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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1-22 08:39:25

《세네갈 블루스》

세네갈 블루스/ 조기현

1. 개요

조기현 시인의 대표시 중 하나이다.

2. 전문

1.
밥상에, 칼이 올랐다
이제 더는 그 무엇도 자르지 못할
한 도막 칼날
"세네갈 산産이시더."
어물전 아낙 허리는 호미 같았지
"눈알이 노랗네." 그래도 아직은
은빛 날이 선 장검 한 자루
바다 물살을 헤집어 다니던
칼의 길들, 까마득히 잊은 저녁
구워진 칼은 어찌 이리도
기름지고 부드럽나
대서양에 해가 지고
파도가 블루스[1]를 밀어온다
세네갈의 여윈 아이인가
내 쪽을 보고 있다
팻시[2]의 눈매
물빛 글썽하다

2.
세네갈까진 가보려고도 못했는데
세네갈 바다에 살던
네가 왔다
물살 같고
빛살 같던, 네가
잡혀 죽어서 왔다
꽁꽁 얼어붙어서
칼처럼 굳어서
뭔가를 베어버릴 듯하다가
그만 체념해버린 모습
눈알만 노랗고 동그랗게 뜬 채, 왔다
포항 죽도시장 어물전
물음표처럼 구부러져 앉은, 아낙 앞에
얼음 깔고 비닐을 덮은
생선 좌판 위에
칠성판 위에
네가, 왔다

3.
여기 있구나
젊은 날 숨겨 갈던, 칼
끝내 그 무엇도 베지를 못하고 홀로 울던
비수, 장검이 되도록 날 푸르던 꿈
남몰래 내버리고, 애써 잊어버리려 해도
돌이키면 어느새 다시 돋아 있던
내 가슴 속, 칼
지금에야 다시 백발 머리 숙여
너를 본다
"한 마리, 만 원이라예."
어물전 아낙 손에
도막 나고, 왕소금마저 둘러쓴
내 젊은 날, 장검 한 자루

4.
몸이 어찌 낚싯바늘이 되랴
어물전 아낙
그 손끝에 미늘로 붙은 초승달
오늘도 눈먼 바다의 배를 가른다
무슨 한이 서려 그랬는가
어찌 배가 고파 그랬던가
온 바다를 가르고 갈랐어도
막상 나서면 또 물음표로 가는 인생
니는 또 우짜다가 이리 먼 데로 왔노!
하긴, 내도 우야다가 이리로 왔실꼬!
세네갈이 어떤 덴지, 한번 가 보지 않았어도
이놈 눈깔 노래가지고 여태 우는 꼴을 보면 알제
아가야, 세네갈 아가야
이건 칼이 아니라 달이란다
어여, 눈 감고 자거래이!
오늘은 멀리 세네갈서 왔다는
굵고 실한 갈치들을 도막 친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10월호 발표


[1] 17세기부터 미국으로 끌려와 남부지방, 특히 미시시피 델타의 목화밭에서 노동하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아프리카 음악 전통을 유럽의 음악과 접목해 탄생시킨 음악 장르. [2] 미국 영화 노예 12년 흑인 여성 노예(배역: 루피타 니옹)의 이름. 일을 잘해서 ‘목화밭의 여왕’이라 불리지만 백인 농장주의 집착에 표적이 되어 성적 노리개가 되고 잔혹하게 학대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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