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호르헤 “쿠초이” 사르미엔토 (Jorge "Koochoi" Sarmiento) |
생년월일 | 1900년 11월 2일 |
사망년월일[1] | 1957년 2월 20일 |
국적 | 페루 |
출신지 | 리마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신체조건 | 불명 |
등번호 | -[2] |
소속팀 |
스포르트 호세 갈베스(1916-1917) 알리안사 리마(1918-1934) 데포르티보 무니시팔(1935-1936) |
국가대표[3] | 2경기 1골(1927) |
감독 | 알리안사 리마(1935-1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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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루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알리안사 리마 감독을 맡았다.2. 생애
2.1. 어린 시절
그는 1900년 리마의 푸노 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국계로 부유한 제빵사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아버지는 호르헤가 2살 때 돌아가셨고 과달루페 대학의 부속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16년 스포르트 호세 갈베스 클럽에 들어간 사르미엔토는 말년에 데포르티보에서 잠시 뛴 것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클럽 생활을 이곳에서 보냈다.2.2. 선수 생활
알리안사 리마는 초기 페루 리그에서 그야말로 최종 보스였다. 3년 반 동안 무패행진을 지속했었고 26연승을 거두기도 했다. 1931년에는 경기당 득점이 4.8에 육박하는 말 그대로 깡패팀이었다. 그리고 사르미엔토는 검은 롤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알리안사 리마의 확실한 에이스였다. 그래서 종종 페루 밖의 팀과 붙을 때에는 알리안사 리마가 시합을 나가곤 했다.1927년이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는데, 페루 대표팀이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나간 것이다.[4] 하지만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벽은 높았다. 2경기에서 모두 4점차로 대패했다. 그나마 볼리비아를 잡은 것이 위안이었다. 또한 알리안사 리마가 중앙 아메리카와 멕시코로 투어를 갔을 때 사르미엔토는 팀 내 득점왕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1929년에는 잘 나가다가 팀이 쪼개져서 알리안사 리마 소속으로는 뛰지 못했지만 다른 팀에서 기량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30년 월드컵에 참가하긴 했지만 피치를 밟지는 못했다.
1931년과 33년 사이에는 전설적인 알리안사 리마의 기록을 만들기도 하였고 1935년에는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서 데포르티보 무니시팔에서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무니시팔은 1부 리그에 올라가기도 했다.
2.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운전기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비장의 이상으로 고통 받았는데, 프로카인의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3. 플레이 스타일&평가
사르미엔토는 초기 페루 축구의 최고 스타였다. 그는 축구 지능이 좋았고, 양발잡이였으며 정확하고 기술적인 슈팅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두꺼운 체형이었으며 성격적으로는 신사적인 매너와 카리스마까지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4. 뒷이야기
- 그의 이름에서는 의외로 아버지의 성이 전해지지 않는다. 사르미엔토는 어머니의 성이고 쿠초이는 그의 별명이다.
- 사르미엔토의 8회 우승 기록은 역대 페루 리거 중 최다 우승 기록이다.
5. 수상
5.1. 클럽
- 페루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8회: 1916(스포르트 호세 갈베스), 1918, 1919, 1927, 1928, 1931, 1932, 1933(이상 알리안사 리마)
- 페루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2회: 1917, 1930( 알리안사 리마)
5.2. 감독
- 페루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1회: 1935( 알리안사 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