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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4 17:45:42

하타케야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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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케야마씨
파일:아시카가 가몬.svg
<colbgcolor=#000> 하타케야마 가문의 가몬[1]
아시카가 두 개 줄
足利二つ引
본성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타카모치왕류(高望王流)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카와치 겐지)
가조 하타케야마 시게요시(畠山重能)(간무 헤이시)
하타케야마 요시즈미(義純)(세이와 겐지)
종별 무가(武家)
사족(士族)
출신지 무사시국 오부스마군 하타케야마향
(武蔵国男衾郡畠山郷)
근거지 카와치국
키이국
아와국
야마토국
엣츄국
노토국
무츠국
지류
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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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마츠씨(岩松氏)
니혼마츠씨(二本松氏)
타나카씨(田中氏)
카와치 시부카와씨(河内渋川氏)
야스이씨(安井氏)

1. 개요2. 역사
2.1. 기원2.2. 무로마치 시대2.3. 전국시대2.4. 파생 세력
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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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타케야마씨(畠山氏)는 일본의 무사 가문이다.

2. 역사

2.1. 기원

첫 시작은 헤이시로, 그 중에서도 반도 여덟 헤이시의 일족인 지치부 시게요시(秩父重能)가 무사시국 하타케야마향을 받아 하타케야마씨가 되었다. 시게요시의 아들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重忠)가 미나모토 요리토모를 섬겨 중신이 되었으나 권력 다툼 끝에 전사하여 몰락했다. 그러나 겐지의 일족인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純)가 죽은 시게타다의 아내와 결혼하고 시게타다의 성과 영지를 물려받으면서, 이후 하타케야마씨는 아시카가씨의 방계 가문으로서 존속한다.

2.2. 무로마치 시대

무로마치 막부가 세워질 때에는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도와 유력한 막부 관료가 되었다. 그러나 하타케야마씨의 종가인 하타케야마 구니우지(畠山国氏)는 오슈칸레이를 공동으로 맡은 기라 사다이에(吉良貞家)와 간노의 소란 때 각각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아시카가 다다요시파로 나뉘어 싸우다 아버지 하타케야마 다카쿠니(畠山高国)와 함께 전사해 몰락했다. 대신 구니우지의 5촌 조카인 하타케야마 구니키요(畠山国清)가 간노의 소란 때 다다요시파에 속했다가 다카우지파에 귀순해 하타케야마씨의 세력을 이어나가고, 사실상 하타케야마씨의 총령으로 대우받았다. 구니키요는 간토 간레이를 지냈으나 또 권력 다툼 끝에 실각했고, 대신 구니키요의 동생 하타케야마 요시후카(畠山義深)가 용서받아 가문을 이어나갔다. 이 하타케야마 총령 가문은 가와치·기이·엣추 슈고를 대대로 역임했기에 가와치 하타케야마씨라고도 한다.

요시후카의 아들 하타케야마 모토쿠니(畠山基国)는 남조의 구스노키 마사카쓰(楠木正勝)가 지키던 지하야 성을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고 야마나씨와 쇼군가의 대결인 메이토쿠의 난에서도 활약해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신임을 받았다. 마침내 호소카와씨와 시바씨의 간레이 경쟁을 비집고 들어가 간레이가 되었고, 이후 가와치 하타케야마씨는 호소카와씨·시바씨와 함께 3관령가의 일원이라는 높은 가격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모토쿠니의 손자 하타케야마 모치쿠니(畠山持国) 대에 가문이 둘로 찢어진다. 모치쿠니는 아들이 없을 때 동생 하타케야마 모치토요(畠山持富)를 양자로 들였다가 이후에 친아들 하타케야마 요시나리(畠山義就)를 낳아 모치토요를 폐하고 요시나리를 적자로 삼았는데, 일부 가신단이 모치토요의 아들 야사부로, 야사부로 사후 야사부로의 동생 마사나가를 옹립하고 모치쿠니의 결정에 반항했다. 이는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를 양자로 들였다가 친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낳자 폐한 것과 같은 양상이었다. 또 비슷한 가독 분쟁이 3관령 중 다른 하나인 시바 가문에도 일어나, 아시카가·하타케야마·시바 등 막부의 유력 가문의 분열이 폭발하여 오닌의 난이 일어나고 만다.

