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덕표(德表) |
본관 | 부림 홍씨(缶林)[1] |
출생 | 1886년[2] |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1010)[3] |
|
사망 | 1930년[4] |
경상북도 군위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홍종락은 1886년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에서 아버지 홍용재(洪龍在, 1849 ~ 1898)와 어머니 청주 한씨(1855 ~ 1939)[5]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1920년 말, 흥업단(興業團)의 이만준(李萬俊)이 봉천성 환인현(桓仁縣)[6] 한교공회(韓僑公會)의 김인제(金仁濟)·최성기(崔聖基)· 황문익을 데리고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했다. 이때 그는 양한위(梁漢緯), 권충락(權忠洛) 등과 함께 이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집 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 정식으로 흥업단에 가담한 그는 흥업단에서 경영하는 백산학교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이리하여 그해 1월 4일 김종만(金鍾萬)· 박재화(朴在華)·박수의(朴守義) 등과 함께 달성군에 거주하고 있는 최임교(崔任敎)에게 군자금 240원을 모집하는 한편, 영천군(永川郡)· 봉화군 등지에서 활동을 계속하다 같은 해 5월 체포되었다.
1922년 11월 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7년형이 확정되었고, 1923년 1월 15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강도·상해 및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불가 처분을 받아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30년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홍종락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대율파-종(宗)파 25세 종(鍾) 항렬.
[2]
부림홍씨세보 상권 대율파 297쪽에는 1887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3]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부계면 '매경리'가 본적으로 되어 있고,
1923년 형사사건부에는 부계면 '월매동'이 본적으로 기재되어 있어 기록이 상이한데, 이렇든 저렇든 매경리와 월매리는 현재 부계면에 존재하지 않는 행정구역이며 군위군 내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부림 홍씨 집성촌이면서 부계면과 가까운 곳에 효령면 매곡리가 있긴 하나 이 곳이 홍종락의 출생지인지는 확실치 않다.
[4]
부림홍씨세보 상권 대율파 297쪽에는 1939년 2월 15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5]
한을룡(韓乙龍)의 딸이다.
[6]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번시시 환런만주족자치현(桓仁滿族自治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