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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7-21 20:26:24

파즈 스님/아귀 김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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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즈 스님(김현식)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다. 종정 스님, 39와도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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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가혹한 세상2. 부정(父情)3. 화두4. 비극

1. 가혹한 세상

세상은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앉으십시오, 김현식씨.
출산은 무사히 끝났나요?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습니다. 다만...
다만?...
이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네? 아기에게 무슨 일 있는 겁니까?
산모께서는 아이를 낳으실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출산 도중에 아이가 걸려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제왕절개를 했지만,
과다출혈을 견디실 몸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내 분께서는 출산 중 사망하셨습니다.
큰 병원에 연락해 두었으니 곧 차가 올 겁니다.
괴물...!! 날 잡아먹으려는 괴물! 그 이빨들을 보자 나도 아내처럼 미친 것이 아닐지 생각했다. 아내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병약했고 늘 가난에 허덕이며 기댈 곳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 나는 그녀가 기댈 장소가 되어주지 못했다.

아내가 죽었던 그날로부터 8년 후 남자는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다. 아내를 죽게 한 놈들을 잡겠다고 돌아다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그저 가난만 남아있을 뿐. 어떻게 하루하루를 먹고 사는 건지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그런 남자에게도 시간은 잘 간다. 김윤지.. 그녀가 남기고 간 내 딸 윤지도 몸이 약하다. 이미 학교에 갈 나이지만, 못난 아비 때문에, 온종일 집에 박혀 쓰레기들을 가지고 논다. 늘 혼자 있는 윤지에게 행복한 시간이란 뭔가를 먹는 시간뿐이다. 서툰 젓가락질을 하며 게걸스럽게 음식을 탐한다. 그리고 곧 토해낸다. 술에 취할 땐 딸의 그 모습이 마치 아내를 쏙 빼닮아서 참을 수가 없다. “빌어먹을!! 처먹고 토하고, 처먹고 토하고! 게다가 이제 머리까지 아프다고!? 내가 밖에서 얼마나 고생하는 지 알고나 있어?! 넌 날 보면 뭐 달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냐!? 부모 죽이고 태어난 년이!!” 윤지는 죄송하다고 한다. 뭔지도 모르고 연신 죄송하단 말만 되풀이한다. 정신이 들고 나면 내자신이 너무나 혐오스럽다. 이러고 싶었던 게 아닌데..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이렇게 못난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닌데...

겨울이 되면 땅이 얼어 막노동도 일이 줄어든다. 힘든 계절이다. 다른 제대로 된 일을 찾아보려 해도 내가 보낸 지원서는 아무도 답장을 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는 마치 없는 것처럼... 이세상에 나란 존재는 없던 것처럼 행동한다. 텅빈 메일함은 이미 넌 늦었다고, 틀렸다고, 남들처럼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창 하나만 바꾸면, 나와 상관없이 잘 돌아가는 세상이 보인다. 세상을 남들같이 누리는 사람들이 너무 눈부시고 부러워 보여서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온다. 왜..!! 왜..!! 왜 나는 남들처럼 누리고 살 수 없는 거지!? 나도 내 딸을 웃게 해주고 싶었는데, 왜 이런 병신같이 밖에 못하는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가 그렇게 잘못 살아온 건가?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그렇게 큰 꿈이었나?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해도 현실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결국, 이웃집에서 경찰을 불렀다. 매일같이 그 난리를 피웠으니 당연한 일이다. 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더 이상 지쳐서 뭔가를 생각할 수도 없었다. “쯧쯧,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애를 학교도 안 보내고 집에 가둬 놨었나 봐요.” “세상에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대니?” “애는 불쌍해서 어떻게 한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몰랐단 듯이 입을 놀리는 개자식들. 그래 이제 날 뼈다귀 삼아 실컷 뜯어먹어라. 빌어먹을 것들. 너희라고 다를 것 같아?

