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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5:37:35

나우누리

nownuri에서 넘어옴
4대 PC통신 서비스[1]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1] 2024년 10월 31일 천리안을 끝으로 모두 서비스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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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지역 PC 통신망과의 협력체제4. 주요 동호회5. 인터넷으로 패러다임 시프트6. 서비스 종료7. 관련 항목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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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콤(現 SOOP)이 운영했던 PC통신( VT) 서비스. 1994년에 서비스를 개시했으며 약 19년만인 2013년 1월 31일에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나우누리의 창립자인 강창훈 전(前) 나우콤 사장은 원래 선경건설(현 SK건설)에 입사하여 해외 업무를 맡던 소위 '국제통'이었다. 이후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이 영어 능통자 특채를 할 때 고용된 최초의 2인 중 한 사람으로 언론계에 들어왔으며, 1990년 PC통신 케텔을 운영하던 한국경제신문 뉴미디어국으로 이직하면서 PC통신과도 연을 맺었다.

이후 하이텔이 출범하며 정보개발부장으로 있었으나, 하이텔이 점점 한국통신(현 KT) 출신자들을 중용하자 따로 나와서 설립한 것이 나우콤이고, 나우콤이 개발한 PC통신 서비스가 나우누리다. 하이텔과 나우누리가 명령어 입력이나 서비스 체계가 매우 비슷했던 게 이 때문이다.

2. 특징

천리안 하이텔에 이은 대형 BBS 인터넷이 지금과 같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 몇 안되는 정보 교류의 장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한 때 수백만에 이르는 많은 회원을 거느렸으며 다양한 게시판 및 동호회가 운영되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PC통신과 포털로 잘 나갔지만, 2004년 경 들어 싸이월드 네이버 블로그 등의 전성기가 도래하면서 자연스레 도태되었다.

극초창기에는 '북네트(Booknet)'라는 이름으로 책 정보에 특화된 PC통신이었다. 그러다가 1994년 4월 종합 PC통신으로 세를 확장하여 시범 서비스를 시작하였고, 북네트는 BBS 내의 서브 메뉴로 자리잡게 되었다. 확장할 때만 해도 서비스 이름이 없어서 임시 명칭인 'K3'를 붙였지만, 이용자들은 회사 이름인 '나우콤'으로 불렀다. 그러다 1994년 9월 1일에 서비스 이름을 '나우누리'로 확정하였고, 동년 10월 1일 상용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나우누리'라는 이름은 "나와 우리가 여는 새로운 누리"를 줄인 뜻이다. 한자말 이름을 쓴 '천리안'은 서비스나 게시판이 온통 한자말이었다면, 영어 이름을 쓴 '하이텔은 서비스나 게시판이 온통 영어였고, 우리말 이름을 처음으로 쓰며, 또이름(ID)을 한글로 쓰는 길을 처음 연 '나우누리'는 서비스나 게시판을 쉬운 우리말로 짓거나, 나중에 건의와 제안을 받아서 쉽게 우리말로 고치는 일을 끝까지 했다. 어린이하고 어르신이 PC통신에 다가서기 좋도록 턱을 대단히 낮추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나름대로 우리말을 아끼며 펴는 길을 열었다고 할 만하다.( #)

서비스 시작시부터 모든 접속 포트에 당시 기준으로 고속모뎀(14400bps)을 지원하고(다른 서비스들은 상당수가 2400bps 포트였고 고속 포트는 별로 없었다.), 초기에 인터넷 이용이 분당 수십원 하던 시절에 인터넷 접속을 일시적으로 무료로 제공하는 등의 정책으로 짧은 시간에 많은 회원을 모았다. 전체적으로 천리안 하이텔에 비해 연령층이 젊었고 미성년자 회원도 많았으나, 나우지기[1]들이 열심히 모니터링을 하여 비매너 유저들이 날뛰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또한 여러 대학들과 제휴하여 사이버캠퍼스를 운영하여서 대학생들도 많이 이용하였다.

또한, 국내 PC통신 서비스들 중에서는 최초로 한글로 ID를 만들 수 있었다.

