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PL学園高等学校일본의 종교 교단인 퍼펙트 리버티(Perfect Liberrty)에서 설립한 고등학교로 오사카부 톤다바야시시에 위치하고 있다. 바로 옆에 같은 재단내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 및 중학교도 있다. 킨테츠 나가노선 키시역에서 내려서 갈 수 있다.
2. 야구부
정식명칭은 PL학원 고등학교 경식 야구부(PL学園高等学校 硬式野球部).이 학교 재단측에서 스포츠 동아리를 전폭 지원하기에 전통의 스포츠 강호교로 유명한데, 특히 야구부가 전국적으로 유명했었다. 1956년에 만들어져 역사가 50년이 넘은곳으로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본선 진출 및 우승을 여러번 기록한 일본 고교야구 초명문. 통산 성적은 봄 대회 본선진출 20회 & 우승 3회(1981, 1982, 1987) / 여름대회 본선진출 17회 출전 & 우승 4회(1978, 1983, 1985, 1987). 프로선수 혹은 유명한 야구 지도자도 여럿 배출했는데, 키요하라 카즈히로, 타츠나미 카즈요시 등 수많은 스타들과 미국 내 학교에서도 2명 이상 배출하기 어렵다는 메이저리거를 쿠와타 마스미, 마츠이 카즈오, 후쿠도메 코스케, 마에다 켄타 4명이나 배출했으며 1977년~2001년까지 25년 연속으로 프로 선수를 배출한 진기록까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수한 성적과는 달리 안좋은 사건으로 불명예스러운 유명세를 탄 야구부이기도 하다. 선배들이 똥군기를 부리며 후배들을 폭행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 공식전 출전정지라는 중징계도 여러번 받았고, 고교생 신분으로 담배를 피다 걸리는 등 부원들의 일탈행위가 걸려 언론에서 대서특필하는 바람에 전국적인 망신도 샀다. 결국 00년대 후반 부터 재발방지를 위해 재단은 야구부 운영방침을 야구실력 우선에서 학업 및 인성교육과의 병행으로 변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고가 발생했고, 2013년에 2학년생의 1학년생에 대한 폭행으로 6개월 출전정지 처분과 함께 감독이 사퇴하는 상황까지 닥치는 바람에 제대로 된 감독도 선임하지 못한 채 교장이 임시 감독을 맡고 선수들의 분투로 지역예선 결승전까지 올라가는, 그야말로 야구 만화에 나오는 시골학교 야구부스러운 상황을 연출했다. 결국 2015년부터 신입 부원을 받지 않기로 결정, 2016년 7월 15일 고시엔 오사카 대회 출장을 마지막으로 모든 부원이 은퇴하며 잠정 휴부 상태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7년엔 오사카 고교야구연맹을 탈퇴했다.[1]
그나마 남아있던 연식 야구부마저도 2024년 여름을 마지막으로 휴부. #
현재까지 PL학원 야구부 출신으로 마지막으로 프로에 진출한 선수는 토요대학을 졸업한 뒤 2018년 드래프트에서 오릭스 버팔로즈에 지명된 나카가와 케이타이다.[2][3]
3. 여담
- PL학원 야구부의 최전성기는 1980년대로, 1981년부터 1987년까지 봄&여름 고시엔을 통틀어 6회 우승 2회 준우승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하였다. 특히 1983년부터 1985년까지 'KK콤비'로 불린 쿠와타 마스미와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활약으로 당시 PL학원에 대한 관심은 웬만한 프로팀 이상의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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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카 츠요시가 어렸을 때부터 동경해왔던 고등학교로 중학생 때 PL학원고 입학이 좌절되면서 극렬 안티 PL학원으로 돌아섰다.