2.3. 전국시대

요시나리파를 소슈 가, 마사나가파를 비슈 가라고 부르며, 이들은 오닌의 난이 끝난 후에도 어느 한쪽이 몰락하거나 통합되지 않고 센고쿠 시대에까지 싸움을 이어나간다. 둘 다 가와치 반국 슈고를 나눠가진 상태에서 기이 슈고직을 더 가진 비슈 하타케야마가 약우세를 유지하긴 한다. 전국시대 중기가 되면 소슈 가에선 기자와 나가마사(木沢長政), 비슈 가에선 유사 나가노리(遊佐長教)라는 슈고다이들에게 권력을 빼앗기며 전국시대의 전형적인 하극상 루트까지 충실히 밟는다.

가와치 하타케야마 가문은 호소카와 가문의 간레이 독점 이후에도 여전히 가와치·기이에 대한 영향력은 유지하고 있었고, 인접국으로 따로 슈고가 설치되지 않은 야마토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비슈 가와 소슈 가의 내분, 슈고와 슈고다이의 내분 때마다 인근의 호소카와나 미요시 정권과 손잡는 것은 물론이요 기이와 야마토의 호족들도 끌어들여서 싸웠다. 따라서 호소카와씨의 내분이나 미요시 가문의 성장 과정에도 가와치 하타케야마 가 사람들이 많이 얽혀 있었다.

기자와 나가마사가 미요시 나가요시와 싸우다 죽으면서 소슈 가문은 사실상 몰락하고, 나가마시의 꼭두각시였던 하타케야마 아리우지(畠山在氏)가 제한적인 세력을 유지할 뿐 나가마사 수하의 국인들도 비슈 가문에 붙어버린다. 아리우지까지는 가와치 반국 슈고직을 유지했으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아들 하타케야마 히사마사(畠山尚誠)가 가독 상속만 승인받고 가와치 반국 슈고직은 승계되지 않아 슈고다이묘로서 소슈 가는 망한다.

한편 비슈 가는 유사 나가노리가 누군가에게 암살되면서 하타케야마 다카마사(畠山高政)가 세력을 회복했고, 반 미요시 세력을 긁어모아 미요시 나가요시의 동생 미요시 짓큐 구메다 전투에서 전사시키는 기염을 토했으나 직후 이어진 교코지 전투에서 패배하며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이후에도 미요시 세력과 싸우면서 아시카가 요시아키 오다 노부나가의 편에 섰으나,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오다 노부나가의 대립에 말려들어가 몰락하게 된다. 몰락 이후에도 기이에 세력이 남아 있어서,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섰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슈 정벌 때 항복해서 멸망했다. 이후 자손이 에도 막부에서 하타모토로 살아남았다.

2.4. 파생 세력

이 과정에서, 엣추는 일찌감치 너무 멀어서 관리도 잘 안 돼 한때 분가인 노토 하타케야마에게 맡기기도 했고, 결국은 서부 슈고다이 진보 가와 동부 슈고다이 시나 가가 따로따로 센고쿠 다이묘가 되면서 가와치 하타케야마의 손에서 이탈했다. 진보 가는 센고쿠 다이묘가 되는 과정에서 잇코잇키와 손잡고 주가는 물론이요 에치고 슈고다이 나가오 가문의 나가오 요시카게(長尾能景)까지 배신해 전사하게 했기 때문에, 나가오 요시카게의 아들과 손자인 나가오 다메카게, 우에스기 겐신 2대 동안 나가오 우에스기 가의 동네북이 된다.