별칭으로는 나우느려, 나어눌이, 너무느려, 이제(Now)느려, 여우누리 등등등,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저렴한(?) 성능의 컴퓨터와 회선 속도상의[2] 조합으로 인한 느릿느릿한 속도를 보이거나 하는 문제로 인해 그런 별칭이 있었다. PC통신 VT텍스트가 한 화면에 아무런 그림도 없이 텍스트만 꼴랑 25줄 표시되는데도 한 줄씩 화면에 그려내는 속도가 거의 고랫적 도트프린터로 찌익찌익 하고 한줄씩 뽑는 속도에 가까웠다... 초기 나우누리는 하이텔망(01410, 01411)을 통해 접속하거나 전용 BBS 전화번호(라고는 하는데 014XY 형식이 아닌 그냥 시내 전화번호였다. 접속 번호는 02-592-5000,5001,5002였고 나우누리 고객센터 전화번호는 02-590-3800이었음)를 통해 접속했어야 했기 때문. 이 문제는 거의 90년대 말에 들어서야 해결되어 이 때에야 01443이라는 전용번호를 부여받게 된다. 그런데 그 1, 2년 후에 바로 인터넷 텔넷의 전성시대가 열렸다는 게 함정.

한국에서 최초로 자체 GUI 클라이언트를 서비스한 회사다. 서비스를 시작하자마자 전용 클라이언트인 나우로를 통해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나중에는 인터넷 접속까지 제공했다. 나우로는 당시의 기준으로 상당히 앞서가는 방식이었는데, 특히 나우로윈 2.0 버전에서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멀티세션을 3개까지 지원했다. 창을 하나만 띄울 수 있던 시절 3개까지 창을 띄울 수 있게 구현했다는 얘기. 지금은 인터넷창만 대여섯개 열어놓고 쓰는데 이게 뭔 소린가 할 것이다. 이후 천리안이 나우누리와 경쟁하기 위해 전용 클라이언트를 도입하고 PC통신사들이 너도나도 전용 그래픽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을 제공하기에 이른다.

또한 한국 최초로 빌 게이츠의 방한 연설을 실시간 문자와 그래픽으로 중계한 적도 있다. 실로 유비쿼터스의 시작이다.

한창 때에는 모든 게시판에 사람들이 넘쳐났으며, 특히 유머란의 전성기에는 한시간에 수백개의 글이 올라오는 등 많은 인기로 인해 나우유머의 이름이 드높았으며, 여러 인터넷 소설작가[3]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베스트유머에는 시사글과 키워질 글, 군대간다는 글이 많이 올라오는 등 현 시기의 각종 유머사이트가 가진, 유머글 아닌 글도 공감받는다고 추천받는 문제점이 이 시기에도 나오고 있었다는 건 꽤 흥미로운 부분.

창립 멤버들 자체가 문용식 운동권 세력이 주축이라, 4대통신 중에서 가장 진보 좌파 성향이 강했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게는 한겨레 신문과 나우누리가 권장됐을 정도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보수 우파 성향이 강했던 하이텔이나 천리안과 대립하였다고 하지만 이들 PC통신이 활발하던 시절의 온라인 공간은 워낙 진보좌파의 우위가 강력한 공간이었기에 정치적 의미에서 대립구도가 나타났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이텔이나 천리안이 보수 우파 성향이 강했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로[4], 이후 한국 진보정치운동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안티조선운동'의 진원지가 바로 하이텔 프라자(PLAZA)란이었고 세 통신망 중 가장 정치색이 약했던 천리안[5]에서도 '현대철학동호회', '사회비평동호회 희망터'등 진보성향/운동권 계열 동호회 활동은 활발했다. 이 당시 통신망들의 대립이란 상대적으로 이용자 연령층이 높은 '늙은' 하이텔 vs 속도는 빠르지만 이용료가 비싼 '브루주아' 천리안 vs 비교적 이용자 연령층이 낮고 학생 이용자의 비중도 높던 '어린애' 나우누리 와 같은 구도였지만 사회 전체 기준으로 보자면 PC통신 자체가 젊은이들 중심의 문화였고, 또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진보 편향성도 압도적이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친노 유저들로 인한 나우누리 유머란의 지나친 정치화는 한때 엽기적인 그녀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같이 폭 넓은 인기를 얻은 독립적인 작품을 배출하던 창작공간이던 유머란의 쇠퇴를 불러온 원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게시판의 정치화(=게시판이 정치 이슈에 잡아먹혀 본래의 목적을 잃는 현상)는 이후 좌우를 막론하고 디시인사이드, 일베저장소, 오늘의유머, 루리웹 등 많은 커뮤니티들이 몸살을 겪는 문제이기도 하며, 나우누리 유머란이 정치화로 인한 게시판 몰락의 거의 최초 사례이기에 이후 많은 커뮤니티 운영자들은 이 사례를 반면교사삼아 정치글을 적극적으로 규제하거나, 아니면 정치 관련 게시판을 분리하여 나우누리 유머란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게시판이 본래의 목적을 잃고 정치글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힘쓰고 있다. 그러나 이 사례에서 '나우누리 몰락의 원인'까지 찾으려 하는 것은 지나친 침소봉대이다. 일단 유머란이라는 특정 게시판 하나가 노잼화된 원인을 나우누리 자체가 몰락한 원인으로 확대해석하려는 것부터 엄청난 급발진이다.[6] 게다가 친노 이용자의 폭발적인 증가는 나우누리뿐 아니라 16대 대선~ 탄핵 정국 무렵의 기간동안 한국의 PC통신 및 인터넷 젼역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한 현상이고, 유머를 빙자하여 보수정당( 한나라당)을 조롱하는 것 역시 바로 이들에 의해 공공연하고 대중적인 온라인 놀이 문화로 자리잡고 있었으니 이것 때문에 사이트나 서비스가 망했다면 한국 인터넷은 그때 다 망했어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우누리뿐 아니라 PC통신들은 어차피 전부 다 인터넷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망했다는 점이다. 하이텔 및 천리안은 포털서비스로 전환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망했고, 나우누리의 운영사인 나우콤은 서비스를 '별나우' 라고 하는 웹 기반으로 이전하려 했으나 정착에 실패하고, 당장 수익이 되는 웹하드 서비스(피디박스, 클럽박스) 운영에 몰두하여 나우누리 유지는 등한시했기 때문에 장애 등 서비스 품질은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초고속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VT 서비스에 신규 유입되는 유저는 거의 없었기에 PC통신은 결국 도태될 수 밖에 없었던 것.

