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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2106><colcolor=#FFF> 시칠리아 왕국 아우타빌라 왕조 제3대 국왕 구기에르무 2세 Gugghiermu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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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
구기에르무 2세 (Gugghiermu II) |
출생 |
1153년
12월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
사망 |
1189년
11월 11일 (35세)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
재위 | 시칠리아 왕국의 왕 |
1166년 5월 7일 ~ 1189년 11월 11일 | |
배우자 | 잉글랜드의 조앤 (1177년 결혼) |
아버지 | 구기에르무 1세 |
어머니 | 나바라의 마르가리타 |
형제 | 루제루 4세, 로베르토, 엔리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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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칠리아 왕국 3대 국왕. 이집트 원정과 발칸 원정을 단행했으나 실패했고, 자식을 얻지 못해 오트빌 왕조가 단절되고 내전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했다.2. 생애
1153년 12월경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 2대 국왕 굴리에모 1세와 나바라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의 딸 마르가리타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으로 루지에로, 로베르토가 있었고, 남동생으로 엔리코가 있었다. 두 형이 각각 1161년과 1160년에 사망한 뒤, 후계자로 지명되어 차기 통치자로서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 1166년 5월 7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을 때 13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섭정을 맡았다.마르그리트는 굴리에모 1세에 의해 지하감옥에 갇힌 정치범들을 사면하고 반란에 가담했다가 무거운 벌금을 부과받은 도시들을 용서해주는 등, 민심을 끌어모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국정 경험이 부족했기에 다양한 고문의 지원을 받았다. 초기에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고관은 대신 마테오 데 아젤로(Matteo d'Aiello), 시라쿠사의 주교 리카르도 팔머, 세례받은 아랍인 내시 베드로였다. 그들의 배후에는 국가를 장악하려는 다양한 파벌이 있었다. 여기에 마르그리트의 사촌인 길베르트 그라빈스키와 몰리셰 백작 리카르도가 팔레르모에 들어온 뒤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르그리트의 고문들은 곧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베드로는 음모의 희생양이 될 위기에 몰리자 시칠리아에서 도망쳤다. 아랍 문헌에 따르면, 그는 튀니지로 피신한 뒤 도로 무슬림이 되었고, 아흐메드 알 시켈리라는 이름으로 개명 후 기독교 국가에 맞서 무슬림 함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마르그리트는 베드로의 빈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1166년 9월 동방으로 가는 여정을 떠났다가 시칠리아에 무기한 머무르고 있던 자신의 사촌 스테판 뒤 페르슈를 1166년 11월에 수석 공증인에 임명했고, 1167년 여름에 팔레르모의 대주교를 겸임하게 했다.
이 인사는 각각 수석 공증인과 팔레르모 대주교가 되기를 희망했던 마테오 데 아젤로와 리카르도 팔머의 불만을 샀다. 여기에 페르슈가 수석 공증인이 된 뒤 프랑스 출신 측근들을 대거 기용하자, 이에 대한 반감이 궁정에서 커졌다. 얼마 후, 마르그리트의 형제인 몬테스카글리오소의 엔리코 등이 스테판 암살을 계획했다. 1167년 12월, 메시나에서 열린 왕실 회의에서, 엔리코는 타란토 공국의 상황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이때 그는 일부러 스테판을 자극하는 내용을 실어서, 스테판이 자극받아 언쟁을 벌일 때 공모자들을 시켜 몸싸움을 벌이는 척하며 죽이려 했다. 그러나 사전에 이 계획을 간파했던 스테판의 사주를 받은 길베르트 그라빈스키가 엔리코가 음모를 꾸미고 스테판을 암살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엔리코는 즉시 체포되었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공범들은 뜻밖에 포위되었다. 스테판은 마르그리트를 대신하여 모든 공모자에게 시칠리아를 떠난다면 용서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리하여 정적들을 모조리 몰아낸 스테판은 1168년 3월 마르그리트와 함께 팔레르모로 돌아온 뒤 엔리코와 몰리세 백작 리카르도를 지하 감옥에 가두었고, 마테오 데 아젤로 역시 체포했다. 이리하여 그는 절대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체포를 두려워한 인사들이 메시나에서 주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군은 칼라브리아의 레지오, 로메타, 타오르미나를 점령한 뒤 엔리코와 리카르도를 석방시키고 팔레르모로 행진했다. 여기에 마테오 데 아젤로도 감옥에서 탈출한 뒤 팔레르모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스테판과 프랑스 동료들은 팔레르모 대성당의 종탑에 포위되었고, 반군과 협상한 끝에 시칠리아를 영원히 떠나는 조건으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그들은 곧바로 배를 탄 뒤 다음날 시칠리아를 떠났다.
