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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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당 제5대 중앙집행위원장 가와카미 조타로 河上丈太郎 | Jōtarō Kawakam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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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73283><colcolor=white> 출생 | 1889년 1월 3일 |
일본 제국 도쿄부 미나토구 | |
사망 | 1965년 12월 3일 (향년 76세) |
일본 도쿄도 | |
학력 |
다이치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 / 학사) |
의원 선수 | 10 |
의원 대수 | 16, 19, 20, 21, 25, 26, 27, 28, 29, 30 |
지역구 | 효고 1구 |
가족 |
아내 가와카미 스에코 장남 가와카미 타미오 |
종교 | 개신교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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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파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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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간세이가쿠인대학 교수 변호사 효고 1구 중의원 우파사회당 위원장 일본사회당 제5대 중앙집행위원장 |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정치인.2. 생애
1889년 1월 3일 도쿄시 미나토구(현재 도쿄도 미나토구)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1]이후 릿쿄 중학교와 도쿄 제1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릿쿄 중학교 재학 당시 사카이 토시히코와 고토쿠 슈스이가 일간 신문 만조보에 게재한 퇴사사에 감명을 받아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08년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가야 오키노리가 대학 동기였다. 대학 졸업 후, 취직처가 조선총독부로 내정되었지만, 무단통치에 환멸을 느낀 가와카미는 관료가 되지않고 릿쿄대학 교수가 되었다. 나중에 동료의 권유로 간세이가쿠인대학에 교수로 부임했다. 이때 성공회 목사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카가와 토요히코를 만났고, 노동학교 교수를 맡게되며 사회주의 운동에 빠져들었다.[2]
간세이가쿠인대학 교수 재직 중인 1918년 히라이와 스에코와 만나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이자 감리교 목사인 히라이와 요시야스는 처음에는 두 사람의 결혼을 격렬히 반대했지만, 가와카미와 스에코의 설득으로 결혼에 성공했다.
처음으로 보통선거가 실시된 1928년 제1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노농당의 공천을 받고 출마해 당선되었다. 1930년, 1932년 중원선에선 연거푸 낙선했지만 1936년 다시 당선돼 국정에 복귀했고, 이후 1945년 부터 1952년까지 공직에서 추방된 시기를 제외하면 사망할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1932년 일본의 무산정당이 사회대중당으로 통합되자 사회대중당에 합류해 국가사회주의 정책을 지지했다. 1940년 사이토 다카오[3]가 군부를 비판하는 연설을 할때 같은 사회대중당 소속 의원인 아사누마 이네지로 등과 함께 사이토의 제명을 찬성했다.
1940년 사회대중당에서 국가사회주의 정책을 지지하던 아소 히사시가 사망하자 대정익찬회의 총무가 되었고, 이 경력이 문제되어 전후 가와카미의 공직 추방에 큰 원인이 된다.
1952년 공직 추방에서 해제되자 우파사회당에 입당해 중앙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다. 이때 가와카미는 위원장은 십자가이다라는 발언을 하며 십자가 위원장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국회 내 기독교 신자였던 의원들을 모아 기도회를 열기도 했다.[4]
1952년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내가 공직 추방을 당한 건 어떤 단체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나의 진심을 말하자면 원해서 그 단체에 참가한 것은 아니지만 변명은 하지 않겠다. 내가 전시에 취한 행동을 비판하고 싶다면 부디 선거로 엄정한 비판을 내려주길 바란다. 그리고 나를 용서해줄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일본사회당이 전진하기 위해 협력해주길 바란다"라며 스스로의 전쟁 책임에 대해 사과했다. 해당 선거에서 가와카미를 비롯해 기시 노부스케, 츠지 마사노부 등 공직 추방에서 해제된 사람들이 대거 입후보 하였지만 가와카미와는 달리 본인의 전쟁 책임을 스스로 인정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55년 좌우파로 나눠져 있던 일본사회당이 통합되자 위원장을 스즈키 모사부로에게 넘기고 본인은 일본사회당 고문직에 올랐다. 이후 가와카미는 평화운동에 매진하며 반전운동을 펼쳐나갔는데 이때 전시 도조 히데키 내각 에서 상공대신을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가 되자 그에게 전쟁책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1960년 6월 17일, 중의원 의원면회소에서 청원을 받았을 때, 우익단체 회원에게 왼쪽 어깨를 찔려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같은해 우파사회당의 일원이었던 니시오 스에히로가 민사당을 창당하자 우파사회당 출신 의원 일부가 민사당으로 이탈했다. 그때,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5]의 오타 카오루 의장이 선거에 협력할 테니 가와카미파 의원들의 추가 이당을 막아달라고 요청하자 가와카미는 "우리는 득실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게 아니다"라며 분노했다. 