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69953><colcolor=#000000>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부인 스웨덴의 헤드비그 소피아 Hedvig Sofia av Sverige |
|
|
|
이름 |
헤드비그 소피아 아우구스타 (Hedvig Sofia Augusta) |
출생 | 1681년 6월 26일 |
스웨덴 스톡홀름 트레 크레노르 | |
사망 | 1708년 12월 22일 (향년 27세) |
스웨덴 스톡홀름 | |
배우자 |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4세 (1698년 결혼 / 1702년 사망) |
자녀 | 카를 프리드리히 |
아버지 | 칼 11세 |
어머니 | 덴마크의 울리케 엘레오노레 |
형제 | 칼 12세, 울리카 엘레오노라 |
[clearfix]
1. 개요
스웨덴 칼 11세와 덴마크의 울리케 엘레오노레의 장녀. 동생으로 칼 12세와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있다.러시아 제국 표트르 3세의 할머니다.
2. 생애
1681년 6월 26일 스톡홀름에서 칼 11세의 장녀로 태어났다. 12살 때 어머니를 잃고 동생들과 함께 할머니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트비히 엘레오노라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활발하고 똑똑해 할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다방면에 능하고 특히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1698년 5월 12일, 16살의 나이에 사촌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4세와 결혼했다. 이는 덴마크를 견제하기 위한 동맹의 일환으로, 헤드비그 소피아가 어렸을 때부터 결정된 정략결혼이었다. 프리드리히 4세의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결혼 후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에서 살다가 1년 만에 부부는 스웨덴에 정착했다. 왕위에 오른 동생 칼 12세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헤드비그 소피아가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사교적인 헤드비그 소피아는 스웨덴 사교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700년 4월 30일 19살에 외아들인 카를 프리드리히를 출산했다.[1] 이름은 아버지 칼 11세와 남편 프리드리히 4세에게서 하나씩 따왔다.
1702년 10월 18일에 프리드리히 4세가 전사하면서 불과 21살의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헤드비그 소피아는 2살이라는 매우 어린 나이에 공작이 된 아들의 섭정을 맡게 되었다.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남동생 칼 12세가 말렸기에 공국의 통치는 관료들에게 맡기고 스웨덴에 계속 머물렀다. 스웨덴에서 그녀는 아들 카를 프리드리히를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1708년 12월 22일, 아픈[2] 아들을 돌보다 천연두가 옮은 헤드비그 소피아는 병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8살인 아들 카를 프리드리히는 부모를 잃은 증손주를 불쌍히 여긴 할머니 헤트비히 엘레오노라가 맡아 키웠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스웨덴의 헤드비그 소피아 (Hedvig Sophia of Sweden) |
<colbgcolor=#fff3e4,#331c00>
칼 11세 (Karl XI) |
<colbgcolor=#ffffe4,#323300>
칼 10세 구스타브 (Karl X Gustav) |
|
팔츠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궁정백 요한 카지미르 (John Casimir, Count Palatine of Zweibrücken-Kleeburg) |
|||
스웨덴의 카타리나 (Catharina of Sweden) |
|||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트비히 엘레오노라 (Hedvig Eleonora of Holstein-Gottorp) |
|||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3세 (Frederick III, Duke of Holstein-Gottorp) |
|||
작센의 마리 엘리자베트 (Marie Elisabeth of Saxony) |
|||
덴마크의 울리케 엘레오노레 (Ulrika Eleonora of Denmark) |
|||
프레데리크 3세 (Frederik III) |
|||
크리스티안 4세 (Christian IV) |
|||
브란덴부르크의 안나 카타리나 (Anne Catherine of Brandenburg) |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소피 아말리 (Sophie Amalie of Brunswick-Lüneburg) |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George, Duke of Brunswick-Lüneburg) |
|||
헤센다름슈타트의 안나 엘레오노레 (Anna Eleonore of Hesse-Darmstadt)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Charles Frederick, Duke of Holstein-Gottorp) |
1700년 4월 30일 | 1739년 6월 18일 |
러시아의 안나 페트로브나 여대공[3] 슬하 1남[4] |
외아들 카를 프리드리히는 어릴 때 부모인 본인과 남편을 잃어 외증조할머니 헤트비히 엘레오노라 아래에서 순 응석받이로 자랐다. 카를 프리드리히는 오만하고 책임감이 결여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 때문에 왕위는 헤드비그 소피아의 막내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차지하게 되었다. 자상하지만 엄격한 어머니였다는 헤드비그 소피아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아들의 육아에 성공해서 스웨덴 왕실의 계보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 이 때 카를 프리드리히가 스웨덴 왕이 되었다면 칼 13세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카를 프리드리히는 이모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기회를 엿봤지만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왕위를 남편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에게 넘기면서 스웨덴 왕위에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5] 스웨덴을 떠났다. 러시아의 힘을 빌어 스웨덴 왕위를 탈환하기 위해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 안나 페트로브나와 결혼했지만 스웨덴 왕위는커녕 덴마크가 공국을 점점 집어삼키면서 세력은 미약해졌고, 러시아 황위로 눈을 돌렸지만 안나 페트로브나가 훗날 표트르 3세가 되는 카를 페터 울리히를 낳자마자 20살에 죽어서 러시아 황제가 될 만한 든든한 지원세력을 잃었다. 결국 장인 표트르 1세의 사후 러시아 혼란상에서 어느 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이미 갖고 있던 공국의 영지를 잃은 체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대신 그 아들인 표트르 3세가 이모이자 카를 프리드리히의 처제인 옐리자베타 여제에 의해 후계자가 되어서 결국 차르가 되었다.
4. 여담
- 미인이지만 다지증이 있어 엄지손가락이 한개씩 더 있었다. 요령좋은 헤드비그 소피아는 이를 교묘하게 숨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
한살 아래의 동생인
칼 12세와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헤드비그 소피아가 이른 나이에 사망하자 칼 12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절망했고, 왕이
돈이 많이 드는장대한 장례식을 거행할까 걱정된 신하들은 칼 12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서둘러서 대충 장례를 치렀다.
[1]
카를 프리드리히가 2살 때 남편인 프리드리히 4세가 전사했으므로 둘째는 가질 수 없었고 자녀는 카를 프리드리히 하나뿐이다. 헤드비히 소피아가 27살에 병으로 요절했기에 설령 프리드리히 4세가 1702년 전사하지 않고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도 헤드비히 소피아가 둘째를 낳다가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
이 때문인지 카를 프리드리히는 1739년 불과 39세에 죽었다.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해도 적은 것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본인 모두 40살을 못 넘기거나 40살을 겨우 넘기고 죽었으니 유전적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3]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장녀이다.
[4]
표트르 3세
[5]
그래도 프레드리크 1세 이후엔 본인의 가문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이 칼 13세 때까지 스웨덴 왕을 배출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