나우누리에 눌러살던 사람들을 나우폐인이라 불렀는데, 나우폐인들은 당시 아햏햏으로 일어난 디씨 또는 웃대의 전력과도 맞먹을 정도의 힘을 자랑했다. 웃대가 뜨기 전 대한민국 인터넷 폐인 세력은 나우폐인 - 햏자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 때 이들의 행적을 만화로 그려 히트한 사람이 김풍.

동호회 전체 자료실은 꾸준히 올라오는 불법적인 양질의 자료로 인해 나우와레즈라고도 불렸다. 불법 자료들은 나우지기에 의해 삭제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바꿔 올리는 방법이 널리 이용되었으며 바꾼 이름이 유머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7]

이당시 하이텔의 serial에 맞먹는 통신소설의 메카 SF란을 가지고 있었지만[8] 소설 뿐만이 아닌 잡담이 섞여 올라오는 구조였고, 이 잡담에서 논쟁이 많이 발생하여 정작 소설이 묻혀버리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였다.[9][10] 이에 화난 작가들이 절필선언으로 쇠퇴기를 겪은 적이 있다.[11]

개그맨 전유성이 유머 게시판에 자기 코너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전유성의 저서(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 만큼 한다)에도 나와있다. 다만, 전유성이 최초로 PC통신을 시작한 곳은 하이텔이었다. 하이텔 ID는 gagman01, 나우누리 ID는 전유성.

한총련 민주노총 역시 나우누리에 폐쇄이용자그룹(CUG)을 개설한 적이 있었다. 1996년 연세대 사태 당시 한총련의 불법시위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나우누리 본사(단우빌딩 방배동) 압수수색하는 도중 한 경찰관이 컴퓨터를 몰라서[12] "한총련 방이 몇호실이야?"라고 묻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

3. 지역 PC 통신망과의 협력체제

나우누리의 특징 중 하나로는 지역 PC통신망이 별도로 존재했다는 것이 있다. 기존의 하이텔이나 천리안이 주로 서울 위주로 동호인 활동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에, 마침 인터넷망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1990년대 중반의 시류를 타고 지역 기반 PC통신 업체들이 설립되었다. 즉 이 PC통신망들은 나우콤 본사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업체가 자체 PC통신망을 개설하고 나우누리와 연결시켜 놓은 것이었다.

이 때문에 나우누리 계열망은 지역 기반 동호회들도 많았고 활동도 활발했다. 특히 지역의 고등학교, 대학교 포럼은 꽤나 활성화되어 있었다.

