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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06:49:40

티베트 불교/중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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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입중론》과 중관 사상 소개
2.1. 강연 영상2.2. 삼전법륜2.3. 《입중론》 소개2.4. 성불하기 위한 두 가지 자량(資糧)2.5.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2.6. 예시로써 공성(空性)을 설명함2.7. "나"를 찾는 방식2.8. 유(有)ㆍ무(無)의 두 가지 아(我)2.9. 상견(常見)과 단견(斷見)2.10. 두 가지 장애
3. 관련 서적

1. 개요

파일:nagarjuna_robert_beer-1.jpg
'대승불교의 아버지', '제2의 붓다'로 일컬어지는
중관학파의 개조(開祖) 나가르주나[1]
의지하여 나타나기에
멸함도 없고 생겨남도 없다.
끊어짐 없고 영원함도 없다.
옴이 없고 감이 없다.
하나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다.
희론(戱論)의 적멸함 설하신 최상의 설법자,
원만구족하신 부처님께 절하옵니다.
《중론》의 부처님 찬탄 게송

티베트 불교에서는 종파를 막론하고 중관(Mādhyamika), 그 중에서도 귀류논증 중관(Prāsaṅgika-Mādhyamika)의 견해를 가장 중시한다.

중관은 유식과 더불어 대승 불교의 양대 사상으로 일컬어진다. 한국 불교의 경우에는 고구려의 승랑(僧郞)이 중관사상에 기반한 동아시아 불교 종파인 삼론종(三論宗)의 발달에 기여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때는 원효가 삼론종 관련 논서인 《삼론종요(三論宗要)》, 《중관론종요(中觀論宗要)》, 《이제장(二諦章)》등을 저술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고려, 조선에 걸쳐 중관 관련 논서가 한 권도 저술된 적 없을 정도로 중관사상은 천 년 가까이 한국 불교에서 잊혀졌고 현대에 이르러 비로소 불교학자들에 의해 다시 연구되기 시작했다. 한국을 포함한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중관, 유식보다 중국에서 재해석된 불교 사상인 화엄(華嚴), 법화(法華), 정토(淨土), 선(禪) 사상이 각광받았다. 이와 달리 인도 고유의 논리적 사유를 요하는 중관, 유식, 인명이 발달하였다는 점이 인도-티베트 불교 교학의 특징이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인도 불교의 다양한 학파 중 가장 중요한 네 가지로 소승의 설일체유부와 경량부, 대승의 유식학파와 중관학파를 언급한다. 중관학파는 다시 청변 계통의 자립논증 중관학파(自立論證中觀學派, Svātantrika-Mādhyamika)와 불호, 월칭 계통의 귀류논증 중관학파로 나눌 수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소승 학파보다 대승 학파, 대승 학파에서도 유식학파보다 중관학파, 중관학파에서도 자립논증학파보다 귀류논증학파의 견해가 더욱 요의(了義)에 해당한다고 해석한다.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에 따라 티베트 불교에서는 중관학파 논서 가운데에서 용수(龍樹, Nāgārjuna)의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 성천(聖天, Āryadeva)의 《사백론(四百論, Catuḥśataka)》,[2] 불호(佛護, Buddhapālita)의 《불호근본중론주(佛護根本中論注, Buddhapālita- mūlamadhyamakavṛtti)》, 월칭(月稱, Candrakīrti)의 《입중론(入中論, Madhyamakāvatāra)》, 《명구론(明句論, Prasannapadā)》, 적천(寂天, Śāntideva)의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Bodhicaryāvatāra)》<지혜품> 등을 중시한다.

2. 《입중론》과 중관 사상 소개

2.1. 강연 영상

2020년 서울국제불교박람회 명상 웹컨퍼런스에서 티베트하우스 코리아 원장 겸 서울 삼학설행사(랍숨섀둡링) 주지 게쎼 텐진 남카스님은 일반인들을 위해 《입중론》등의 논서에 기반하여 티베트 불교의 종지(宗旨)인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기초적인 견해를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게쎼 텐진 남카, 2020 서울국제불교박람회 명상웹컨퍼런스 《입중론》강연 영상

2.2. 삼전법륜

파일:goldendeer.jpg
티베트 불교 사원 지붕에 위치한 법륜(法輪)상.[3]

대승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하고 이를 "세 번의 법륜을 굴렸다"는 뜻의 삼전법륜(三轉法輪)이라 칭했다. 첫 번째는 석가모니가 성불한 그 해에 사성제에 대해 설법한 사성제 법륜이고, 두 번째는 그 다음 해에 굴린 무상(無相)법륜, 세 번째는 바이샬리 지역 등에서 굴린 선변(善辯)법륜(분별법륜)이다.

