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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0:31:03

현악 5중주(브루크너)

정식 명칭: 현악 5중주 F장조
(Streichquintett F-dur/String Quintet in F major)
비엔나 필하모니아 4중주단, 제2비올라 헬무트 바이스 연주. 전곡 연주. 1974년 4월 녹음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 연주. 3악장 편곡 연주. 1998년 9월 녹음.[1]

1. 개요2. 곡의 형태3. 초연과 출판4. 스케르초 대체용 인테르메초

1. 개요

안톤 브루크너가 남긴 실내악 작품은 대단히 적은 편인데, 그나마 두 곡 빼고는 오토 키츨러에게 음악형식론과 관현악 편곡법을 배우던 시기의 습작들이라 거론할 가치가 적은 편이다. 하지만 이 곡만큼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아예 베토벤 이후 19세기 실내악의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

작곡 시기는 1878년 12월부터 1879년 7월 12일까지였는데, 브루크너가 교향곡 제3번 초연의 대실패로 낙심했던 상태에서 간신히 벗어나 쓴 첫 곡이기도 하다. 하지만 후속작이 교향곡이 아니라 실내악이었다는 점에서, 브루크너가 입은 상처가 대단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브루크너가 1861년에 빈에서 최종적으로 치렀던 교원 임용시험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가 오히려 브루크너의 실력에 감동받은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헬메스베르거[2]의 의뢰로 작곡했는데, 헬메스베르거는 자기가 의뢰해 놓고서 완성된 악보가 나오자 연주하기 어렵다는 둥 별의별 핑계를 대가면서 거절했다.[3]

헬메스베르거가 특히 어렵다고 한 2악장 스케르초를 대신할 목적으로 좀 더 쉽고 통속적인 인테르메초까지 써줬지만[4], 그래도 여전한 헬메스베르거의 옹졸함을 참지 못한 브루크너의 제자들이 대신 초연 무대를 마련해 공연했던 아픈 역사가 있다.

2. 곡의 형태

교향곡들과 마찬가지로 고전적인 4악장 형식인데, 2번 교향곡의 미개정판처럼 스케르초를 2악장에 놓고 느린 악장을 3악장에 놓는 도치 형태가 되어 있다. 곡의 규모는 작곡 전후 나온 교향곡들보다는 다소 작은 편이지만, 전체적인 응집력이나 완성도 측면에서는 어느 교향곡들 못지 않은 걸작으로 꼽힌다. 특히 3악장은 브루크너의 느린 악장을 넘어 전체 클래식 음악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악장으로 꼽힌다. 왜 저런 명곡이 대중화되지 않는 건지 미스터리할 지경일 정도다.

편성은 일반적인 현악 4중주 스펙(제1 바이올린/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에 비올라 하나를 더한 것인데, 모차르트 브람스가 작곡한 현악 5중주와 동일한 편성이기도 하다. 실내악 치고는 꽤 짙은 음색과 꽉찬 밀도를 자랑하는데, 브루크너 교향곡에서 흔히 나타나는 '브루크너 시퀀스' 나 '브루크너 휴지' 같은 기법도 자주 눈에 띈다. 다만 1악장은 브루크너 교향곡 도입부에 있어 특징적인 현의 트레몰로 없이 곧바로 3박자 주제가 나타나며 시작한다.

이런 점에서 '교향곡스러운' 모습과 '실내악이라는' 모습 중 어느 것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평가가 꽤 달라지는 곡이기도 한데, 실내악에 중점을 두는 쪽에서는 교향곡처럼 음량으로 밀어붙이는 클라이맥스가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실내악의 한계 내에서 쓴 곡이고, 느린 3악장에서는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의 그것과 비견될 만한 심오한 표현을 성취한 것을 내세우곤 한다.[5]

헬메스베르거가 초연을 머뭇거린 '연주의 어려움'도 이 곡의 난점으로 지적되는데, 특히 2악장 스케르초의 경우 완벽한 팀워크와 기교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상당히 어설픈 연주가 나온다는 점에서 어려운 대목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교향곡과 실내악의 어법이 혼재하는 상황을 얼마만큼 조리있게 다룰 수 있는지 시험받는 곡이라서, 중요성과 평가에 비해 공연 횟수나 음반 개수는 의외로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은 실정이다.