그리고 파벌 소속 의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선거에 출마했고, 당시 당내 좌파인 스즈키파의 지원을 받았던 아사누마 이네지로에게 패배했지만 가와카미도 예상 외의 지지를 받아 파벌 내 의원들의 추가 이탈을 막을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선거가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도쿄 찌르기 사건으로 아사누마가 피살 당하며 중앙집행위원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1961년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가와카미가 다시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63년 총선 당시 유세를 하다 병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했고 1965년에는 과로로 쓰러져 병이 악화되었다. 가와카미는 "지위에 연연하는 정치가라는 혹평을 받고 싶지 않다"라며 중앙집행위원장직에서 물러났고, 그 해 12월 3일 뇌출혈로 인해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 때 본인이 한시도 떼어놓지 않던 성경을 머리맡에 둔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3.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1928 |
입당 정계 입문 |
|
1928 - 1930 | 합당[6] | |
1930 - 1931 | 합당[7] | |
1931 - 1932 | 당명변경 | |
[[사회대중당(일본)| 사회대중당 ]]
|
1932 - 1940 | 합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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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 1945 | 합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5 |
패전에 따른 정당해산 공직 추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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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1952 |
창당 (원외 인사로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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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 1955 | 분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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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 1965 |
합당 사망 |
4.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28 | 제1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효고현 제1구[8] | - | 당선(4위) | 초선 | |
1930 | 제1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 | 낙선 (5위) | |||
1932 | 제1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 | 낙선 | |||
1936 | 제19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사회대중당(일본)| 사회대중당 ]]
|
- | 당선(1위) | 재선 | |
1937 | 제20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 | 3선 | |||
1942 | 제21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
- | 당선(2위) | 4선 |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효고현 1구 |
|
81,001 (27.2%) | 당선(1위) | 5선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88,885 (33.3%) | 6선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83,645 (26.8%) | 7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
66,345 (17.7%) | 당선 (2위) | 8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78,122 (20.5%) | 당선(1위) | 9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100,942 (25.1%) | 10선[9] |
5. 여담
- 신문기자들 사이에서 "가와카미씨(河上さん)"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존중받을만한 인격자로 평가받았다.
- 가와카미의 결혼식은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의 대강당에서 치르기로 했지만 그가 "인생은 작은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라고 주장해 5평 정도 되는 해리스관에서 진행을 하게 되었다. 예식 장소가 너무 좁아서 참석자들은 앉지도 못했다고 한데다 결혼 반지도 준비하지 않았고 기념 사진 촬영도 하지 않았다.
- 그의 아들 가와카미 타미오(1925~2012)도 도카이대학 교수 등의 직책을 맡은 학자 출신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구 효고 1구에서 6선 중의원을 지냈고 1990년 지역구를 비서였던 도이 류이치에게 넘긴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도카이대학 교수로 돌아와 정년퇴직때까지 교편을 잡았고, 2012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
한국에선 크리스천이 흔하지만 불교, 신토, 무종교인이 절대다수인 일본에선 특이 케이스다.
[2]
단 일본 내의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그렇듯 천황제를 인정하는 하에서 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3]
1870~1949,
입헌민정당 출신이며 일본 전시를 대표하는 자유주의 인사로, 의회정치와 자유주의를 중시하고 일본 군부를 비판했던 인사였다.
[4]
이때 기도회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
성공회 신자였던
오히라 마사요시도 있었다.
[5]
1989년 해산 이후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 약칭 연합 (連合,렌고)로 재편되었다.
[6]
일본노농당, 일본농민당, 무산대중당과의 합당.
[7]
일본대중당, 전국민중당과의 합당.
[8]
대선거구제 시행 시기 선거구.
[9]
1965.12.3 임기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