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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메레티 왕국 3대 군주 გიორგი | 기오르기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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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기오르기 2세 |
조지아어 | გიორგი | |
라틴어 | George II | |
가족 |
바그라트 3세(아버지) 엘레니(어머니) 콘스탄틴(동생) 테이무라즈(동생) 바크탕(동생) 타마르(누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첫째 아내) 루수단 셰르바시제(둘째 아내) 타마르 디아사미제(셋째 아내) 알렉산드레(장남) 바그라트(차남) 레반(삼남) 로스톰(사남) 마미아(오남) 알렉산드레(육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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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미상 ~ 1585년 | |
재위 기간 | 1565년 ~ 158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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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이메레티 왕국 3대 군주.2. 생애
2차 이메레티 왕국 2대 군주 바그라트 3세와 조지아 귀족 여인 엘레니의 장남이다. 동생으로 콘스탄틴, 테이무라즈, 바크탕이 있었고 누이로 타마르가 있었다. 1563년 이전에 첫번째 결혼을 했으나 결혼 상대의 성명과 출신은 알려진 바 없으며, 1563년경 압하지야 공국의 공주 루수단 셰르바시제와 결혼했다. 1565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이메레티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그가 즉위할 당시 이메레티 왕국의 사정은 지극히 불안정했다. 과거 바그라트 3세의 초대를 받고 갔다가 체포되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밍그렐리아 공국의 레온 1세는 이메레티에 원한을 품고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된 뒤 오스만군이 이메레티를 침략하는 걸 도왔다. 반면 구리아의 기오르기 2세는 여전히 이메레티 왕국을 따랐다. 양자간의 갈등이 점차 깊어지다가 1566년 구리아의 기오르기 2세와 밍그렐리아의 레온 1세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양측은 곧 화해했고, 구리아의 기오르기 2세는 레온 1세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구리아 공작은 얼마 안가 아내와 이혼했고, 양국의 감정은 악화되었다.
1568년 레온 1세는 구리아의 기오르기 2세를 폐위하고 사촌인 호스로프를 왕으로 세우려고 침공했지만, 1568년 이아네티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후 이메레티 왕 기오르기 2세와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2세가 밍그렐리아로 쳐들어갔고, 레온 1세는 이스탄불로 망명했다. 오스만 술탄 셀림 2세는 레온을 지원해주기로 결의하고 1568년 에르주룸과 트라페준타에서 차출한 9척의 오스만 군함과 수천 군인을 레온에게 맡겨 구리아로 상륙하게 했다.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2세는 오스만 군에 굴복하고 레온과 함께 밍그렐리아에서 이메레티 왕국군을 축출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이아네티 전투 때 레온 1세를 도왔던 공작 자바흐 칠라제를 연회장에 초대한 뒤 암살했다. 이에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2세와 밍그렐리아 공작 레온 1세가 이메레티 왕국으로 쳐들어가 왕실군을 격파하고 칠라제 가문의 영토를 공유했다.
1572년, 레온 1세가 사냥 도중 사고로 사망하고 기오르기 3세 다디아니가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동생 마미아가 자신에게도 영지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내전의 기미가 감돌았다. 그는 이 기회에 밍그렐리아 공국을 약화시키기로 마음먹고, 기오르기 3세에게 동생 마미아가 칠라제의 영지를 받게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자기 아들 바그라트를 기오르기 3세의 누이와 결혼시켰다. 이에 이메레티와 밍그렐리아가 동맹을 맺고 자신을 칠 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2세는 마미아를 지원하여 밍그렐리아를 공격하기로 했다. 1573년, 구리아 공작은 밍그렐리아를 전격 침공해 밍그렐리아 수도 주그디디를 점령하고 기오르기 3세를 압햐지야로 내쫓은 뒤 마미아를 밍그렐리아 공작에 앉혔다.
그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칠라제 영역의 몫이 밍그렐리아 공국의 소유로 돌아가는 걸 허용했다. 1578년 압하지야로 피신한 기오르기 3세는 이메레티 왕의 시누이인 타마르 체르바키제와 결혼하여 아자라의 호파 항구를 이메레티 왕국에 제공했다. 이후 왕은 마미아를 밍그렐리아 공작위에서 축출하고 기오르기 3세를 그 자리에 앉혔다. 한편 이 시기에 바그라트 왕자가 사망하면서 미망인이 된 기오르기 3세의 누이는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2세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구리아 공국, 밍그렐리아 공국, 그리고 이메레티 왕국은 3자 결혼 동맹으로 연결되었다.
