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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00:12:28

형미

형미대사에서 넘어옴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逈微
864년~917년

후삼국시대 승려. 시호는 선각대사(先覺大師)이다.

형미는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 862~930)[1],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 870~936)[2], 법경대사(法鏡大師) 경유(慶猷, 871~921)[3]와 함께 후삼국시대의 4대 선승(禪僧)이다.[4] 이들은 모두 당나라 조동종(曹洞宗)의 승려인 운거산(雲居山)의 도응(道膺, 846~902년)을 사사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형미대사는 나머지 셋의 사형이다.

2. 생애

864년 무주(武州)에서 태어났으며 15살 나이에 장흥(長興) 가지산(迦智山)[5] 보림사(寶林寺)에서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 804~880)의 제자로 출가했다. 이후 구례(求禮) 지리산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보조선사의 제자로 지내다가 보조선사가 세상을 떠난 뒤 당나라로 유학해 불법을 배우고 905년 귀국하여 강진(康津) 월출산 무위사(無爲寺)의 주지가 되었다. 어떤 계기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나주를 통해 입국했다.

그러다 917년 궁예에 의해 처형되는데 왕건의 역성혁명이 있기 불과 1년 전 시점. 왕건은 즉위 직후부터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여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시신은 왕건이 즉위한 직후인 919년 3월에 수습되어 개경 오관산(五冠山)에 이장되었다. 이후 왕사로 추증되고 921년 시호가 붙었으며 선각대사 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를 세워 그를 기렸는데 탑비는 태조가 죽고 난 뒤인 혜종 최언위의 비문으로 새겨졌으며 정종 대에 무위사에 안치되었다.

선각대사가 궁예에게 처형당한 이유에 대해 선각대사탑비의 내용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비석에 따르면 선각대사는 '대왕'이 912년의 나주 공방전 때 무위사를 방문해서 만났고 '대왕'의 권유로 함께 철원으로 올라갔다고 전한다. 만약 '대왕'을 912년 당시에 왕이었던 궁예라고 해석한다면[6] 미륵 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궁예가 형미대사를 직접 태봉의 수도인 철원으로 데리고 갔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당시 호족 세력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선종 불교를 포용하려는 의도였다는 해석이 있다. 다만 해당 비문에서 궁예는 이미 '전주'라 표현되어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에 궁예를 돌연 '대왕'이라고 칭할 개연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은 사실. 반면 '대왕'을 이 비석을 만들 때 왕이었던 왕건이라고 해석한다면 선각대사는 왕건의 권유로 그를 따라갔다가 궁예의 미움을 사 변을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궁예가 왜 형미대사를 처형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학자들은 단순히 미륵불 신앙 때문이 아니라 결국 정치적 갈등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며 궁예는 왕건을 견제하기 위해 형미대사의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러나 형미대사가 석총처럼 궁예의 미륵불 신앙을 비판했기 때문에 처형되었을 것이라는 다른 해석도 있다. 사실 석총에게 인지도는 밀리지만 궁예에 의해 사망한 승려 가운데 가장 고위직인 승려였다.

2023년 하일식 연세대 교수가 새롭게 해석한 선각대사비 탁본에는 좀 더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해석됐다. #

3. 대중매체에서



[1] 성주산파(聖住山派)의 일원으로 경순왕의 스승으로 있다가 말년에 왕건의 후원으로 지평(砥平) 용문산(龍門山) 보리사(菩提寺)에 정착하였다. [2] 수미산파(須彌山派)의 개조로 해주(海州) 수미산(須彌山) 광조사(廣照寺)에서 가르침을 폈다. [3] 왕건에 의해 충주(忠州) 개천산(開天山) 정토사(淨土寺)에서 수도했다. [4] 이들을 해동 4무외대사(海東 四無畏大師)라 한다. [5] 나말여초의 선종 9산, 그 가운데서도 첫 산문으로 일컬어지는 가지산파(迦智山派)의 본산이다. [6] 이 해석은 다른 의미로도 중요한데 나주 공방전에서 궁예가 친정을 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 [7]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과 2014년 KBS 드라마 < 정도전>에서 무학대사 역. [8] 아무리 한 나라의 지도자가 무능하거나 인격이 개차반이어도 뒤에서 이런 식으로 막 나가는 표현을 쓰는 경우는 드문데, 형미대사가 대놓고 이런 수위가 높은 표현을 썼다는 데서 궁예가 얼마나 막가파 타락해버리면서 대중들의 신뢰를 잃어버렸는지를 대변해 주는 부분이다. [9] 물론 강비와 왕자들의 상여지만, 이후 자신을 체포한 은부에게 '태봉의 상여'였다고 고한다. [10] 사월 초파일은 동아시아 모든 불교권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축하하는 축일인데, 불교계의 생일과도 같은 이런 영광스런 날에 승려를 처형하자는 소리를 한 것부터가 궁예가 맛이 가도 단단히 갔음을 알 수 있다. [11] 처형장에는 그를 비롯한 사무외대사가 모두 모여 염불을 외며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였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백성들은 관세음보살을 외치면서 숙연해했다. 심지어 후백제의 첩자 도우까지 "나도 불자로서 저런 고승의 죽음을 보는 건 안타깝다"면서 그의 명복을 빌 정도였다. 형미의 제자들은 종간이 몰래 풀어주라고 지시를 내려 운좋게 목숨을 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