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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17 11:35:39

고평 전투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1. 개요

오대십국시대 시기인 954년 후주의 2대 황제 시영이 고평(高平: 오늘날 산서성 고평현)에서 북한 - 요나라 연합군과 맞붙은 전투. 시영은 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 천하 통일 사업을 본격적으로 단행한다.

2. 배경

950년 3월, 후한의 검교 태사 겸 시중을 역임하던 곽위는 황제 유승우의 시기를 받아 암살 위협을 받자 반란을 일으켜 유승우를 죽였다. 이후 유빈을 일시적으로 황제로 세웠다가 951년 유빈을 폐위한 뒤 후주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이에 산서성 태원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유민[1]이 반발하여 북한을 건국하고 후주와 적대했다.

그러던 954년 2월 17일, 곽위가 숨을 거두었다. 그의 친족은 유승우에 의해 몰살되었기 때문에, 처조카인 시영이 뒤를 이었다. 유숭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해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후주를 칠 준비에 착수하면서, 사자를 파견해 요나라에게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요나라에서는 무정절도사 겸 정사령인 양곤을 파견하여 1만여 기병을 이끌고 진양으로 가게 했다. 유숭은 스스로 3만 군대를 일으켜 의성절도사 백종휘를 행군도부서로 삼고, 무녕절도사 장원휘를 전봉도지휘사로 삼아서 요군과 더불어 단백에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노주로 향했다.

북한군이 양후역에 주둔하자, 소의절도사 이균은 휘하 장수 목령균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2천을 거느리고 맞아 싸우게 한 뒤,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태평역에 성을 쌓았다. 장원휘는 목령균과 싸우다가 짐짓 패한 척하며 북쪽으로 후퇴했다. 목령균은 이를 추격했다가 복병을 만나 전사했고, 천여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균은 이 소식을 듣고 상당으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시영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무찌르려 했다. 이에 여러 신하가 반대했다.
"유숭은 평양에서부터 도망한 이래로 세력은 쭈그러들고 기운도 막혀서 반드시 감히 스스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새로 즉위하셨고 산릉을 만드는데도 날짜가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동요될 것이니, 의당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되며 장수에게 명령하여 이를 막게 해야 합니다."

시영이 답했다.
"유숭은 우리가 대상(大喪)을 만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짐이 나이가 어린데 새로 세워졌다고 가볍게 보면서 천하를 먹어치우려는 마음을 가졌다. 반드시 스스로 왔을 것이니, 짐이 가지 아니할 수 없다."

대신 풍도가 반대 의견을 계속 피력하자, 시영이 말했다.
"옛날에 당 태종은 천하를 평정하면서 일찍이 스스로 가지 않은 적이 없는데, 짐이 어지 구차스러운 편안함을 행하겠소?"

풍도가 말했다.
"폐하께서 능히 당 태종처럼 될 수 있는지 아직은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시영이 말했다.
"나의 병력이 강함을 가지고 유숭을 깨뜨리는 것은 마치 산으로 달걀을 누르는 것과 같을 뿐이오."

풍도가 말했다.
"폐하께서 산과 같이 될 수 있는지는 아직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시영은 기뻐하지 않았지만, 왕부가 가기를 권고하자 이를 따랐다. 3월 3일 천웅절도사 부언경에게 조서를 내려서 군사를 이끌고 자주의 고잔에서 북한군의 후방으로 나아가게 하고, 진녕절도사 곽숭으로 부사를 맡게 했으며, 하중절도사 왕언초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이끌고 진주의 동북쪽으로 나아가서 북한군을 맞이하게 하였고, 보의절도사 한통에게 그의 부사를 맡게 하였고, 마군도지휘사 겸 녕강절도사 번애능, 보군지휘사 겸 창회절도사 하휘, 의성절도사 백중찬, 정주방어서 시언초, 전 요주단련사 부언능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택주로 향하게 하고, 선휘사 향훈이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

3월 9일, 시영은 풍도에게 명령하여 재궁을 받들고 산릉으로 가게 하였고, 정인회를 동경유수로 삼았다. 3월 11일 대량을 출발하여 화주에 도착하여 북한군과 곧 맞붙으려 하였다. 이때 공학도지휘사 조조(趙晁)가 사사롭게 통사사인 정호겸에게 말했다.
"도적의 형세가 바야흐로 강성하니 의당 진중함을 유지하여서 그들을 좌절시켜야 할 것이오."

