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2-07-10 11:12:53

혜공

신라십성
新羅十聖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아도 이차돈 혜숙 안함 의상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
}}}}}}}}} ||


惠空

1. 개요2. 생애

1. 개요

신라의 승려.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원효와 거의 같은 시대인 7세기의 인물이다.

2. 생애

천진공(天眞公)이라는 귀족의 집에서 품팔이하는 노파의 아들로 어렸을 때의 이름은 우조였으며, 천진공의 를 맡아 기르는 일을 했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 주인인 천진공이 악성 종기 때문에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문병하러 오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제가 낫게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어머니에게 말했는데, 어머니는 실없는 소리로 웃어넘기면서도 이를 천진공에게 고했고, 천진공이 속는 셈 치고 불러오게 했더니 우조는 침상 밑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고, 얼마 안 가서 종기가 터지고 아프던 것이 나았다.

이 때까지도 천진공은 우연이겠거니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천진공의 동생이 지방으로 가면서 형이 기르던 매 가운데 한 마리를 받아 가지고 떠난 날 저녁, 천진공의 마음이 바뀌어서 매를 도로 찾아올 생각을 했다. 그런데 천진공이 이를 생각만 하고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는데 우조는 어떻게 알고 지방으로 내려간 천진공의 동생을 찾아가서 매를 가져다 바로 다음날 새벽에 천진공에게 바쳤고, 천진공은 그제서야 우조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제가 멍청해서 성인께서 우리 집에 있는데 몰라뵙고 함부로 종으로 부리고 있었습니다"라며 빌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뒤에 우조는 승려로써 출가하게 되었다.

혜공은 늘 작은 절에 있으면서 술에 취해 살면서 거리에서 삼태기 지고 춤을 추었고, 원효의 프로토타입 사람들은 혜공을 두고 '부궤화상', 그가 머무르는 절을 '부개사(夫蓋寺)'라고 불렀다. 삼국유사에는 부궤, 부개 모두 우리말로 '삼태기'라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풀이하면 '삼태기 스님' 또는 '삼태기 절' 정도. 또 가끔 부개사 우물 속에 들어 가서 몇 달간 나오지 않는 일도 있었는데 혜공이 우물에서 나올 때는 옷이 조금도 젖지 않았으며, 나오기 전에는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먼저 나왔기 때문에 부개사 승려들이 이를 보고 혜공이 곧 나오겠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고.[1]

장난기도 다분히 많았던 모양인지, 구참공이[2] 산에 놀러 갔다가 혜공의 시체가 거의 다 썩어 구더기가 끓는 채로 산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슬퍼하다가 산에서 내려왔는데, 성으로 돌아와 보니 산에서 죽어 쓰러져 있어야 할 혜공이 취해서 저자에서 춤추고 있더라고. 또 명랑이 금강사를 짓고 낙성법회를 열 때 고승들이 다 모였지만 혜공만 보이지 않았는데, 명랑이 향을 피우고 경건하게 기도하자 조금 뒤 혜공이 나타났다. 그 날 비가 크게 내렸는데 옷이 젖거나 발에 진흙이 묻지도 않고, 명랑에게 "초청이 간절해서 이렇게 왔소"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라고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당대의 고승인 원효와도 교분이 있었는데, 특히 승려이면서도 저자에서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다녔다는 행적을 보면 원효가 혜공에게서 일정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늘그막에 항사사라는 절에서 머물렀는데 원효가 여러 불경의 소(해석집)을 쓰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혜공을 찾아가 묻곤 했다고 한다. 절 앞의 시냇가에서 두 사람이 물고기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똥을 누었는데, 혜공이 원효에게 "네가 눈 똥은 내 물고기다(汝屍吾魚)"[3]라고 했다는 데서 항사사의 이름이 오어사(吾魚寺)로 바뀌었다고. 오어사는 지금도 포항시에 남아 있다.

한번은 영묘사에 새끼줄을 갖고 들어 가서 금당과 좌우 경루, 남문 곳곳에 줄을 치고는 이 줄은 사흘 뒤에 풀어라고 명하고 갔는데, 마침 사흘 뒤에 영묘사에 선덕여왕이 행차하기로 되어 있었다. 선덕여왕을 짝사랑했던 지귀의 심화(心火)로 영묘사에 불이 나서 탑까지 다 타버렸는데, 앞서 혜공이 새끼줄을 쳐둔 곳만 불에 타지 않았다고.[4] 심화요탑 참조. 생전에 후진의 승려 승조(僧肇)[5]가 지은 <조론>을 보고 "이거 전생에 내가 지은 거야"라고 대답했었다고 한다.

혜공이 입적할 때는 허공에 뜬 채로 입적했으며, 많은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1]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따라 다녔다는 일화는 훗날 조선 시대의 신숙주에게서도 똑같이 찾아볼 수 있다. [2] 이 사람은 혜숙과 관련해서도 혜숙에게 능욕(...)당했다고 삼국유사에 나온다. [3] "너는 똥을 누었고 나는 물고기를 누었지"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서는 김상현 동국대 교수의 해석이 있다. # [4] 원래 영묘사가 불이 좀 잘 나는 절이기도 했다. [5] 후진의 학승(384~414)으로 스승이 유명한 쿠마라지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