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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8년 2월 18일 |
평안북도 용천군 외하면 인봉동 | |
사망 | 2013년 4월 8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서훈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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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구익균은 1908년 2월 18일 평안북도 용천군 외하면 인봉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8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던 중 잡지 <신우(新友)>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다가 학생회를 조직하여 조선총독부의 교육을 노예교육으로 규정하고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서다가 일본 경찰에 구속되어 며칠간 고초를 겪었다. 이후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경성제국대학에 지원,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추천서에 ‘병(丙)’을 받는 바람에 낙방했다. 이에 상하이로 가기로 결심한 그는 상하이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무역업으로 삶을 영위하면서 1929년 안창호의 흥사단에 참여했다.구익균은 흥사단 가입 후 최용하(崔龍河)와 함께 원동대회(遠東大會)의 총무부원(總務部員)으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안창호의 비서로 활동했다. 1932년 4월에는 원동지부 강연부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3년에는 광동(廣東)의 중산(中山)대학에 근무하면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광동의 한국유학생 지도책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5년에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신의주로 압송된 그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항소했고, 1936년 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상하이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그는 8.15 광복 후 상하이에서 미국 비행기를 타고 충칭에 가서 김구 주석을 만난 뒤 그로부터 상하이 교민단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교민단을 재조직하고 인성학교를 재건했으며, 국내로 돌아가려는 동포들을 돕고 배를 준비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해 2,000여 명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1947년 7월 귀국 후 김구, 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촉진회를 운영했으며,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했지만 김구, 김규식 등이 평양으로 가서 통일 정부 수립을 놓고 논의할 때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따라가지 않았다.
1952년 진보당 창당에 관여해 비공식 재정위원을 맡았으며, 1960년 사회대중당 재정위원장을 맡았고 1961년에는 통일사회당 재정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후 '용공인사'로 낙인찍혀 체포된 뒤 유죄 판결을 받고 1년간 옥살이를 하다 최종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에 참여했으며, 1967년에 통일사회당 재건에 참여했다. 1968년에 고분자화학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며, 1980년엔 민주사회당 고문을 맡았다.
1982년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민간 그는 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1991년 코리아 영세중립화 통일 추진 본부 상이공동대표를 맡았으며, 1994년 회고록 '새역사의 여명에 서서'를 발간했다. 2005년 미국에서 영구 귀국한 그는 2006년 도산 안창호 혁명사상 연구원을 창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2013년 4월 8일 사망 후 국립대전현충원 이장이 논의되었지만 발인을 하루 앞두고 국가보훈처로부터 거부 통보를 받았다. 구익균이 과거에 조세법 위반과 사문조 위조로 집행유예를 받은 적이 있어 심의가 거부되었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 이에 유족은 국민권익위원회에 제소했고, 2013년 11월 29일 국민권익위원회 소속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구익균을 국립묘지 안장 비대상자로 결정한 국가보훈처의 처분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 이리하여 구익균은 2013년 12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