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基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27년 5월 26일에 출생했다.해방 이후 황해제철소 및 청진제철소에서 용광로 로장, 직장장으로 근무하면서 건국 초기 북한의 공업력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며, 이 때문에 김일성의 치하를 받았다 카더라. 6.25 전쟁 시기에 외국에 가서 공업 기술을 학습하였으며, 전후 김책제철소, 황해제철소 용광로 직장장, 용광로 건설사업소 소장을 역임하면서 전후 복구 사업에 참여했다. 김책제철소 제선공장장 재직 시절인 1955년 5월 1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56년 6월, 북한 정부대표단에 포함되어 소련 및 동유럽을 다녀왔으며 1961년 9월, 김책제철소 지배인에 임명되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은퇴 생활을 하였는지 고문지배인으로 지냈다고 조선대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1982년,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86년,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연이어 선출되더니, 1992년 4월, 원동구의 뒤를 이어 직총 중앙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92년 12월 10일, 조선로동당 6기 20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2월 11일, 최고인민회의 9기 4차 회의에서 원동구의 뒤를 이어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에 보선되었다. 1992년 7월, 방학세 장의위원, 1993년 1월, 리계백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런데 1993년 4월 13일 오후 3시에 65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한기창동지는 당과 수령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나라의 사회주의건설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쳤다. 동지는 다년간 인민경제의 중요기업소들에서 사업하면서 우리 당의 금속공업정책을 옹호관철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으며 근로단체의 책임적위치에서 로동계급을 당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 세우는데 공헌하였다. 한기창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우리 당에 끝없이 충실하였다."라고 그런대로 좋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부고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라고만 한 것을 보아서 죽기 직전에 병환으로 직책에서 물러났던 것으로 보인다. 후임 직총 중앙위원장에는 마찬가지로 북한 사회주의 경제 건설 시기에 활약한 노동자 출신인 주성일이 임명되었으며, 김일성과 김정일이 모두 화환을 보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직총 중앙위원회 위원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