3. 초연과 출판

개요에서 언급했듯이, 헬메스베르거가 써달라고 해놓고는 계속 거절하는 모습을 보다못한 브루크너의 제자들이 1881년 11월 17일에 빈에서 따로 초연 무대를 마련해야 했다.[6] 하지만 공개 연주가 아닌 빈 바그너 협회의 회원들을 위한 비공개 연주였고, 무엇보다 1~3악장만이 연주되고 피날레가 빠졌기 때문에 완전한 초연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4악장이 빠진 상태로 초연된 것에 대해서는 악보가 빈에 없었다거나 하는 등의 이견이 분분했는데, 1980년대에 새로 이루어진 조사와 연구에 따르면 브루크너가 초연 시점에서도 악보를 갖고 있었음이 판명되었다. 하지만 왜 뺐는지에 대해서는 연주가 어려워서 그랬다는 의견과 청중들의 반응을 두려워해서, 아니면 리허설에서 들었더니 다시 개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라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청중들의 반응은 의외로 매우 호의적이었는데, 특히 3악장 아다지오에 대해서는 브루크너에 대해 거침없는 악평을 쏟아댔던 반바그네리안들 마저도 나름대로 가치를 인정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위촉자인 헬메스베르거가 여태껏 연주할 기미가 없는 것을 혹평하는 이들이 늘었고, 결국 헬메스베르거도 자신의 4중주단과 제2비올라 주자 막스 무스터만(Max Mustermann)을 이끌고 1885년 1월 8일에 4악장을 포함해 빈에서 완전한 형태로 초연했다. 이때 헬메스베르거는 원곡과는 달리 스케르초[7]를 3악장에, 아다지오를 2악장에 놓아 도치시킨 형태로 연주했다.

이 연주 9일 전에 7번 교향곡이 교향곡으로서는 첫 성공을 거둔 상황에서 이 공연은 크게 호평받았고, 예순이 넘은 노작곡가 브루크너에게 다시 한 번 큰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생전에 브루크너의 현악 5중주는 총 23번 연주되었다고 한다.

1884년에 빈의 음악출판사인 알베르트 구트만에서 브루크너의 제자인 요제프 샬크가 교정한 원곡의 총보가 출판되었고, 이때 요제프가 편곡한 피아노 연탄용 악보도 같이 출판되었다.[8] 1885년에는 개별 주자들을 위한 연주회용 파트보가 별도로 출판되었다. 이후 1963년과 2007년에 국제 브루크너 협회는 각각 레오폴트 노바크와 게롤트 그루버의 편집으로 현악 5중주의 악보를 간행했는데, 노바크판과 그루버판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없고, 그루버판은 노바크판의 사소한 오식을 바로잡는 선에서 편집이 이뤄졌다.

이외에 3악장 아다지오를 요제프 샬크가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한 악보도 1886년에 구트만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초판과 노바크/그루버판 사이의 차이점은 별로 많지 않은데, 다만 초판의 경우 브루크너의 지시가 아닌 메트로놈 속도 기호가 붙어 있다(각 악장별로 4분음표 기준 72, 138, 56, 144bpm). 누가 붙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지금도 이 곡을 연주하는 실내악단들에서 참고하고 있다.

한편, 곡의 교향곡풍 특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원곡 편성에 콘트라베이스까지 더하고 각 파트 별 주자들을 여러 명으로 배치하는 대규모 현악 합주 편성으로 확대 편곡하는 사례도 종종 있다. 다만 3악장만을 편곡, 연주하는 경우가 많고, 루돌프 바움가르트너와 제임스 드류, 카네코 켄지, 프리츠 외저[9], 노구치 타케오와 스타니수아프 스크로바체프스키의 편곡판이 있다. 전곡은 한스 슈타들마이어와 로버트 라이커, 게르트 샬러[10]가 편곡한 것이 존재한다. 물론 국제 브루크너 협회에서는 이런 제3자에 의한 편곡판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실내악 관점을 높이 사는 쪽에서는 곡의 정밀함을 떨어뜨린다며 비판하고 있다.

