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곽익호(郭益浩) |
생몰 | 1890년 11월 18일 ~ 1944년 10월 10일 |
출생지 |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어수리 |
사망지 | 황해도 봉산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곽익호는 1890년 11월 18일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어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6월 6일 자신의 자택에서 한국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독립청년단 지회를 결성했다. 이 자리에는 종형제로서 이웃에 살던 곽선호를 비롯해 손재흥(孫再興), 김청풍(金淸風) 등 다수의 동지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독립청년단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1.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부할 것
2.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조선인 경찰관리와 밀정을 살해할 것
3. 한국인으로서 요구되는 독립운동 자금의 제공을 거부 또는 독립운동자를 관(官)에 밀고한 자는 살해할 것
4. 한국 내의 독립운동 상황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고할 것
5.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송부해온 독립운동 선동 인쇄물을 일반 한국인에게 배포하여 그 사상을 선전할 것
2.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조선인 경찰관리와 밀정을 살해할 것
3. 한국인으로서 요구되는 독립운동 자금의 제공을 거부 또는 독립운동자를 관(官)에 밀고한 자는 살해할 것
4. 한국 내의 독립운동 상황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고할 것
5.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송부해온 독립운동 선동 인쇄물을 일반 한국인에게 배포하여 그 사상을 선전할 것
독칩청년단 봉산지회 단장으로는 손재흥, 부단장엔 이정률, 총무에 김청풍, 김태용, 서기에 변인봉 김치은이 맡았으며, 교통원에는 곽선호, 곽익호, 권국빈이 맡았다. 이후 곽익호는 교통원으로서 손재홍으로부터 <독립신문>을 받아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이후 일제 당국의 검거가 시작되자 곽선호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려 했으나 1920년 11월 4일 사리원경찰서에게 체포되었고,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 검사분국으로 송치된 뒤 12월 28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예심을 받고 1921년 5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2년 7월 20일 형집행 만기로 석방되었으며, 1934년 칙령 제20호 제1조에 의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부터 복권되었다. 그후 봉산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4년 10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곽익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