노토 슈고직은 일찌감치 하타케야마 구니키요의 둘째아들 하타케야마 미쓰노리(畠山満慶)가 이어받아 가와치 하타케야마와는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되었다. 이 미쓰노리의 가문은 노토 하타케야마라고 한다. 미쓰노리의 5대손 하타케야마 요시무네(畠山義総) 대에 명성 나나오 성을 쌓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나, 요시무네 사후 가신들에게 실권을 빼앗겨 몰락했고 요시무네의 아들 하타케야마 요시쓰구(畠山義続)·하타케야마 요시쓰나(畠山義綱) 부자는 가신들의 손에 쫓겨났다. 요시쓰나의 손자 하타케야마 하루오마루(畠山春王丸) 대에는 어린 당주를 두고 가신간에 내분이 일어나 오다와 우에스기 양편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친 오다측이 우세해 우에스기 겐신의 포위도 잘 견뎠으나, 성내에 역병이 돌아 하루오마루가 감염돼 죽자 친 오다측의 사기가 떨어졌고 성은 우에스기 겐신에게 함락돼 전국 다이묘로서 노토 하타케야마씨는 멸망했다. 다행히도 요시쓰나의 동생 하타케야마 요시하루(畠山義春)가 우에스기 가에 인질로 가 있다가 목숨을 부지하였고, 이후 도요토미, 도쿠가와씨를 차례로 섬기며 에도 시대에도 가문을 지켜나갔다. 요시하루가 잠깐 조조(上条) 우에스기 가문에 양자로 갔었기에 요시하루의 자손들 중 일부는 조조 우에스기 가문을 계승했다.

이외에 오슈 니혼마쓰 성을 근거지로 하는 니혼마쓰 하타케야마씨(오슈 하타케야마씨, 니혼마쓰씨라고도 함)도 있다. 한참 위에서 언급한 몰락한 종가 하타케야마 구니우지의 자손으로, 중앙의 권력다툼에서 소외되어 일개 지방 성주로 근근히 세력을 이어나갔다가 다테 마사무네에게 멸망했다. 이 가문의 마지막 당주, 구니우지의 8대손 니혼마쓰 요시쓰구(二本松義継)는 바로 다테 마사무네가 인질로 잡혀간 아버지 다테 데루무네를 인질범과 함께 총으로 쏴죽였다는 유명한 이야기의 바로 그 인질범이다.

3. 대중매체에서

가와치 하타케야마는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이름 있는 가문인 반면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노부나가의 야망 창천록까지는 나오다가 노부나가의 야망 천하창세 이후 한동안 등장조차 못 했는데, 본거지 가와치가 너무 좁아서 1성조차도 안 나오는 경우가 많고, 기이는 시리즈 전통적으로 그냥 사이카슈의 영역으로 할당하기 때문에 나올 자리가 부족하다는 게 크다.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 오랜만에 재등장. 그리고 소슈 가문이 일찍 퇴장해서 창천록 빼면 대부분 비슈 가문만 등장한다.

노토 하타케야마는 역사의 중심에선 비켜났지만, 노토 국에 항상 1성은 있기 때문에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

니혼마쓰는 작은 영주이기 때문에 역시나 천하창세 이후 등장하지 않다가 창조부터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어디에 어떻게 나오든 다들 고난도 다이묘다. 가와치 하타케야마는 기나이 독보적인 약체고, 노토 하타케야마는 우에스기랑 혼간지라는 큰 적을 동서로 끼고 있고, 니혼마쓰는 원래부터 체급 자체가 낮으며, 셋 다 다이묘고 가신들이고 한숨 나오는 능력치를 자랑한다. 창천록의 소슈 하타케야마 요시히데는 가신이 아예 없고. 예외는 노토 하타케야마 중흥의 조인 하타케야마 요시무네.

가몬은 아시카가 가문과 동일한 정문 대신 별문인 고몬무라고로 나온다. 노토 하타케야마는 천도까지는 어긋난 바퀴(와치가이輪違い)를 썼으나[2] 창조부터는 색이 다른 고몬무라고로 나온다.

[1] 아시카가 가문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가몬이 같다. 하타케야마 시게타다가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고몬무라고(小紋村濃) 문장( 고몬무라고 외부 링크)도 전해 내려온다. [2] 어긋난 바퀴도 하타케야마 가문이 썼다는 인터넷 자료가 있기는 하다. 하리마야 어긋난 바퀴 문장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