스테판이 추방된 후, 마테오 데 아젤로, 리카르도 팔머, 몰리셰 백작 리카르도 등은 정국을 장악하고 마르그리트를 권력에서 배제했다. 몬테스카글리오소의 엔리코는 나바라로 돌아갔고, 마르가리트의 사촌 길베르트 그라빈스키는 모든 가족과 함께 시칠리아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성년이 된 굴리에모는 이 대신들과 함께 국정을 다스렸다. 시칠리아는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 번영했으며, 군사적으로도 강력한 해군과 무슬림+노르만 혼성군을 갖춘 강국이었다. 그는 이러한 경제럭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벌였다.
굴리에모 2세는 이탈리아를 수중에 넣으려는 프리드리히 1세의 야망을 경계해 이에 대항하는 교황청과 롬바르드 연합에 재정을 지원했다. 그러면서 오랜 갈등을 벌였던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기 위해 마누일 1세에게 딸을 자신에게 시집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마누일 1세는 처음에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1169년경 자신의 딸 마리아 콤니니와 굴리에모의 약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지정된 날이 지나도 마리아가 오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은 이에 대해 어떠한 설명과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굴리에모는 방향을 바꿔 1177년 2월 13일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딸인 조안나와 결혼했다. 이후 1177년 프리드리히 1세가 베네치아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앞에서 회개하고 롬바르드 연합과 장기 휴전 협정을 체결했을 때, 살레르노 대주교,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 등 시칠리아 대표단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1171년 시리아의 통치자 누르 앗 딘 마흐무드와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를 공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사방에서 압박하자,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 1세가 서유럽 국가들에 도움을 요청했다. 굴리에모 2세는 요청에 응하기로 하고, 1174년 탕크레드 데 레치의 지휘 아래 200척의 함대를 파견했다. 그해 7월 말, 시칠리아 함대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탕크레드는 알렉산드리아 해안에 상륙한 뒤 공성전을 벌였지만,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공성 무기가 파괴되면서 난항을 겪었다. 여기에 아모리 1세가 이집트로 향하던 중 사망하고 젊은 왕 보두앵 4세의 후견인을 놓고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예루살렘 왕국군의 지원이 오지 않자, 탕크레드는 살라흐 앗 딘의 군대가 오기 전에 철수하기로 했다. 300명의 기사들이 본대가 시칠리아로 떠날 때까지 해안에 남아서 끝까지 싸우다가 살라흐 앗 딘에게 사로잡혔다.
1183년 9월 안드로니코스 1세가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를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한 이래, 동로마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굴리에모 2세는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이래 발칸 반도 제패를 숙원으로 삼던 오트빌 가문의 꿈을 이룰 기회라고 여겼다. 1184-1185년 겨울, 굴리에모 2세는 메시나에 육군과 함대를 집결시킨 뒤 함대 지휘권을 사촌 탕크레드에게, 육군 지휘권을 아케라 백작 리샤르와 보두앵에게 맡겼다. 원정 준비가 한창이던 1183년, 프리드리히 1세가 콘스탄차에서 롬바르드 연맹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굴리에모 2세는 동로마 제국을 향한 공세를 준비하는 상황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 갈등을 벌일 이유는 없다고 여기고, 프리드리히 1세와 협상한 끝에 프리드리히 1세의 장남 하인리히 6세와 루제루 2세의 딸이자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의 조카이며 굴리에모 2세의 고모인 쿠스탄차를 약혼시키기로 합의했다. 약혼식은 1184년 10월 29일에 거행되었다.
1185년 6월 11일, 메시나에서 출항한 시칠리아 함대는 그해 6월 24일 발칸 반도의 아드리아 해 인근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인 디라히온에 진입했다. 100여년 전 로베르 기스카르가 발칸 원정을 감행했을 때 디라히온에서 오랜 공성전을 치러야 했지만, 이번에는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 반감을 품은 수비대와 주민들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도 않고 항복하면서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그 후 시칠리아군은 적의 미약한 저항을 물리치며 동진한 끝에 8월 6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어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카를 육상에서 포위했고, 8월 15일 시칠리아 함대가 해상을 봉쇄했다.