고치 현의 코시엔 단골출전교인 메이토쿠기주쿠 고등학교 스카우트도 받았으나 PL학원을 상대하려면 같은 오사카부 내의 학교에 있어야 하므로 진학을 선택한 학교가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였다. 이후 고등학교 초창기 맞대결에서 모종의 이유로[4] PL학원 선수들이 니시오카를 비웃었고
이 말은 PL 출신 82~84년생 야구선수들 중에 이때 니시오카를 비웃은 선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5] 니시오카는 절치부심하여 프로야구선수로 성공한다.토인고 1년 선배 한그릇더 군보다 학창시절에 달리기가 느렸던 건 안 자랑
- 이 학원 산하 학교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학생 본인과 부모가 퍼펙트 리버티 종교 신자여야 한다. 이전엔 입학하면 명목상으로만 신자로 붙여놓고 교단이 1만엔에 파는 아뮬렛을 구매하는 것으로 대충 무마했었는데, 2016년부터 돌연 방침을 바꿔 독실한 신자의 후손 이외에는 사실상 수험을 막아놓았다. 이런 방침 선회와 학교의 간판이나 다름없던 경식 야구부, 골프부, 검도부, 여자배구부 등의 운영 중단 등이 맞물려 신입생 수가 감소하고 있다. 여기에 PL의 3대 교조였던 미키 타카히토(御木貴日止)가 2020년 12월 5일에 사망한 후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는 등 교단 내부의 분쟁이 터져 감소세는 더욱 가파른 상태. 교단의 기관지마저 휴간할 정도로 교단 상태가 심히 나쁜지라 폐교도 심각하게 고려해야할 처지라고.
- 24년 현재 일본프로야구 감독 3명이 PL학원출신이다.[6]
4. 동문
야구부 외에도 다른 스포츠부도 엄청 유명하여 PL출신 유명 운동선수들이 정말로 많다.- 아라이 히로마사
- 쿠와타 마스미
- 코쿠보 테츠야
- 키요하라 카즈히로
- 타츠나미 카즈요시
- 미야모토 신야
- 마츠이 카즈오
- 카타오카 아츠시
- 오오무라 사부로
- 후쿠도메 코스케
- 타나카 마사히코
- 타츠나미 카즈요시
- 이마에 토시아키
- 이마오카 마코토
- 사쿠라이 코다이
- 마에다 켄타
- 나카가와 케이타
[1]
야구부원들의 행실이 문제라면 얼마든지 개선할 방법이 있을텐데, 야구부 존속을 바라는 내외부의 간청에도 아랑곳 없이 야구부가 해체되는 모습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교단의 태도 때문에 야구부가 일으킨 각종 사건사고는 야구부를 해체하기 위한 구실이고 사실은 교단 내부의 정치적 다툼에 야구부가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2]
나카가와 본인은 스스로를 최후의 PL 출신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자신이 프로 생활을 청산했을때 PL 학원 야구부가 다시 활동을 재개한다면 모교의 감독을 하고싶다는 소망을 내비치기도 했다.
[3]
나카가와 케이타가 PL학원고교의 마지막 야구부원은 아니다. 현재 독립 리그 니가타의 굴라쟈니 네이선(1997년생이며 인도 혼혈이라 이름이 외국인스럽다.)처럼 NPB를 목표로 하는 나카가와의 후배 기수들이 아직 있다. 일본 위키를 찾아보면 1998년생들이 최후의 PL 야구부 기수라는 듯.
[4]
정작 해당 경기는 PL학원이 졌다(...). PL학원은 징계를 먹어서 2년간 대외 경기 참여가 금지당했기 때문에
니시오카 츠요시가 진학한 토인고교와의 맞대결이 많지는 않았지만 니시오카가 재학하던 시절에는 전패를 당했다.
[5]
여기 해당하는 프로야구 선수 중에 스타플레이어는
이마에 토시아키 정도밖에 없다. 그나마 코사이 유스케, 사쿠라이 코다이, 아사이 유스케가 1군 물을 좀 먹어봤으나 만년백업 혹은 1-2년 플루크로 잘 한게 끝이었으니 그때 니시오카를 비웃었던 PL학원 선수들 중 니시오카만큼 성공했다고 비벼볼 만한 선수조차도 이마에 한 명 뿐이다. 그나마도 니시오카랑 다르게 메이저는 꿈도 꾸지 못했고.(대신 누적성적은 통산 1600안타와 100홈런을 기록한 이마에가 확실히 낫다. 니시오카는 메이저를 합쳐도 1200안타를 겨우 넘겼으니)
[6]
이마에 토시아키,
마쓰이 카즈오,
타츠나미 카즈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