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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홍학원(洪學元) |
출생 | 1904년 8월 15일 |
평안북도
의주군 주내면 어적동 (현 평안북도 의주군 어적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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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4년 5월 18일 |
평양형무소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
서훈 |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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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일제 당국이 작성한 '홍학순 심문기록'에 따르면, 홍학순은 1904년 8월 15일 평안북도 의주군 주내면 어적동(현 의주군 어적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가족이나 집안 내력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며, 초년기의 행적 역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1919년 3월 28일부터 주내면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주내면을 포함한 의주군에서의 3.1 운동 시위 횟수는 총합 38회였으며 참가 연인원은 6만 여명이었고, 사망자는 31명, 부상자 350명, 체포자 1385명에 달했다고 한다.홍학순은 3.1 운동 이후 중국 요녕성 관전현 안평하로 이주했다. 그는 1924년 2월 남만주의 독립운동조직인 대한통의부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처음에는 군자금 모집의 명령을 받고 총기를 휴대하고 여러 차례 국내로 진입해 압록강 하류 일대에서 부호들을 습격해 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했다.
통의부가 의병계열인 복벽계 인사들과 공화주의계 인사들 사이의 내분으로 세력이 약화되던 1924년 11월 남만주 화전현에서 정의부가 성립되자, 홍학순은 정의부 산하 독립군인 의용군에 가담하여 의용군 제5중대 참사(參士)로 부임했다. 그는 1927년 7월 정의부 제5중대장 김석하(金錫河)의 지시를 받고 이진무(李振武), 김봉수(金奉秀), 김치복(金致福), 이원진(李元珍), 장기천(張基千) 등과 함께 국내에 진입해 평북 구성군 조악(造岳)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 오모다메(重爲好)를 사살했다. 또한 부하 3명을 데리고 의주 읍내 금융조합을 습격해 900여 원을 군자금으로 노획했다.
이어 8월 21일에는 동지 장기천과 김봉수 등으로 하여금 식산은행 의주지점을 습격했으며, 자신은 동지 이원진(李元珍)과 함께 오후 2시경 용만 금융조합을 습격해 983원을 탈취했다. 마침 이 날은 용만 지역의 장날로,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러시아인 등 수천 명이 있었다. 홍삭순은 장터에 나아가 군중에게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해 온 시장이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1928년 9월 1일, 홍학순은 정의부 2중대원 이원과 함께 요녕성 토성자에 거주하는 일제의 밀정 최상진(崔相鎭)을 사살했다. 그리고 1929년 4월에서 9월 사이에 정의부, 참의부와 신민부가 통합한 국민부에 조선혁명군 대원으로 참여했다. 1929년 9월 9일, 홍학순은 국민부 간부의 지시에 따라 관덕(金寬德), 정봉화(鄭鳳和) 등과 함께 평북 삭주군 구곡면 신안동에 있는 신연금산사무소를 습격했다. 그 결과 청화금(靑化金) 690돈[1]을 빼앗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금덩어리들은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의 활동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홍학순은 이진무가 주도하는 조선인독립군 부대에 가담했고 동지들과 함께 평안도 북부 일대에서 약 4,400명의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일본 경찰과 4차례의 총격전을 벌여 일본 경찰 5명을 사살했다. 특히 평북의 삭주와 용천 일대에서 경관 20여 명과 두 차례에 걸쳐 3~4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일제 경찰의 취조 기관에 따르면, 그는 일본에 부역한 한인과 일제의 관헌을 4차례 처단했다고 한다.
일제측 기록에 따르면, 홍학순은 1930년 2월 이진무, 안국형, 박인홍, 황세일, 최영걸, 김광도, 조원국 등과 함께 국민부와 별개의 단체로 '노농자위군'을 조직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국민부 일부 간부들이 교민들에게 징수한 자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하자 이에 크게 분노해 김석홍, 이해산, 김응기, 안국형, 김태묵 등과 함께 국민부 간부들을 응징하려 했지만 도중에 그만두고 국민부와 별도의 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후 1930년 4월에는 '조선인 독립군'으로 개명했고, 이진무를 대장으로 추대했다.
1931년경, 홍학순은 이진무 등 동료들과 함께 남만주와 평안북도의 국경을 왕래하며 일제 경찰과 6차례 교전했고 평북 삭주와 구성 등지의 금광과 부호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러나 친일 밀정 김삼산(金三山)이 이진무, 홍학순 일당의 근거지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홍학순은 1932년 1월 10일 동지 이진무, 이삼현, 김태묵, 윤하운 등과 함께 안동현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홍학순은 동지들과 함께 1932년 1월 17일 안동현 공서에서 신의주경찰서로 인도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신의주지방법원에 회부되어 1933년 6월 26일 이진무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 동지 안국형은 무기징역, 김태묵과 박인홍은 징역 12년, 이삼현은 징역 7년, 윤하운은 4년, 이월로는 2년형을 받았다.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평양복심법원에 항소했지만 1934년 1월 31일에 역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34년 5월 18일 평양형무소에서 이진무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30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홍학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시가 2,3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