이들 지역 통신망은 나우누리 번호가 아닌 지역망 번호로 접속해서 들어가도 사실상 하나의 통신망처럼 기능했는데, 예컨대 경상남도 진주에서 eyes 통신망으로 접속해도 go anc를 치면 나우누리에 개설된 ANC 동호회로 바로 갈 수 있었다. 다만 열린광장, 유머란, 스포츠 등의 중앙 게시판은 각 통신망이 따로 개설해놓고 있었다.

4. 주요 동호회

5. 인터넷으로 패러다임 시프트

하지만 시간이 흘러 대세가 VT에서 웹으로 넘어가자, 이에 맞추기 위해 별나우 등 다양한 시도를 하였으나, 당시의 경쟁 서비스들에 비해 구린 디자인, 느린 속도, 불편한 이용에 기존 서비스와의 연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하였으며, 이외에도 운영자 독단적으로 (잠시) 적용되었던 닉네임 정책에 대한 반발이나 무료회원 허용에 관한 논란, 동호회 자료실 용량 제한과 그 때 피디박스로 나우누리 서버를 빼간다는 소문[18]이 도는 등 다양한 악재가 겹쳐 그 세력이 급격히 기울어졌다. 이후부터 말기까지는 소수의 회원만이 남아서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수준이었으며 그 활동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2013년 서비스 종료 직전까지 신규 회원 가입이 가능했으며 이전의 게시판과 서비스 중 많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텔넷을 통한 VT 접속도 가능했지만, 로그인은 유료회원만 가능했다. 다만 전화선을 통한 접속은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

웹으로 넘어와서 나우누리의 가장 강력한 세일즈 포인트는 동호회 자료실이었다. 당시 나우누리의 자료실 소스는 어느 인터넷 서비스도 쫓아올 수 없는 서비스량을 자랑하고 있었고, 내심 유료 서비스로도 사용자들의 충성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보지만 결과는 시궁창.

점점 웹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떠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서 나우누리 홈페이지에는 와레즈만큼이나 자료가 많은 곳이라는 광고를 내보내었지만 이미 떠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기에는 너무 늦었다. 나우누리는 급속히 막장을 타게 되고, 동호회 자료실에서 힌트를 얻은 나우콤은 피디박스와 클럽박스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사실 별나우로 넘어와서도 나우누리를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꽤 있었지만 이당시 나우콤의 정책이 막장 그 자체였고, 현재도 그 정책을 지키고 있다.

별나우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먹을것도 없는데 별걸 다 유료를 강요한 점이며, 웹 서비스의 기본중의 기본인 이메일 서비스조차도 돈을 내지 않으면 계정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나우누리 계정을 주 이메일로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은 메일 계정을 버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서비스를 떠나가게 되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타 다른 서비스 회사들은 웹으로 넘어가면서도 무료 사용자에게 이메일 정도는 제공한 것에 비해서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프리챌의 커뮤니티 유료화 사건, 그리고 다음의 온라인 우표제와 더불어, 인터넷에서의 섣부른 유료화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대한민국 온라인사에 남을 희대의 삽질이라고 할 수 있다. 나우누리의 경우 원래 유료였던 PC통신에서 넘어왔다는 점을 생각하더라도, 인터넷의 특성이 무료 공유에 가깝다는 점에서 보면 시대에 역행하는 유료화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19]

온라인의 프론티어들을 다수 점유하고 있었고, 커뮤니티 집단 역시 실질적인 독점력과 파워를 가졌던 나우누리였지만, 경영진의 병크에 의해서 나우누리의 시대는 저물어 갔다. 이에 따라 당시 독점적인 정보력을 가지고 있던 동호회 집단들이 대거 공중분해되고, 다음 카페로 대표되는 신흥 인터넷 커뮤니티에 그 바톤을 넘겨주게 되고 당시 듣보잡이었던 루리웹이 거대 인터넷 커뮤니티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이후 운영이 나우콤에서 자회사인 나우 SNT로 넘어갔으며, 이관 초기에는 몇 가지 서비스를 도입하는 등 나름 시도를 한 것 같지만 이제는 서비스가 돌아가게 하는 것 말고는 거의 손을 놓은 것으로 보인다. 놀랍게도 지금도 수요일 새벽에 정기 점검을 하고 있다. 참고로 나우콤은 아직도 아프리카TV 등으로 여전히 잘 나가고 있으며, 법인명칭까지 같은 이름으로 변경하여 이어지고 있다. 역시 나우콤에서 운영하던 피디박스는 2016년 4월 27일 클럽박스에 흡수되었고 클럽박스마저 2018년 11월 무료 다운로드를 없애면서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더니 2019년 3월 6일에 서비스 자체를 종료했다.

