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피에르 아이슬랭 드 몽타구 (Pierre Aycelin de Montagu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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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20년에서 1325년 사이 ~ 1388년 11월 8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빌롱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파리 | |
아버지 | 질 2세 아이슬랭 드 몽타구 | |
어머니 | 마스카롱 드 라 투르 도베르뉴 | |
형제 | 질 아이슬랭 드 몽타구 | |
직위 | 느베르 주교, 랑 주교, 프랑스 추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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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성직자. 서방교회 대분열이 벌어지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2. 생애
빌롱 인근에 토지를 소유한 오베르뉴 출신의 귀족 가문의 후손인 질 2세 아이슬랭 드 몽타구의 아들이다. 어머니 마스카롱 드 라 투르 도베르뉴는 올리에그의 영주인 기 드 라 투르 도베르뉴의 숙모였으며,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조카였고,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누나였다. 형제로 1357~1358년과 1361년에 프랑스 총리를 역임했고 테루안 주교를 맡았던 질 아이슬랭 드 몽타구가 있었다.그는 일찍이 성직자의 길을 걸어가 교회법 박사가 되었고,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었다. 이후 생마르탱 데 샹 수도원의 원장을 맡았고, 1359년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아들인 장 드 베리의 총리가 되었다. 1361년 르노 2세 드 물랭의 뒤를 이어 느베르 주교로 선임되었으며, 1368년 샤를 5세에 의해 교황 우르바노 5세의 특별대사가 되었다. 1371년 1월 8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랑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후 샤를 5세에게 종교적인 문제에서 조언해주는 고문으로 각광받았다.
1378년 9월 20일, 폰디에 집결한 추기경 13명은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자신들이 자니치게 세속적이며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며 강하게 비난하고 공개 장소에서 욕설을 퍼붓기까지 한 것에 불만을 품고, 우르바노 6세 선출은 협박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에 무효라고 선언한 뒤, 클레멘스 7세를 새 교황으로 옹립했다. 피에르 아이슬랭은 샤를 5세에게 클레멘스 7세만이 진정한 교황이니 그를 받들라고 설득했고, 샤를 5세는 이를 받아들여 1378년 10월 6일에 클레멘스 7세를 교황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이후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에 자리를 잡고 교황청을 설립해 우르바노 6세와 대립했다. 이리하여 서방교회 대분열의 막이 올랐다.
1383년 헨리 르 디스펜서가 "클레멘스 7세를 교황으로 받드는 이단인 프랑스로부터 플란데런 백국을 해방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십자군 원정을 단행하자, 그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섭정들에게 클레멘스 7세를 위해 디스펜서 십자군을 격퇴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청했다. 프랑스 당국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즉각 군대를 파견해 디스펜서 십자군을 물리쳤다. 1383년 12월 23일, 클레멘스 7세는 그의 공을 인정해 프랑스 추기경에 선임했다.
1385년과 1386년에 알레 교구 행정관으로 선임되었으며, 1385년부터 1388년까지 생마르탱데샹 수도원장을 맡았다. 1386년 랑 주교직을 사임했다. 1388년 11월 3일, 랭스 주교궁에서 대규모 공의회를 열고 샤를 6세가 이제부터 스스로 통치해야 한다고 선언해, 섭정단이 물러나도록 했다. 1388년 11월 8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이에 대해 세간에서는 섭정단을 맡았던 인사들 중 한 사람이 독살했을 거라 여겼다. 그는 파리의 생마르탱데샹 수도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