당시 테살로니카엔 안드로니코스 1세의 친척이었던 다비드 콤니노스가 4개 부대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다비드는 성벽을 보수하고 병사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등 어떻게든 도시를 지키려 애썼지만, 안드로니코스 1세를 위해 싸울 마음이 없던 3개 부대가 8월 24일 항복해버리는 바람에 나머지 1개 부대만 챙기고 도주했다. 시칠리아군은 테살로니카에 입성한 뒤 1182년 4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벌어진 라틴인 학살에 보복하겠다며 테살로니카 시민 8,000여 명을 학살하고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테살로니카를 공략한 뒤, 시칠리아군은 3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테살로니카 수비를 맡았고, 한 부대는 세레스로 진군했으며,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한 부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한편, 테살로니카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한 안드로니코스 1세는 다비드 콤니노스를 투옥한 뒤 반격에 착수했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대군을 맡겼다가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눌 것을 우려해 아들 요안니스와 테오도로스, 장군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와 알렉시오스 브라나스, 그리고 환관 니키포로스에게 각각 한 부대씩 맡겨 시칠리아군을 저지하게 했다. 그러나 다섯 지휘관들 중 누가 우선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를 명확히 정하지 않았기에 지휘체계가 문란해졌고, 결국 동로마군은 연전연패했다.
시칠리아군이 파죽지세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하자, 안드로니코스 1세는 스테파노스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에게 적과 내통할 지도 모르는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히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가 명령에 따라 여러 인사를 잡아 처형하고 있을 때, 이사키오스 앙겔로스가 자신을 잡으러온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를 우발적으로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사키오스는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한 뒤 시민들에게 호소했고,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에 반감을 품고 있던 시민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황궁을 향해 진격했다. 대세를 읽은 수도 방위군과 근위대는 폭동 진압을 거부하고 안드로니코스 1세를 체포했다. 폐위당한 안드로니코스는 시내로 끌려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새 황제가 된 이사키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브라나스를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남은 병력을 지원군으로 편성해 합류시키면서 군대를 독려했다. 브라나스는 군대를 재정비한 뒤, 거듭된 승리에 자만하고 있던 시칠리아군을 요격하여 트라키아의 모시노폴리스에서 격파하고 마케도니아까지 추격했다. 시칠리아군은 암피폴리스로 물러난 뒤 브라나스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브라나스는 이를 무시하고 재차 총공격을 가했다. 시칠리아군은 괴멸되어 상당수가 스트리온 강에 익사했고, 육군 지휘관 리샤르와 보두앵은 사로잡혔다. 해군 지휘관 탕크레드와 핀도스 산맥을 넘어 이피로스로 달아난 소수의 패잔병만이 이탈리아로 탈출했다.
발칸 원정이 재앙으로 끝난 뒤, 굴리에모는 1186년 하인리히 6세와 쿠스탄차의 정식 결혼식을 거행해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두텁게 한 뒤 동로마 제국을 향한 2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던 1187년 10월 2일, 예루살렘이 살라흐 앗 딘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 유럽에 전해졌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전 유럽의 군주들에게 십자군에 참여해달라고 호소했다. 굴리에모는 장인인 헨리 2세,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그리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서신을 보내 시칠리아에서 지원군과 보급품을 수급해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항로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굴리에모는 먼저 십자군을 파견하기로 하고, 브린디시의 마르가리트 제독의 지휘하에 60척의 함대를 시리아 해안으로 파견했다. 마르가리트는 1188~1189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해안을 지속적으로 정찰했고, 1188년 7월 트리폴리를 급습해 타격을 입혔으며, 라타키아, 마카브, 티레에서 아랍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이들의 활약은 십자군이 시리아 해안의 가장 중요한 항구와 요새를 손에 쥔 채 유럽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던 1189년 11월 18일, 굴리에모 2세는 팔레르모에서 사망했다. 그는 아내 조안나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죽기 직전에 굴리에모 2세의 고모이자 유일한 혈육인 쿠스탄차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마테오 데 아젤로 등 대다수 노르만 귀족들은 쿠스탄차와 결혼한 하인리히 6세가 이를 빌미 삼아 시칠리아 왕을 자처할 게 뻔하고,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시칠리아에 들어서면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게 뻔하다고 여겨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안드레아 백작 루지에로와 레체의 탕크레드를 놓고 고심한 끝에 1190년 1월 탕크레드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안드레아 백작 루지에로를 비롯한 왕국 내부의 반대 세력과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반발을 사면서, 시칠리아 왕국은 심각한 내우외환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