6. 서비스 종료

하지만 나우누리 자체는 2013년 1월 31일 서비스 종료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나우누리입니다.
먼저 그 동안 나우누리를 사랑해 주신 고객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나우누리는 1994년 나우누리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고객님들과 함께 해 왔으나, 이제 서비스 종료라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나우누리를 이용해 주신 고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서비스 종료에 대해 아쉽고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고객님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 드립니다.
나우누리 서비스는 2013년 01월 31일 부로 서비스가 완전히 종료됩니다.서비스 종료전에 2개월(2012년 12월 01일 (소급적용)부터 2013년 01월 31일)간 무료서비스로 전환하여 데이터 백업 및 서비스 이전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할 예정입니다.
무료로 서비스 되는 2개월동안 백업을 받으실 데이터를 백업을 받아주시기 바라며,서비스 종료로 인해 고객님들께 불편을 끼쳐 드린 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나우누리 서비스 종료 공지 @

2023년 7월 17일, 창립자인 강창훈 전 나우콤 사장이 뇌졸중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66세. 이로서 PC통신 나우누리는 그 인적 유산까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특이하게도 한때 연합뉴스에서 특채로 입사하여 중역으로 있었던 사실 때문인지, 연합뉴스에 고인의 부고 기사가 상당히 자세하게 작성되었다. #기사