“아빠... 아빠아!!!! 이 사람들이 나 데려간대!! 허어어어앙!! 아빠가 못하게 해!” “이 아저씨들 따라가라. 아저씨들이 맛있는 것도 사주고... 학교도 보내줄 거야.” “시러어어!!! 나 아빠랑 살 거야!! 아빠랑 살 거야!!!” “너 아빠가 떼 쓰면 혼난다고 했지...? 빨리 안 가?” “싫어어어!!! 싫어어어어!!!! 아빠!! 아빠아아아!!!” 하늘 위에 뭐가 있는지 모르지만.. 무언가, 누군가 있다면.... 좀 도와주세요. 다시는 저 같은 못난 개새끼 안 만나게... 천사 같은 내 딸 윤지는 앞으로 행복하게 해주세요.
윤지와 헤어진 지 3달이 지났다. 봄이 오자 난 나름대로 일어서려 노력했다. 윤지는 시설에 보내져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 매주 꼬박꼬박 나에게 편지를 보내온다. 저번 주에는 어버이날도 아닌데 카네이션을 접어 보내주었다. 내가 다시 경제적으로 자립이 가능해지면 다시 데려올 수도 있다고 한다. 그게 지금 내 목표이기도 하다. 여전히 힘든 생활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목표가 생겼다. 내 보물, 내 천사... 조금만 기다려다오. “여보세요? 김윤지양 아버님 되시지요? 윤지가 쓰러졌어요!”
뇌종양입니다. 그것도 위치와 상태가 안 좋습니다.
이전부터 구토나 두통을 호소하지 않았었습니까?
왜 그때 병원으로 데려오지 않으셨던 겁니까.
....우리 윤지 살 수는 있는 겁니까?
지금 상황으론...
...선생님... 그냥.. 제가 잘못한 거 아니까요.
그냥 아무 말 마시고... 우리 윤지 살려주시면 안 돼요...? 네?
수술하면 나을 수 있잖아요. 그렇잖아요?
제가 진짜 개새낀데. 벌 받을 놈은 전데... 왜 천사 같은 우리 딸이 벌을 받아요?
선생님 의사잖아요. 그냥 살려주세요. 그래 주실 수 있죠?
죄송합니다. 이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환자의 남은 시간까지 행복한 기억 남기게 해주십시오.
그게 최선입니다.
개소리마!!! 뭐가 남은 시간이야!! 이런 게 어딨어!! 이런 게 어딨냐고!? 개 같은 자식들 뭔가 해보란 말이야!!! 뭔가!!!

차를 빌려서 함께 드라이브를 가자고 말했다.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새 나들이옷을 사줬다. 윤지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것들은 진작 해줄 수도 있었던 일들뿐이었다. 함께 해주는 것. 이제는.... 어디로 가든 함께 갈 것이다. 어디이건 어떤 곳이건...

2. 부정(父情)

