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10:35:12

퐁디셰리 해전



파일:zpage085.gif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 해군3.2. 프랑스 해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9년 9월 10일 인도 카르나틱 해안의 퐁디셰리 앞바다에서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이 맞붙은 전투. 프랑스 해군은 이 전투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이후 프랑스는 인도양에서 영국 해군에 대적할 여력을 상실했다.

2. 배경

1758년 9월, 아쉐 백작 안 앙투안은 네가파탐 해전 이후 해군을 이끌고 인도를 떠나 모리셔스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3천의 전열함과 프랑스 동인도 회사 선박들을 합류시켜 전력을 강화한 뒤 인도로 돌아가려 했다. 한편 1759년 4월 7일 붐베이(현재의 뭄바이)에서 자신의 함대를 재편성한 조지 포콕 중장은 인도로 돌아올 것으로 예상되는 프랑스 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카르나틱 해안으로 출발했다. 6월 30일, 포콕은 그래프턴, 선덜랜드 호 등 동인도 회사 소속 전함 5척을 전력에 추가시킨 뒤 8월 3일 퐁디셰리를 향해 항해했다.

9월 2일, 아쉐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과 포콕 중장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실론 섬의 페드로 인근 바다에서 서로를 목격했다. 하지만 영국 함대는 도중에 적을 시야에서 놓쳐 버렸고, 포콕 중장은 적이 퐁디셰리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가기로 결심하고 전 함대에 퐁디셰리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9월 8일 이른 아침, 포콕은 적보다 먼저 퐁디셰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후 1시, 그는 프랑스 함대가 남동쪽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목격했다. 이에 영국 함대는 9월 9일 아침 적과 대치했다. 그러나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두 함대는 그날 전투를 벌이지 않았고, 다음날 오전 10시에 비로소 전투를 개시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 해군

3.2. 프랑스 해군

4. 전투 경과

오전 10시 서로를 마주본 채 대열을 형성한 두 함대는 11시경에 서로를 향해 전진했다. 오후 2시, 야머스 호는 프랑스 해군의 후방 함대에 근접해 전투 신호를 보냈다. 포콕은 즉시 전투 개시 신호를 보냈고, 양군은 서로 포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레프턴 호가 먼저 Zodiaque 호를 공격했고, 뒤이어 엘리자베스 호가 선두 함대를 이끌고 적을 향해 진군했다. 이후 양측은 별다른 전술을 사용하지 않은 채 격렬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오후 4시 경 프랑스 후방 함대와 중심 함대가 밀려나기 시작했고, 선덜댄드 호는 그 중 한 척을 포획했다.

프랑스 함대는 적의 기세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영국 함대는 추격할 수 없었다. 그들 함선 중 척이 프랑스 함대의 거센 포격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타이거 호는 마젠마스트와 주 마스트가 파괴되어 항해가 불가능한 상황에 몰렸고 뉴캐슬 호는 돛대와 야드, 삭구 등이 많이 파손되었다. 그리고 컴버랜드 호와 살리스베리 호는 돛을 올릴 상황이 아니었고 야머스 호는 앞쪽 선실이 적의 포격으로 인해 파괴되었으며, 그래프턴 호와 엘리자베스 호는 돛대와 야드, 삭구가 크게 파손되었다.

이렇듯 적이 추격하지 못하는 사이, 프랑스 함대는 어두워질 때까지 남쪽으로 게속 후퇴했다. 포콕은 리벤지 호에게 프랑스 해군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나서 가장 손상이 심한 선박을 수리할 수 있도록 정박시키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퐁디셰리 해전은 막을 내렸다.

5. 결과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118명이 전투 도중 전사했고 66명은 전투가 끝난 뒤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으며, 122명은 중상을 입었고 263명은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에는 뉴캐슬 호의 미치 대위와 고어 대위, 타이거 호의 레드쇼 중위, 야머스 호의 선장, 엘리자베스 호의 갑판장 등이 포함되었다. 컴버랜드 호의 서머셋 대위는 발못 부상을 입었고 버튼 대위는 머리에 타박상을 입었다. 프랑스 해군은 1,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망자 중에는 Zodiaque호와 Centaure호의 선장들도 있었고, 부상자 중에는 아쉐 백작 본인도 있었다. 이 전투 후 프랑스 해군은 더이상 영국 해군에게 대항할 여력을 상실해버렸고, 영국은 이 전투를 발판삼아 프랑스를 인도에서 축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