1580년경, 밍그렐리아 공작 기오르기 2세의 삼촌이자 사드자바코 백작인 바툴리아 다디아니가 공작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공작을 도와 반란을 토벌하고 바툴리아를 오조르게티에 가두었다. 그러나 바툴리아를 처형하라는 왕명을 밍그렐리아 공작이 거부하자, 그는 요원을 보내 바툴리아를 암살했다. 이에 분노한 밍그렐리아 공작은 이메레티 왕국을 적대했다. 이렇듯 이메레티 왕국 내부 상황이 혼란스럽자, 투르크 상인들은 이 때를 틈타 이메레티 왕국으로 꾸준히 침입해 주민들을 잡아들여서 노예로 팔았다. 선왕 바그라트 3세는 조지아 주민이 노예로 팔리는 걸 엄격히 금지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사문화되어 버렸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캅카스 일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1578년 9월 1일,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트빌리시를 파괴하고 카르틀리 왕국의 다비트 11세를 폐위한 뒤 이메레티 왕국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이에 맞서 이메레티와 카르틀리 사이의 경계선에 위치한 리키 산맥에 군대를 매복시키고 오스만군이 산길을 따라 진입할 때 기습 공격해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이때 오스만군에 종군하고 있던 많은 조지아 귀족들이 이메레티군에 살해당했다. 그는 투르크군으로부터 탈취한 수많은 보물과 함께 쿠타이시로 돌아가승리를 자축했다. 그해 11월 1일 무스타파 파샤가 재차 공세를 가하자, 그는 리키 산맥에서 또다시 격파했다. 오스만군은 연이은 패배에 큰 충격을 받고 이메레티 공국 공략 계획을 취소했다.
1581년, 술탄 무라트 3세는 무스타파 파샤를 코카 시난 파샤로 교체했다. 시난 파샤는 삼츠헤의 군주이자 오스만 제국의 봉신인 마누차르 2세의 중재하에 그와 협상했다. 시난 파샤로부터 카르틀리 왕권을 넘겨줄 테니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라는 권유를 받은 그는 이에 혹해 받아들였다. 그는 밍그렐리아 및 구리아 동맹군을 이끌고 카르틀리 북부를 침공했고, 시난 파샤는 카르틀리의 시몬 1세와 직접 대결하기로 했다. 작전은 성공했고, 이메레티와 오스만 연합군은 트빌리시에 입성했다. 시난 파샤는 그의 아들인 마미아를 '유수프 벡'이라는 이름으로 티빌리스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자 이메레티 왕국의 봉신을 자처하게 했다. 그러나 1582년 시몬 1세가 사파비 제국의 지원하에 반격을 가해 이메레티, 밍그렐리아, 구리아, 삼츠헤, 오스만 연합군을 무크란 전투에서 격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카르틀리 왕국의 독립을 보장해야 했다.
1582년, 밍그렐리아 공작 기오르기 3세 다디아니가 사망하고 형제 마미아 다디아니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마미아는 구리아의 기오르기 2세를 공격해 이스탄불로 망명하게 만든 후 기오르기 2세의 형제 또는 아들인 바크탕을 구리아의 군주이자 밍그렐리아의 가신으로 삼았다. 그는 밍그렐리아가 강성해지는 걸 걱정했지만, 딱히 막을 방도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생전에 세 번 결혼했다. 이름과 출신이 알려지지 않은 첫번째 아내 사이에서 알렉산드레 왕자를 낳았고, 두번째 아내인 루수단 체르바치제와의 사이에서 바그라트 왕자와 레반을 낳았고, 세번째 아내인 타마르 디아사미제와의 사이에서 로스톰과 마미아, 알렉산드레를 낳았다. 장남 알렉산드레와 차남 바그라트가 그보다 먼저 죽었기에, 1583년경 레반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는 동생 콘스탄틴과 조카 로스톰이 왕위를 노릴 걸 우려해 그들을 유폐시켰다. 2년 후인 1585년 사망했고, 레반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우려는 불행히 들어맞았다. 콘스탄틴과 로스톰이 유폐지에서 탈출한 뒤 레반에게 반기를 들면서 이메레티 왕국은 혼란에 휩싸였고, 이 때를 틈타 밍그렐리아 세력이 부상하면서 왕국의 분열은 심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