김현식은 딸 김윤지와 함께 차를 타고 절벽을 돌진했다. 자살을 시도한 거였지만, 김현식의 숨은 붙어 있었다. 그는 딸을 부축하여 차에서 나왔다. 피투성이가 된 부녀는 이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김현식이 정신을 차리니, 웬 늙은이가 보였다. 그는 정체불명의 돌을 갖고 있었는데, 그 돌은 신기하게도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늙은이는 윤지의 몸에 돌의 빛을 비추고 있었다. 수상함에 김현식이 적의를 드러내자, 노인은 그저 상처를 돌본 것뿐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몸의 상처는 나은 것 같은데 도무지 깨어나지 않더구나. 동공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아마도 여기에 오기 전부터 상태가 안 좋았던 모양이지.
이 숲에서 나가면 아마도 명이 다할 것 같구나.
이제 돌아가게. 여긴 사람이 올 곳이 아니야.
이곳에 있는 한 그 아이는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될 거야.
여기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겁니까? 여긴... ‘천국’입니까?
...... 아니 여긴 그런 곳이 아닐세. 잔말 말고 돌아가게나.
여기 주변을 적당히 걸어가면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1]
잠깐만요!! 신령님! 아니 부처님! 하느님!
제 딸 좀 구해주세요?! 네?!
제 딸의 병을 고쳐주시기만 하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가 진짜 나쁜 놈입니다! 근데!
제 딸....! 윤지만 고쳐 주시면 진짜 똑바로 살게요! 정말 잘 살겠습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거짓말하지 마!!! 상처도 낫게 해 줬잖아! 할 수 있잖아아아!!!
도.. 돈 필요해서 그러지? 니들 수법 다 알아!
내.. 내가 행색은 이러고 지금은 돈이 없어도 알부자야! 알아?!
고쳐주기만 하면 내가 당신들 따라다니며 증인도 돼줄 수 있어!
고쳐주기만 해! 응?
상처를 치료하는 것과 병을 고치는 게 같더냐!
놔라! 이 아둔한 놈 같으니!!
못 놔!!! 놔주면 갈 거잖아! 씨X!!
고쳐주고 가!! 고쳐주기 전엔 못 가!!
하늘의 법도를 거스르면 결국 후회할 일밖에는 안 생기는 법이다.
아뇨! 아닙니다! 진짜 저 후회 같은 거 절대 안 합니다!
저는 이제껏 후회할 일만 하고 살아온 놈입니다.
전 세상에 몰매는 다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천하에 개놈입니다.
제 딸에게 몹쓸 짓도 많이 하고,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 딸은.. 그래도 피붙이라고... 저를 아빠라 합니다.
아세요? 아빠라고 한다고요오오.... 저 같은 놈을..
스님... 천사 같은 제 딸. 윤지 딱 한 번만 살려주세요...
부...부모가 자식을 땅에 묻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어둡겠어요... 얼마나 차갑겠어요..?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답니까. 사람의 법도 그렇게 막돼먹진 않았는데.
제 딸이 죽는 게 하늘의 법도라니...
하늘의 법이 왜 그리 차갑고 정이 없습니까...
그냥.. 살아만... 살아만 있게 해주세요. 더 바라지도 않습니다..
김현식은 노승의 바지자락을 꼭 붙든 채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아이고 부처님. 어쩌자고 이런 인연을 닿게 하십니까. 안 그래도 지은 죄 많은 늙은 중한테 뭘 더 뒤집어씌우시는 겁니까.. 달빛이 이렇게 부드러운 날에는 자신을 속이기 너무 힘이 듭니다. 어쩌면.. 어쩌면 하고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겠지요... 그래선 안 돼요..
정신을 차려보니 절이었다. 김현식은 절간 앞에 꿇어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딸 윤지를 살려주겠다고 할 때까지 계속 그렇게 있을 속셈이었다...