정호겸이 이 말을 시영에게 전하자, 시영이 화가 나서 말했다.
"네가 어찌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가? 반드시 다른 사람이 시킨 것이니, 그 사람을 말하면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정호겸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시영은 조조와 나란히 주옥에 가두었다. 이후 3월 18일 택주를 지나 주의 동북쪽에서 묵었다. 한편 유숭은 시영이 친정했다는 걸 알지 못하고 노주를 압박하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고평의 남쪽에 진을 쳤다. 3월 19일 선봉대가 북한군과 교전한 후 북한군이 물러나자, 시영은 그들이 달아날까 염려하여 군대를 재촉하여 급히 나아가게 하였다. 이리하여 고평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954년 3월 19일, 북한-요 연합군과 후주군이 고평에서 조우했다. 유숭은 중군을 파공원에 늘어놓았고, 장원휘는 그 동쪽에 진을 쳤으며, 요나라 장수 양곤은 서쪽에 진을 치니 자못 엄정하고 가지런했다. 이때 하양절도사 유사가 후군을 거느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후주군의 형세가 위태로웠지만, 시영은 담대한 태도를 잃지 않고 백중진에게 명령하여 시위마보 도우후 이중진과 더불어 좌군을 거느리고 서쪽에 있게 하고, 번애능과 하휘는 우군을 거느리고 동쪽에 있게 하고, 향훈과 사연초는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중앙에 있게 했으며, 전전도지휘사 장영덕은 금병을 거느리고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진지에 나아가 전투를 독려했다.

유숭은 주의 군사가 적은 걸 보고 요군을 부른 걸 후회하며 제장에게 말했다.
"우리가 스스로 한의 군사를 사용하여도 격파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거란이 필요하였는가? 오늘 주를 이길 뿐만 아니라 거란으로 하여금 마음으로 감복하게 할 것이다."

제장은 모두 그렇다고 여겼다. 이때 양곤이 말에 채찍질을 하여 앞으로 가서 주의 군사를 멀리 바라본 뒤 물러나 유숭에게 말했다.
"강한 적군입니다. 아직은 가볍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유숭은 수염을 떨치며 대답했다.
"이 기회를 잃을 수 없으니, 청컨대 공은 말하지 말고 내가 싸우는 걸 지켜보시오."

양곤은 불만을 품은 채 물러났다. 이때 동북쪽에서 바람이 심하게 불었는데, 잠깐 사이에 홀연히 남풍으로 바뀌었다. 북한의 부추밀사인 왕연사가 시천감인 이의로 하여금 유숭에게 말했다.
"지금 싸울 수 있습니다."

유숭이 이를 따랐다. 이에 추밀직학사인 왕득중이 말고삐를 붙잡고 간했다.
"이의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바람의 형세가 이러한데 어찌하여 우리를 돕는다고 합니까?"

그러나 유숭은 듣지 않았다.
"나의 계획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늙은 서생은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또 그러면 목을 베겠다."

이후 유숭이 동군을 지휘하여 먼저 나아가게 하니, 장원휘는 1천 기병을 거느리고 주의 우군을 공격했다. 이렇게 양군이 격돌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의 우군을 지휘하던 번애능과 하휘가 기병을 이끌고 먼저 달아나니 우군이 무너졌고, 보병 1천 명이 갑옷을 벗고 만세를 부르며 북한에 항복했다. 시영은 형세가 위태로운 것을 보고 스스로 친병을 거느리고 위험을 무릅쓰며 전투를 독려했다. 숙위장 조광윤은 이를 보고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주군이 위태롭기가 이와 같은데 우리가 어찌하여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장영덕에게 말했다.
"도적의 기세는 교만하니 힘껏 싸우면 격파할 수 있다. 공의 휘하에는 왼손으로 활을 쏠 수 있는 사람이 많으니 청컨대 군사를 이끌고 높은 곳으로 나아가서 좌익으로 나오시오. 나는 군사를 이끌고 우익이 되어 이들을 치겠소. 국가의 안위는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소."

장영덕이 이를 쫓았고, 각기 2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다. 조광윤은 몸소 사졸들보다 앞서서 말을 달려서 적군을 공격하니, 사졸들이 죽기로 싸워 한 사람이 백 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내전직인 마인우가 무리에게 말했다.
"승여로 하여금 적을 만나게 하였으니 우리를 무엇에 쓰겠소?"

그 직후 말 위에 뛰어 올라 활을 잡아당기며 크게 소리 지르면서 연이어 수십 명을 죽이니, 병사들의 기세가 더욱 진작되었다. 이에 전전우번행수 마전예가 시영에게 간언했다.
"도적들의 형세가 극도에 이르러서 장차 우리에게 붙잡힐 것이니, 폐하께서는 고삐를 잡고 움직이지 마시고 천천히 제장이 그들을 격파하는 것을 보십시오."

시영은 이에 따르기로 하고, 즉시 수백 기병을 이끌고 진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한편 유숭은 시영이 스스로 진지에서 나온 걸 알고 장원휘에게 포상하면서 재촉하여 정예병으로 하여금 나아가게 하였다. 장원휘는 앞으로 나아가 대략 진지를 정리하였는데, 갑자기 말이 고꾸라져서 주나라 병사에게 피살되었다. 장원휘는 북한의 날랜 장수였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버리니, 북한군의 기세는 완전히 꺾였다.

이때 남풍이 더욱 거세게 부니 주나라 병사들이 다투어 분발하였고, 북한군은 대패하였다. 유숭은 스스로 붉은 깃발을 들고 군사를 거두었으나 중지시킬 수 없었다. 한편, 요나라 장수 양곤은 주의 군대가 강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구원하지 못하였고, 또한 유숭이 했던 말을 한스럽게 생각해 군대를 온전히 하여 물러갔다.