삼전법륜을 설함에 따라서 대승과 소승불교의 사대학파가 생겨났다. 첫번째 법륜을 굴림에 따라서 유부와 경량부가 생겨났고, 두 번째 법륜을 굴림에 따라서 중관학파가 생겼으며, 마지막 법륜을 굴림에 따라서 유식학파가 생겨났다.

석가모니의 이러한 설법을 모두 통칭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 《팔만대장경》의 핵싱을 요약하면 《반야경》이라 할 수 있고, 이를 더 요약하면 《반야심경》이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보리심공성, 이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첫째는 동아시아 불교에서 익히 알려진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하여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라는 구절의 뜻이 바로 보리심의 마음이다. 즉 중생을 돕고자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그렇기에 보리심은 뿌리는 바로 자비심이다. 둘째, 공성에 대한 설명은 《입중론》을 기반으로 하여 후술하겠다.

2.3. 《입중론》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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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중론》의 저자 찬드라키르티
그와 같이 지혜의 빛으로써 광명을 밝힌
자신의 손에 놓은 암라(Amla) 열매처럼
삼계(三界)들이 본래부터 남김없이 발생이 없음을
깨달으니 명언(名言)의 힘으로 멸제(滅諦)로 나아간다.

항상 멸제에 속한 선정(禪定)이지만
의지할 데 없는 중생에게 자비심을 일으키고
그는 앞서 성문과 연각들을 남김없이
심식(心識)으로 복종시킨다.

세속과 진여(眞如)라는 거대하고 가벼운 순백의 날개를 펼쳐
백조의 왕은 백조 무리를 이끌며
선한 바람의 힘을 받아
부처님의 수승한 공덕 바다인 피안(彼岸)으로 날아간다.
《입중론》〈현전지〉(양지애 譯)

반야경의 직접적 주제는 공성이며, 간접적 주제는 도의 체계이다. 그 중 공(空)함의 체계는 석가모니가 예언한대로 용수논사가 해석하였다. 용수논사는 《중관이취육론》을 저술함으로써 심오한 공성에 대해 상세하게 밝혔다. 그 중 하나인 《중론》은 중도의 심오한 의미를 논리로써 확립한 논서이다. 이 논서에서는 실유론자(實有論者)들이 증익(增益)한 ‘아(我)’와 ‘법(法)’의 자성(自性)을 부정하여 유무(有無)의 두 가지 극단을 제거한 실상(實相)을 확립했다.

《중론》의 주석인 《입중론》은 인도어로 ‘마드야마까와따라(Madhyamakāvatāra)’, 티벳어로는 ‘우말라죽빠’라고 하며, 그 의미는 ‘《중론(中論)》에 들어간다(入)’라는 뜻이다. 사실 《중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그 가운데 월칭논사는 중론의 의미를 중점적으로 해석한 《입중론》과 그의 게송을 중점적으로 해석한 《명구론》을 저술하여, 용수논사의 의도를 자립논증학파와 공통되지 않으며 유식학파와도 차별화된 귀류논증학파의 방식으로 풀어내었다.

월칭논사가 쓴 중론의 주석서를 《입중론》이라고 하는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심오한 공성의 의미를 설하고, 둘째는 광대한 도(道)의 체계를 설하기 때문이다.

첫째, 《입중론》이 심오한 공성을 설함으로써 《중론》에 들어간다고 하는 방식은, 유식학파와 달리 외경(外境)과 식(識) 둘 모두 언설(言說)로 성립한다고 주장하며, 자립논증학파와 달리 자성(自性)으로 성립하는 것이 언설로도 존재하지 않음을 밝힘으로써 《중론》의 의도를 분명하게 해석한다는 것이다.

둘째, 《입중론》이 광대한 도의 체계을 설함으로써 《중론》에 들어간다고 하는 방식은, 광대한 도(道)의 차제(次第)를 기술함으로써 《중론》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중론》 자체에서는 광대한 도의 차제를 설하지 않았지만, 《입중론》은 용수 논사의 또 다른 논서인 《보만론》에 나타난 가르침으로 보완하여 범부지(凡夫地)에서 무학도(無學道)까지의 수행체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2.4. 성불하기 위한 두 가지 자량(資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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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중론》은 6지보살을 '백조의 왕'에 비유했다.