4. 스케르초 대체용 인테르메초

2악장 스케르초가 너무 어렵다며 계속되던 헬메스베르거의 불평으로 인해 브루크너가 대체하라고 써준 것이 인테르메초(간주곡) D단조(Intermezzo d-moll/D minor)였는데, 정작 두 차례의 초연 때는 스케르초가 그대로 쓰인 탓에 생전에는 연주되지도 못했다. 작곡 시기는 1879년 12월 21일 완성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12월 초부터 급히 쓴 것으로 추정된다.

악보는 브루크너의 제자인 요제프 샬크에게 주어졌지만, 샬크도 이 악보를 자기 생전에 발표하지 않았고, 1900년에 죽은 뒤 동생인 프란츠 샬크가 발견해 공표했다. 초연은 1904년 1월 23일에 빈에서 피츠너 4중주단에 의해 비공개로, 며칠 뒤인 2월 9일에 로제 4중주단의 연주로 공개 연주되었다(두 연주 모두 제2비올라 주자는 불명). 악보는 1913년에 우니베르잘 음악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1963년과 2007년에 현악 5중주와 마찬가지로 각각 레오폴트 노바크와 게롤트 그루버의 편집을 거쳐 브루크너 협회 공인판 현악 5중주 악보의 부록으로 첨부되어 출간되었다.

스케르초보다는 더 평이한 오스트리아 민속 춤곡인 렌틀러 스타일로 작곡되었고, 난이도도 더 쉬운 편이다. 하지만 많은 실내악단들이 스케르초의 어려움을 근성으로 극복하고 있는 이상, 이 인테르메초가 대체용으로 쓰일 일은 앞으로도 없을 듯하다. 그리고 스케르초처럼 별도의 중간부(트리오)는 작곡되지 않았고, 공연 때는 인테르메초-스케르초의 트리오-다시 인테르메초 순으로 연주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다.

실제로 브루크너 자필보의 마지막에도 'Trio' 라고 쓰여져 있어서, 스케르초 트리오를 삽입하라는 지시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현악 5중주와 같이 커플링하는 공연이나 음반의 경우, 그냥 인테르메초만 연주하는 경우도 많다.


[1] 브루크너의 자필 악보와 같이 듣기 [2] Joseph Hellmesberger, 1829~1893. 1849년에 자신의 성을 본뜬 헬메스베르거 사중주단을 만들어 리더격인 제1바이올린을 담당했으며, 1887년에는 헬메스베르거 사중주단의 제1바이올린 담당을 자신의 아들인 요제프 헬메스베르거 2세(Joseph Hellmesberger Jr, 1855~1907)에게 넘겨줬다. [3] 헬메스베르거가 내뺀 행동에 대해, 몇몇 학자들은 그가 브루크너의 음악 재능을 높이 평가했으면서도 시골뜨기라는 이미지를 감당하기 힘들었거나 혹은 조롱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심리학적 해석을 하기도 한다. [4] 그러나 후술하듯, 생전엔 연주되지 못했다. [5] 실제로 브루크너에게 별로 관심이 없던 프란츠 리스트도 3악장의 피아노 편곡만큼은 즐겨 연주했다고 한다. [6] 당시 연주자는 빙클러 4중주단이었고 제2비올라는 브루크너의 제자인 프란츠 샬크가 맡았다. [7] 브루크너가 대채용으로 쓴 인테르메초가 아닌, 연주하기 어렵다는 원본 스케르초로 연주했다. [8] 출판 후에 브루크너는 버릇처럼(?) 피날레 코다를 중심으로 이 곡을 약간 개정했다고 한다. [9] 상술한 아슈케나지의 녹음이 외저의 편곡을 사용했다. [10] 이쪽은 현악 오케스트라 버전이 아닌 2관 편성에 팀파니까지 갖춘 풀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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