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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1:08:43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쓰레기통 속 장미에서 넘어옴
1. 개요2. 상세

1. 개요

"Expecting democracy to bloom in Korea was like expecting a rose to bloom in a trash can."
1950년대 영국 언론에서 한국 정치를 비평한 유명한 문구.

2. 상세

대부분이 알고 있는 형태인 위의 문구와는 조금 다르게 1951년 10월 1일에 영국 더 타임스에 실린 War and Peace in Korea라는 기사[1]에서 6.25 전쟁의 결과 예측과 한국 평화의 가능성을 논하며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가 자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한국의 폐허에서 건강한 민주주의가 생겨나길 기대하는 것 보다 더 합리적이다"[2]라고 아래와 같이 평한 것이 발단이다.
파일:더타임스 1951년 10월 1일자 기사 캡쳐.png

이 문구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지 1955년 10월 유엔 한국 재건 위원회(UNKRA)에 참여한 벤가릴 메논 인도 의원이 전후 한국을 일주일 정도 시찰하고 후일담을 증언하며 “한국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라고 이 문구를 인용했고, 1960년 4.19 혁명,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에도 외신은 쓰레기통 속 장미에 빗대어 한국 소식을 전했다. #

1966년 미국의 언론인 출신 해외 홍보청장 칼 로완(Carl Rowan)은 6.3 항쟁 한일기본조약 등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가리켜 쓰레기통 속 장미를 언급하는 내용의 논평을 12월 14일자 이브닝 스타 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1968년 한국이 종합 제철소를 지으려 할 때에도 세계은행 아시아 지역 실무 담당자로 자문을 하러 온 영국인 존 자피(John Jaffe) 박사가 "한국이 종합 제철소를 짓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피우는 것과 같다."라고 하며[3] 한국의 종합 제철소 건설이 경제성이 없다는 평의 보고서를 작성하였다.[4]

1987년, 6월 항쟁 시기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6.29 선언을 보도하며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 속에서 빛난다."[5]라는 표현을 집어넣기도 했다. "쓰레기통"에서 민주주의를 향해 끝까지 몸부림친 국민의 의지가 마침내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아름다운 장미를 피워낸 기적이 된 셈이다.

노태우 정부에서 문민정부를 거친 이후 한국은 세계의 자유, 민주주의지수, 언론자유지수에서 아시아 국가 중 5위권 안에 들어서는 명백한 민주주의 국가로 자리매김했다.[6]

공교롭게도 진흙 속 연꽃이 피어난다는 관용어가 존재한다. 그리고 더 타임스는 현재 한국 선진국으로 경제적 발전을 하고 정치적 발전을 한 것, 한국 문화 호평을 받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제는 이 용어가 한국을 비하하는 것보다는 어려운 상황에서 발전한 한국을 호평하는 것이며 중진국 함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격언이 되었다.

심지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기점으로 국민들에 의한 평화로운 촛불 집회가 이어지고, 이를 막기 위한 어용 집회가 도리어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갔으며, 이후 성공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진 걸 감안하면 이 문서의 이름은 더 이상 현 시대의 대한민국에 먹힐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 영향으로 그 제철소 장미를 사화로 정하고, 포항시도 장미를 시화로 제정하였다.


[1] 유료 구독을 통해 읽을 수 있다. [2] It would be more reasonable to expect to find roses growing on a garbage heap than a healthy democracy rising out of the ruins of Korea [3] 사실 당시 한국의 1인당 GDP가 200달러도 되지 않았다. 2024년 가치로 환산해도 1788달러 수준. [4] 이 보고서로 인해서 세계은행의 차관 제공이 결국 무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일본한테서 얻어낸 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전용해서 제철소 건설을 강행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포스코다. 포스코는 후에 너무나 큰 결실을 맺었고, 훗날 1988년에 한국을 재방문한 자피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한 때로 다시 돌아가도 보고서를 똑같이 쓸 거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지금 다시 보고서를 쓴다 해도 그 때와 똑같은 보고서를 쓸 것이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내가 모르고 지나친 박태준과 포스코가 상식을 초월하는 짓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 [5] South Korea’s democracy shines through in a crisis. [6] 다만 세계의 자유는 노태우 정부 말기에 아시아 5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있으며, 언론자유지수도 2009년 한정 아시아 8위를 기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