한편, 전투 도중 도망친 번애능과 하휘는 수천 기병을 이끌고 남쪽으로 달아나며 화살을 활시위에 먹이고 칼을 칼집에서 꺼낸 채 치중을 노략질했다. 운반을 맡은 사람들은 놀라서 도망하여 실종되고 죽은 이가 많았다. 시영이 가까운 신하와 친한 군교를 파견하여 뒤쫓아 가서 그들에게 유시하며 머물게 하였으나, 조서를 받들려고 하지 않았고, 사자 가운데 군사들에게 살해된 이들도 있었다. 이때 후군을 이끌고 북상하던 유사가 번애능 등을 길에서 만났다. 번애능 등은 이미 패했으니 북상해봐야 소용없다며 말렸지만, 유사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갔다.

유숭은 가까스로 1만 명을 수습한 뒤 시내에 진을 쳤다. 초저녁에 유사의 후군이 도착하여 다시 여러 군대와 더불어 이들을 쳤다. 북한군은 또 패배하였고, 장수 왕연사가 전사했다. 후주군이 뒤쫓아서 고평에 이르니, 뉘인 시체가 산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버린 어물과 치중, 기계, 여러 가축이 헤아릴 수 없었다. 이리하여 고평 전투는 후주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4. 결과

전투가 끝난 뒤, 시영은 들판에 머물면서 갑옷을 벗고 만세를 외치며 적에게 항복했던 보병 1천 명을 모두 죽였다. 또한 북한에서 항복한 졸병 수천 명을 뽑아서 효순지휘를 만들고서 전 무승행군사마 당경사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거느려서 회수의 상류에서 수자리를 서게 하였고, 나머지 2천 명은 노자와 복장을 줘서 풀어줬다. 시영은 번애능 등을 주살하여 군정을 엄숙하게 하려 했지만, 아직 결정하지 못하다가 옆에서 시중 들던 장영덕에게 어찌 할 지 물었다.
"번애능 등은 평소에 아무런 큰 공로를 세우지 않았고, 부절과 부월을 더럽혔으며, 적을 멀리서 바라보자 먼저 도망하였으니 죽어도 그 책임을 다 틀어막지 못할 것입니다. 또 폐하께서 바야흐로 사해를 평정하려고 하시는데, 진실로 군법이 세워지지 않으면 비록 웅비같은 병사가 있고 1백만의 무리를 가지고 있을 지라도 어찌 이들을 써먹겠습니까?"

시영은 장영덕의 대답을 듣고 목침을 땅에 내던지면서 외쳤다.
"훌륭하오!"

그는 즉시 번애능, 하휘, 그리고 중급장교 이상의 사람 70여 명을 잡아들인 뒤 그들을 나무랐다.
"너희는 모두 여러 왕조를 거친 오래된 장수들이니 싸울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인데, 지금 멀리서 바람 부는 것을 바라보고 달아나 숨어버렸으니, 짐을 기이한 재물로 생각하여 팔아서 유숭에게 넘기려는 것이렷다!"

그리고는 모조리 참수형에 처했다. 이후 장수와 병졸들은 군법의 준엄함을 깨닫고, 감히 시영을 배신하지 않았다. 또한 시영은 이중진을 겸충무절도사로 삼고, 향훈을 겸의성절도사로 삼으며, 장영덕을 겸무신절도사로 삼고, 사언초를 겸진국절도사로 삼았다. 장영덕이 조광윤의 지혜와 용기를 대단히 칭송하자, 시영은 조광윤을 발탁하여 전전도우후로 삼아 영엄주지사로 삼고, 마인우를 공학인전직지휘사로 삼았으며, 마전예를 산원지휘사로 삼고, 나머지 장교들 가운데 승진시켜 관직을 내린 사람은 무릇 수십 명이었고, 사졸 가운데 행군하다가 군주와 상주로 발탁된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조조의 구속을 풀어줬다.

한편 유숭은 고평에서부터 갈의를 입고 두립을 쓰고 거란이 준 황류를 탄 채 100여 기를 인솔하여 조과령으로부터 숨어서 돌아가다가 밤중에 길을 잃었다. 이에 촌에 사는 백성을 포로로 잡아서 인도하게 하였다가 질못하여 진주로 갔다. 100리 쯤 가다가 이를 깨닫자 그 백성을 죽여버린 뒤, 밤낮으로 북쪽으로 달아나 이른 곳마다 밥을 얻어먹다가 주나라 병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도망치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노쇠하여 힘이 부쳐서 말 위에 엎드려 밤낮으로 달리다 겨우 본거지인 태원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고평의 패전을 한스러워 하다 954년을 못 넘기고 사망했다. 이후 북한은 다시는 후주를 위협하지 못했고, 시영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천하 통일 사업을 본격적으로 단행한다.


[1] 후한 초대 황제 유지원의 친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