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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 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청주 한씨[1] |
출생 | 1907년 9월 11일 |
함경남도
정평군 문산면 풍양리[2] (현 함경남도 정평군 풍양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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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3년 4월 8일 |
경기도
경성부 다옥정 창옥여관 (현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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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함경남도 정평군 풍양리 공동묘지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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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한복숙은 1907년 9월 11일 함경남도 정평군 문산면 풍양리(현 정평군 풍양리)에서 아버지 한국준(韓國俊, 1869 ~ ?)과 어머니 인동 장씨(1881 ~ ?) 장도원(張道元)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그는 1932년 12월 고향 정평군에서 정평농민조합(定平農民組合)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정평경찰서에 검거되었고, 같은 달 9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재정통산 180일)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고,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되어 2심 공판의 개정을 기다리던 도중, 위장병 증세가 심해져 1933년 4월 7일 오후 5시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4월 8일 오전 7시 경기도 경성부 다옥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 52번지에 있던 창옥(倉屋)여관에서 병사했다. 향년 27세. 그의 사후인 1933년 4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개정된 2심 공판에서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공무집행방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한복숙의 사망으로 공소권이 소멸되어, 최종적으로 공소가 기각되었다.
당시 유족으로는 늙은 부모와 한복연(韓復淵, 1910 ~ ?), 한복흥(韓復興, 1924 ~ ?) 등 남동생 2명, 어린 딸 한 명이 있었다고 한다.[3]를 입양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한복숙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