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권중필(權重弼) |
자 | 선오(善五)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79년 2월 11일 |
충청도
충주목 소파면 갑산리 (현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2] |
|
사망 | 1938년 9월 17일 |
충청북도 음성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권재학은 1879년 2월 11일 충청도 충주목 소파면 갑산리(현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에서 아버지 권우섭(權祐燮)과 어머니 문화 류씨 류시원(柳時源)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19촌 지간의 족숙 권효섭(權孝燮)에 입양되었다.그는 1919년 4월 1일 소이면 중동리 한천마을 장날을 이용해 김을경(金乙卿)·이중곤(李重坤)·추성열(秋成烈)·이교필(李敎弼)·이용호(李龍浩)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소이면사무소로 달려가 당시 면장이던 민병식(閔秉植)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여 시위대열의 앞장에 서게 했다.
이후 시위를 전개하던 중 김을경과 이중곤이 경찰주재소로 체포되어 가자, 그는 격분하여 뒤쫓아가 주재소의 장지문을 발로 걷어차며 이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1919년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음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8년 9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권재학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2년 당초 음성군 소이면 중동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