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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지관 문충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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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 세 형제가 내조하여 각각 받은 칭호. 시기 불명. 고려사상 확인됨. ** 백제 문주왕에게 담왕이 받은 칭호로 족보상 기록됨, 후대 도동음률(명칭에 이설 있음)은 삼국사기상 좌평으로 확인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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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福令
(?~?)
1. 개요
11세기 후반의 탐라 성주이자 배융부위. 이전 성주인 유격장군 가량잉(加良仍)의 동복동생.2. 생애
선종 7년(1090) 형인 성주 가량잉이 죽은 뒤 성주의 작호를 세습했고, 탁라구당사(乇羅勾當使)가 고려 예빈성에 이를 보고한다. 예빈성에서는 구당사의 보고를 바탕으로 성주의 교체 사실과 함께 선종에게 옛 제도에 따라 부의품을 보낼 것을 아뢴다. 2년 뒤인 선종 9년(1092)에 고려에 방물을 바치는 탐라 성주가 의인(懿仁)으로 바뀐 것으로 미루어 그 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구당사가 탐라의 동향을 보고하고, 이를 통해 탐라 관련 업무를 맡아 본 관청은 '외국'의 사절을 접대하는 예빈성이었다. 외국인인 송 상인이나 흑수말갈에 연회를 베푼 자리에 탐라인이 포함되는 점 등과 함께 고려 초기에 탐라를 행정구역이 아닌 별개의 국가로 인식했다는 학설의 근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