7. 관련 항목



[1] 하이텔에는 PCCOM 시리즈가 이에 상응. [2] 모뎀 시절에 빠를 수가 없었던 건 당연하지만, 종종 툭하면 접속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접속 프로그램의 불안정성으로 폭주를 한다던가 TXT만 불러내는데도 엄~청나게 느려서 이런 별칭이 있었다. [3] 영화화 된 '엽기적인 그녀'의 견우와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최수완도 나우누리 유머란 출신이다. [4] 2020년대 기준으로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로자 룩셈부르크 마이너 갤러리 진보정치 마이너 갤러리 유저들이 더불어민주당 마이너 갤러리나 기타 친민주당 커뮤니티를 두고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보수우파다!" 하는거랑 비슷했다는 이야기다. 그럼 진짜 보수정당 지지 성향 커뮤니티에 해당하는 것은 뭐였는가 하면, 한국의 온라인 공간에서 보수 성향 커뮤니티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5] 왜냐하면 천리안은 속도가 빠른 대신 이용료가 비쌌기 때문이다. [6] 이는 나우누리 자체는 사용해 본 적이 없고 아는 것도 거의 없으면서 몇가지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나우누리에 대해 이야기하려 드는 이들이 저지를 법한 실수이다. 예를 들어 나우누리 유머란 출신 작가들을 열거하는 서술에서 갑자기 전민희가 언급된다면 전민희가 SF란(SF&Fantasy란) 출신인 것을 아는 이들은 당연히 당황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우누리를 이용해 본 적이 없고, 전민희의 활동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그저 '전민희는 나우누리 연재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있는 이가 지레짐작으로 나우누리는 다 같은 곳이라고 착각하여 "같은 곳에서 활동한 작가로 전민희도 있다" 식의 이야기를 지어내서 쓰게 되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 지적한 실수 역시, 유머란이 나우누리가 제공하는 여러 서비스(게시판)중 하나라는 것을 모르고 '그냥 나우누리' 라고 하니까 '유머란이 쇠퇴한 원인을 나우누리가 쇠퇴한 원인이라고 이야기를 지어내서 써도 맞게 될 것이라 착각한 것일 수 있다는 것. [7] go pdsforum 88 이 동호회 전체 자료실이었으며, 크랙(crack)은 과자, 포토샾은 사진가게, 윈도우즈는 창문 등, 왠지 뜻은 통하는 것 같기도 한 이름으로 적당히 바꿔서 자료가 올라오곤 했었다. 이사짐 센터 쿠의 95년도 판 전화번호부라는 식으로 그냥 보면 뭔지 모를 것 같은 제목이지만, 사실은 이사쿠 95년도 판 에로게 같은 걸 몰래 올려놓는 용도로 쓰였었다.(...) 지금이야... [8] 커그 초창기의 작가들이 대부분 나우누리 SF란 출신이며, 아룬드 연대기 룬의 아이들 시리즈로 유명한 전민희 역시 나우누리 SF란에서 연재 이력을 시작했다. [9]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였으나 심할 때는 한 주에 한두번 정도였다. 이에 비해 규모면에서 비슷했던 하이텔 시리얼란은 잡담란을 따로 만들고 연재란에 잡담이 올라오면 철저히 삭제했다. 왜 나우누리가 굳이 별개의 잡담란을 만들지 않았는지는 아직까지도 신비. [10] 굳이 말하자면 하이텔 시리얼(serial)란은 이름 그대로 창작'연재'(serial)란, 즉 처음부터 창작소설의 '연재'를 위한 게시판으로 만들어진 곳이었고, 나우누리의 SF란은 처음에는 SF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종합 게시판으로 만들어졌다가 "그러면 내가 쓴 소설을 여기에 올려봐도 괜찮은 것 아니냐?" 식으로 소설 연재를 하는 이들이 게시판을 점령해 버린 격이라 잡담글을 써도 게시판이 '처음 만들어지던 당시'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기는 하였다. 하지만 작가들 뿐 아니라 다른 SF란 이용자들도 '연재 소설을 보고 싶은데 잡담글 때문에 연재분량이 묻히게 되는 것은 몹시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대다수였고, 그저 그런 취미 게시판 중 하나로 남을 가능성이 높았던 SF란이 한국 통신소설의 양대 메카 중 하나로 발전한 계기가 바로 '소설 연재 작가들의 점령' 덕분이었는데도 굳이 파생 게시판으로 잡담란 하나를 만들어주지 않고 잡담과 연재글이 섞이도록 방치해두는 운영을 고집할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 심지어 판타지라는 장르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에는 'SF란'이던 것을 '판타지'가 유행하여 SF보다 더 높은 지명도를 얻게 되자 SF&Fantasy란으로 이름을 바꿀 정도였으니 아예 운영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는데 간단한 게시판 분리는 끝끝내 굳이 해주지 않은 것이다. 굳이 짐작하자면 운영측에게 '잡담과 연재글이 섞여 누구나 자유롭게 떠드는 공간'에 대한 요상한 환상 같은 것이 있었던 것아 아닌가 싶은 정도. [11] 이성현(카인)의 "빛의 검"에 "에스에프국"이 등장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에스에프국 출신 두 사람의 이름은 당시 논쟁을 가장 심하게 일으켰던 두 사람의 ID를 패러디했다. 그리고 이 절필선언 후 친분이 있던 일부 작가들은 웹사이트를 만들어 그쪽으로 이동했는데, 이 사이트가 커그. [12] 당시 기성세대들의 컴맹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고문기술자 정형근이 나중에 국회의원 되고 나서 대정부질의에 플로피 디스크 인쇄본(...)을 들고 나오면서 "간첩을 찾았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하다 망신당한 해프닝도 유명하고... [13] 대부분 70~80년대 초반생으로, 최초 시삽이 71년생( 박병호(교수))인 등 70년대 초중반생들도 많았던 하이텔에 비해 한 세대 정도 젊었다. [14] 일명 앙끄시디(ANC CD)라 불리며 한 본이 무려 1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의 앙끄 자료실 백업수준(...) [15] 당시 StarC_Yellow라는 배틀넷 ID를 쓰고 있었다. [16] 덕분에 자유게시판에 가면 각종 에로게 히로인들의 한자/가나이름이 4어절(=8바이트)인 경우 거기에 딱 맞춰서 게시판닉을 쓰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17] 하이텔에서 에로게를 논할수 있는 공간은 고전게임 동호회에 부속게시판으로 존재하고있었다. 원래 PC98을 다루는 포럼이었는데 하드웨어 특성상 에로게가 많다보니 에로게 포럼 비슷하게 되어버렸다(...). [18] 그 전까지는 동호회자료실의 용량이 무제한이었는데, 피디박스가 잘 나가던 시점에서 동호회자료실의 용량에 제한을 둔다고 발표했다. 사실 협의만 하면 계속 쓸만한 용량을 제공해줬는데, 이걸 제대로 설명을 안한 탓에 시삽(다음카페의 운영자와 같은 위치) 입에서 용량제한때매 자료실 자료를 삭제하겠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 소문이 안 돌래야 안 돌 수가 없었다. [19] 프리챌은 그나마 이후 유료화를 폐지했고, 다음도 온라인 우표제를 폐지해서 개선하긴 했지만 나우누리는 마지막까지 그런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