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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틀: 대한민국 군의 특수첩보부대 |
모조리 죽여라,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clearfix]1. 개요
해병대 첩보부대(Marine Intelligence Unit, MIU[1]), 통칭 '마니산 까치부대'는 1.21 사태 이후 대북응징보복을 목적으로 창설된 해병대 내의 북파공작부대였다. 1973년에 해병대가 사령부 해체로 인해 해군과 강제로 통합된 시절엔 'UDU 제3부대'라는 명칭을 썼다. 해체된 뒤에는 훗날 '812 망치부대'라는 이름으로 다시 창설됐다.2. 창설과 해체
1968년, 북한 공비들이 청와대 코앞까지 뚫고 들어오는 1.21사건이 벌어지자 한국의 수뇌부는 분노했다. 이에 대한 응징보복을 위해 중앙정보부장[2]은 대한민국 국군에게 대북 응징보복부대를 만들 것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육해공군은 각기 응징보복부대들을 긴급하게 창설했고, 해병대 또한 까치부대라는 응징보복부대를 만들게 되었다.영화 실미도로도 유명한 "실미도 부대"( 684부대)는 공군 첩보부대(AISU) 소속이었고, "선갑도 부대"는 육군 첩보부대(HID) 소속, "장봉도 부대"는 해군 첩보부대(UDU) 소속, 그리고 "812 망치부대"와 "마니산 까치부대" 해병대 산하의 첩보부대였다.
김신조 부대에 대한 대응으로 만든 부대들만큼, 각 부대들의 인원도 김신조 부대와 똑같이 각각 31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북한 깊숙히 침투하는 응징보복부대였고, 퇴출 수단과 작계가 없었던만큼 실제 투입된다면 실질적으로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별로 없었다.
작전을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나, 당초 1968년 후반기로 예정되어 있던 작전투입 계획이 갑자기 취소됐고, 그 뒤로도 이 작전이 잠정 연기된 건지 완전히 취소된 건지 아무런 지시도 상부로부터 못받고 그저 시간만 흘러갔다.
이후 감정적인 상호 보복보다는 남북대화와 화해 쪽으로 가야한다는 대북정책으로 기류가 완전히 바뀌면서, MIU를 비롯한 응징보복부대들[3]은 사실상 버려져 방치된채 군 수뇌부로부터 점점 잊혀져갔다. 아무 기약없이 몇 년째 계속 대기만 하고 있는 상태에서 기본적인 지원도 점점 줄어들갔고, 특히 현역 군인들로 이루어졌던 MIU의 경우는 시간이 갈수록 전역해 나가는 인원은 계속 늘어가는데 이를 매꿀 새로운 대원을 충당하진 않아서 부대 인원도 점점 줄어만 갔다.
이젠 뚜렷한 존재 목적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그저 내팽겨쳐진 신세처럼 되자 이들 부대원들은 불만이 쌓여만 갔고, 결국은 스트레스와 분노가 폭발하여 공군 684부대원들이 실미도를 탈출하여 민간버스를 탈취한 뒤 청와대로 돌진하다가 군과 경찰에게 저지되자 자폭하는 일명 실미도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실미도부대는 당연히 바로 해체됐고 1974년엔 선갑도부대와 장봉도부대도 차례로 해체되었다. 인원이 몇 안 남아있던 MIU 역시 형식적으로 잠시 존속하다가 1975년에 결국 완전히 해체되었다. 해체 이후 MIU에 속해있던 병력들은 다시 해병대의 각 여러 부대들로 돌아갔고, 일부는 해군 UDU에 배속되기도 하였으며, 남아있던 잔류 인원들이 해병대 제2사단 수색대의 창설 멤버가 되었다.
2.1. 812망치부대
1980년대 이후 북한의 각종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해병북파공작대를 재창설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MIU의 후신격인 812망치부대다. 상륙공작대 자체가 응징보복부대 성격이었던만큼 그 후신답게 자살특공대식의 무모한 임무를 맡았다. 까치부대와 마찬가지로 해병대 내에서 우수 자원들을 선발하여 약 2년간 훈련시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