3. 화두

백발의 사내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노승에게 말을 걸었다.
벌써 일주일 째 저러고 있군. 앞으로 한 달이고 일 년이고 버틸 기세인데?
여기선 물도 음식도 필요 없으니, 버티기에는 최고의 조건이군 그래.
슬슬 내 마음에도 측은지심이 살아나는군.
이봐 영감. 그냥 바라는 대로 해주라고.
혹시 알아? 뇌종양이건말건 호문쿨루스의 재생력이 버텨줄지.
정 아니면 만들고 다시 죽여버리면 되잖아.
당신은 호문쿨루스를 파괴할 방법을 알고 있잖아?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을 하는 건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크롤카.
도리? 지랄하지 마.
그 잘난 대스승의 법 때문에 살릴 수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건 도리에 안 어긋나나?
쉬타카두르는 이미 몇 명이나 호문쿨루스를 만들었어.
그런 법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거야?
그가 원해서 만든 건 첫째 딸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럴 권리가 없다.
권리? 킬킬킬!! 아니. 당신은 있어, 영감.
기분 탓에 저지르고 자신이 한 행동을 평생 후회할 권리란 누구에게나 있지.
노승은 김현식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한 가지 묻겠다. 너는 왜 너와 네 딸이 이렇게 된 거라 생각하느냐. 네 진심으로 답하거라.” “...... 전부.. 제 탓입니다.” 김현식이 답하자, 노승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진실로 생각지도 않으면서 그저 상황만 모면하면 된다며 뱉는 입에 발린 말은 거짓보다 못하다!
난 너의 진심을 이야기하라고 했다! 너는 이게 그저 잘 넘어가면 되는 일이라 생각하느냐!
다시 한 번 묻겠다. 한 번 더 텅 빈 말을 한다면 강제로라도 돌려보내겠다.
세상... 세상이 저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세상이 저를 버렸습니다.
세상은 너를 가진 적도 없다. 가진 적이 없는 걸 어찌 버리느냐.
전 남들만큼 가진 것이 없어 언제나 뺏기는 입장이었습니다.
가지고 태어난 놈은 열 번을 쓰러져도 되지만, 전 단 한 번만 쓰러져도 용서받지 못합니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나고, 작은 행복마저 앗아가는 게 세상 탓이지 뭡니까.
저라고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습니다.
‘지옥’에 떨어지고도 세상을 탓하는 게냐.
너와 같이 남이나 세상을 탓하는 자를 ‘아귀’라고 한다. 언제 무엇을 ‘탓’하고 만족을 모르는 자.
그런 자는 배고픈 귀신과 같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만족하지 못한다.
주변을 먹어치우며 자신이 배고프다며, 가족과 다른 자들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 안 하지...
왜 난 유복하지 않은가. 왜 남들처럼 누릴 수 없는가. 그러며 자신의 부모나 가족을 원망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끝이 없다는 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왜 더 채워주지 않느냐고 물으며 주변을 집어삼킨다.
다른 자의 괴로움 따윈 보이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배고픔만 보이지.
그렇게 다 집어삼키고는 자신이 주변의 모든 걸 먹어 치웠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며 절망에 빠지며 또 남을 탓한다.
만일 현실에 입이 작고 배불뚝이 귀신이 나온다면 난 그걸 ‘가짜’라고 하겠다.
‘아귀’란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이야기 속의 존재일 뿐.
아귀가 뜻하는 바는 바로 너 같은 남을 탓하는 ‘인간’을 뜻하는 거니까.
제가 그런지 안 그런지 스님이 보셨습니까? 뭘 보고 그딴 소리를 하는 겁니까.
봤냐고? 그럼 누가 보면 맞는 거고 아니면 틀린 건가?
난 네놈에게 너 자신을 묻고 있는 거다.
너 자신에게 묻고 대답해라. 넌 대체 뭐였는지.
누군가 보고 안 보고를 따지며 또 세상에 자신을 숨기고 싶은 거냐?
모든 게 그럼 제 탓입니까?!
능력이 없는 것도! 배운 게 없는 것도! 제가 딸에게 병을.....?!
아니, 너는 그 애와 함께 죽으려고 했지.
네 딸이 없어지면 슬픔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틀리더냐?
넌 아이가 죽는 순간까지 아이의 행복보다는 네 슬픔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부모란 자식에게 있어 세상이다. 세상의 전부이자 모든 것이지.
그리고 성인은 자기 자신이 세상이다.
세상은 사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
바로 네가 속한 곳이 세상이고, 넌 그 일부다. 세상은 널 버린 적이 없었다.
세상이 널 버린 게 아니라, 네가 바로 세상이다. 네가 자기 자신을 버린 거다.
만족과 불만족은 결국 마음의 차이다.
내가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너를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른다면 넌 영원히 불행에 허우적댈 것이기 때문이다.
늘.... 저를 잡아먹으려는 것들의 환상을 봐왔습니다.
그런데 차로 절벽에서 떨어지던 그 순간.... 잠시 눈을 떠서 백미러로 제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증오하던 그 환상이 바로 제 얼굴에 있더군요.
바로 제가 절 잡아먹으려 했었습니다... 제가..
그만두거라. 남을 탓하지 않는 만큼, 자신을 탓해서도 안 된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도 탓하지 말고.. 그저 받아들이거라.
부모 자식의 인연도 버리고 대의를 위해 살거라.
이게 너의 딸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바꾸는 조건이다.
‘아귀 김현식’은 오늘부로 죽었다.
이제부턴 이름도 인연도 모두 버리고, 이제껏 탓한 자들을 위해, 대의를 위해 살거라.
....그러겠습니다....

