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치바현에서 시행된 국민의용대 훈련 모습
1. 개요
1945년에 창설된 일본 제국의 준군사조직으로, 본토결전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1945년 3월 23일 "국민의용대 조직에 관한 건"으로 발족되었으며, 6월에는 대정익찬회, 대일본익찬장년단, 대일본부인회 등을 흡수해 통합했다.
1945년 6월 23일 의용병역법이 공포되면서 국민의용전투대(國民義勇戰鬪隊)로 편성되었는데, 의용병역의 부과대상은 남성은 15세에서 60세, 여성은 17세에서 40세였는데,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의용군을 징병하였다.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1945년 9월 2일에 해산되었다.
2. 실상
일본 제국의 본토결전 계획인 결호작전은 철저하게 카미카제와 결사항전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그마저도 준비가 여의치 않았다. 자살 특공 병기를 대량생산하는 것도 한계에 부딪쳐서 제대로 된 타격을 가할 만큼의 자살 병기를 배치조차 못했으며, 징병제를 강화하여 병력을 확보하였으나 결호작전에서 요구하는 500만의 병력도 서류상으로나 확보했지 실제로는 100만 명 내외에 불과했다.그래서 동원된 것이 바로 본 문서에서 설명하는 일본판 국민돌격대인 국민의용대다. 상술한 것처럼 징병제를 강화함과 동시에 의용병역법을 공포하여 국민의용대라는 이름으로 2800만 명의 민간인을 전장에 내보내려 한 것이다. 이것이 보통 이른바 1억 옥쇄라고 부르는 계획으로, 일본 본토의 전 국민과 식민지인들을 모두 전장에 내보내 산화 시키겠다는 미친 계획이었다.
그 총알받이들에게 쥐어줄 무기라는 것들도 학교 책걸상을 잘라서 쇠파이프를 박아 만든 조총과 깡통에 화약이랑 쇳조각 넣고 도화선 심은 깡통폭탄에 조잡한 투석기와 활과 화살인 데다 그 급조 무기들조차 부족해서 상륙한 미군한테 칼 들고 덤비라고 미귀필살검 - 키리코미 도법(米鬼必殺剣-斬込刀法)이라는 간편하게 배워 당장 쓸 수 있게 일본도 기술 1개, 착검하지 않은 총검이나 부엌칼로 가능한 기술 1개, 접근법 1개로 구성된 국민의용대용 간단 검술[1]까지 발표되고, 여기에 쓸 날붙이조차 부족해서 죽창을 깎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마저도 일본에는 죽창으로 사용할 대나무조차 모자랐다.
이렇듯 소총 등 개인화기나 군복 등 피복류마저 턱없이 부족했다. 러일전쟁 시기에조차 구식화되어서 후방부대용으로 돌려졌던 무라타 소총도 부족해서 위에처럼 책걸상 잘라서 개머리판 만들고 쇠파이프를 총신으로 쓰는 화승총이 지급되던 판국이었다.
나치 독일에서 국민돌격대에게 지급할 목적으로 국민돌격대 소총과 국민권총이란 것들이 만들어졌듯이 일본 제국에서도 국민의용대에게 지급할 목적으로 국민의용대 소총이란 것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3. 관련 문서
[1]
사사모리 준조(笹森順造)라는 민간인 검도사범이 창안한 도법으로 장검과 단검도법으로 나뉘어 있었다. 장검도법은 비스듬히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두 차례 빠르게 벤 뒤 심장을 찌르는 3단계의 구조였으며, 단검은 상대에게 뛰어들어 껴안고 심장을 찌르는 다소 무식한 방식이었다. 또한 적에게 들키지 않고 구부려 앉아 접근하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