길씨족보 1권 312쪽에는 1월 20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3]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中山里(중산리)'가 본적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장흥군 장흥읍에는 中山里(중산리)가 없고 다만 巾山里(건산리)가 있다. 巾을 中으로 잘못 판독한 것이 아닌가 싶다.
[4]
해평길씨족보 1권 312쪽에는 8월 24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5]
길인주의 아버지 길두섭(吉斗燮, 족보명 길영섭吉永燮, 1884. 7. 12 ~ 1954. 10. 6)은
길전식의 아버지 길두상(吉斗翔, 족보명 길영상吉永翔, 1890. 9. 22 ~ 1931. 2. 23)의 맏형이다.
[6]
길양수와
길덕동의 조부 길성진(吉聖鎭, 초명 길성돈吉聖敦, 1857. 10. 30 ~ 1916. 9. 22)은 길인주와
길전식의 조부 길봉진(吉琫鎭, 초명 길봉택吉琫宅, 1865. 7. 8 ~ 1923. 4. 26)의 셋째 형이다.
[7]
족보명은 길영섭(吉永燮).
[8]
엄연교(嚴衍敎)의 딸이다.
[9]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5년 당시에도 이 지번은 길인주의 아버지 길두섭의 소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