4. 비극

이 숲의 모든 LC들이 비명을 지르던 밤이 지나고, 김윤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 하얗게 변한 머리, 파란 눈동자... 일어나서 줄곧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허공만 바라보는 아이를 보며 김현식이라고 불렸던 남자는 삼키듯 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조용히 돌아보는 그 얼굴엔... 달빛처럼 빛나던 미소도, 언제나 사랑을 담아두었던 눈빛도 아무 것도 없었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딸과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서, 남자는 아이에게 손을 보여 달라고 말했다. 조용히 이불 밖으로 꺼내 든 손. 남자는 그 손 모양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지. 아이가 잘 때마다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던 그 곰실곰실 움직이던 작은 손가락들... 그 손은 그곳에 앉아있는 아이가 김윤지라고 말해주었지만, 마치 백지처럼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은 그 얼굴과 그 눈동자를 볼 때면... 내 딸은 어디로 간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큰스님은 이 아이가 무엇을 잃었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 그저 지켜보며 무엇을 잃은 것인지 알아보라 하셨지. ‘말을 듣고, 짧지만 대답도 한다. 시키는 일도 묵묵히 한다.’ ‘무엇을 잃은 걸까. 무엇을 잃었기에 아무 말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걸까.’ ‘저건 내 딸 윤지다. 천사 같았던 윤지... 내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줄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건..’ 남자는 변한 딸의 모습을 보면서 계속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윤지는 갑자기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남자는 달려가 손을 뻗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아이를 잡을 수는 없었다. 절벽 아래는 피로 흥건했다.
‘왜?....’ ‘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놀랐을 뿐이다. 그리고 곧 정적과 함께 차오르듯 공포가 밀려왔다. 빛과 함께 다시 만들어지는 몸. 그리고.. 박살난 자신의 시체 옆에 서서 바라보던 아무 감정 없는 그 눈동자. 아무 거리낌 없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슬퍼 울어야 했을 텐데.. 그날도 그날 이후로도 눈물은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윤지는 마음을 구성하는 수십 가지를 잃어버렸다. 생존본능까지도. 하지만 호기심이 남아 있었다. 호문쿨루스가 되던 그날 다시 태어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그리고 마치 실험하듯 몇 번이고 다른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뇌종양이 커져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왜 시체가 남아있는 건지,[2] 왜 몸에 심어진 LC가 아닌 이 땅에 있는 모든 LC가 그 아이에게 반응하는지 결국 알 수 없었다.
나는 이해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시간은 계속 흘렀다. 어느 새 김현식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딸의 죽음은... 그저 숫자가 올라가듯,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나는 무력하게 그걸 바라보았다. 큰스님께서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셨지만... 난 그 아이를 윤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 방법을 찾을 수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무의미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점점 피폐해져 가는 날 보며 큰스님은 결국 날 내보내기로 하셨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절간도 속세라는 말이 있다. 자신도 인연도 모두 버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바꿀 수 없는 걸 바꾸려고 헛된 노력을 하는 것이지? 저 아이가 측은해 보이는 것도 결국엔 네가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도리가 있지만, 저 아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네 멋대로 바꾸려고 발버둥치지 마라. 저 아이는 내가 거두겠다. 이곳에서 나가거라.”

하지만 난... 자식을 두 번이나 버릴 정도로 독하지 못했지. 난 스스로 괴물이 되었다. 몸속 곳곳에 돌들을 박아 넣었지. 이 땅은 날 살리고 이런 몸을 가지게 해주었다. 큰스님은 결국 나를 내보내지 못하셨다. 이 땅을 벗어나면 나는 내 무게에 찌부러져 죽게 될 테니까.
“윤지야!! 윤지야!! 어디 있니!! 대답 좀 해다오!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
딸의 이름을 부르짖고, 숨을 쉬고 있는 시체들을 꺼내며 있을 리 없는 아이를 찾았다.
그 따뜻한 몸들이 너무 공포스러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두 눈을 찔러 피눈물을 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스님은 참선을 하다가 대범천왕의 계시를 받았다. 그것은 윤지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었다. “‘육도(六道)가 모이는 날’ 자신을 잃은 자가 새로운 길을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무아(無我)의 호문쿨루스가 무명사를 찾아왔다.
[1] 무명사 주변에는 결계가 쳐져 있어, 모든 사물이 환각을 유발한다. 여기에 현혹되면 길을 잃게 되며, 결국에는 들어왔던 길로 나오게 된다. [2] 무명사에서는 생물은 절대 죽지 않는다. 그러나 39는 죽는 건 물론이고, 새로운 몸이 태어나도 시체가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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