《입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세속과 승의의 광대한 하얀 두 날개로
백조의 왕은 많은 백조들을 앞서 가서
선행(善行)과 바람의 힘으로써
승자(勝者)의 공덕 바다로 건너갔다.[4]

육지보살(六地菩薩)인 백조 왕은 광대한 도의 체계와 심오한 도의 체계, 즉 이제(二諦)의 도(道)인 ‘광대한 하얀 두 날개’로 오랫동안 쌓아온 자량이라는 ‘바람의 힘’을 받아 ‘승자의 공덕 바다’로 건너갔다. 일체지(一切智)의 경지를 얻길 원한다면 육지보살이 행하는 것을 배워서 방편인 보리심과 지혜인 공성에 대한 인식, 이 두 가지 날개로써 정진해야 한다. 지혜와 방편이 부족하여 단편적인 도를 수습한다면 그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육십송여리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 선근으로 모든 중생이
복덕과 지혜자량을 쌓아
복덕과 지혜자량으로 생긴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을 얻게 하소서.[5]

《보만론》에서는
왕이여, 붓다들의 색신은 공덕자량에서 생긴 것이며
법신은 지혜자량에서 생긴 것이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자량은 부처를 얻는 원인이니
요약하면, 이러한 공덕과 지혜에 항상 의지하소서.[6]
라고 설하였다.

위 게송의 의미처럼 부처의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을 얻기 위해서는 두 자량을 함께 닦으며 실천해야 한다. 왜냐하면 결과인 법신과 색신 역시 각각 단편(單片)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7] 이처럼 원인인 방편과 지혜를 함께 닦지 않으면 원인이 분리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또한 색신과 법신의 쌍수(雙修)를 성취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결과에 색신과 법신 두 가지가 있으며, 원인에 지혜와 방편 두 가지가 있어야 하고, 따라서 그것의 대상인 두 가지 진리가 있어야 한다.

《대승보요의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보살은 능숙한 방편에서 벗어난 심오한 법성(法性)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방편과 지혜가 쌍수하는 것이 보살들의 올바른 행위이다.

2.5.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

《입중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무아(無我)는 중생들을 해탈시키기 위해서
법(法)과 인(人)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해졌다.[8]

《사백론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소위 ‘아(我)’라고 하는 것은, ‘타(他)에 의존하지 않는 사물들의 성품’이다. 그것이 없다는 것이 ‘무아(無我)’이다. 이것을 법(法)과 인(人)의 구분으로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법무아와 인무아이다.[9]

《입중론석》에서는
유신견(有身見)은 아(我)와 아소(我所)의 상(相)을 가진 염오혜(染汚慧)이다.[10]
라고 하였다.

상기 인용문에서는 부정(否定)대상인 아(我)가 무엇인지, 이에 대해 두 가지로 구별하는 방식, 이로 인해 두 가지 무아를 분류하는 방식에 대한 귀류논증학파의 주장이 다른 학파들과 다르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월칭보살이《입중론》과 《입중론석》등에서 이와 같이 주장하는 근거는 여러 경(經)과 용수보살의 논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
세존의 위신력으로 장로 사리불이 관자재보살 마하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떤 선남자가 반야바라밀의 깊은 행을 닦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배워야 합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관자재보살 마하살이 장로 사리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 누구든 반야바라밀의 깊은 행을 닦기를 원하는 자는 이와 같이 명확히 알아야 하느니라. 오온조차도 자성이 공함을 보아야 한다."
라고 설하였다.

《삼매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그대가 자아를 인식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 그와 같이 적용해야 한다.[11]

《성대집경(聖大集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아(我)를 어떻게 보는가? 그대로 일체중생들을 보아야 하고 일체중생들을 보는 그대로 모든 법을 알아야 한다.[12]

《보만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자아는 지(地)가 아니고 수(水)가 아니며
화(火)가 아니고 풍(風)이 아니며 허공(空)이 아니며
식(識)이 아니니, 모두가 아니라면
그 외에 무엇을 자아라 하겠는가?[13]

자아는 육계(六界)의 취합이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각각의 계 또한
취합이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 아니다.[14]

앞 게송의 “자아는”부터 “진실한 것이 아니다”까지는 자아에 대한 아(我)를 부정하기 때문에 아공(我空)을 가리키며, 나머지의 게송은 오온에 대한 아(我)를 부정하기 때문에 법공(法空)을 가리킨다. 자아는 자신이 이름 붙이는 대상인 사대(四大), 허공(空), 식(識) 등 육계(六界) 중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이 모두가 아니라면’이라는 것은 그러한 계(界)의 취합이 자아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자아는 육계에 의존하여 가설(假說)되기 때문에 진실하지 않다는 것이 인무아(人無我)이다. 또한 자아가 오온의 각각의 일부가 아니며 그것의 취합도 아니며, 또한 각각의 일부와 그것의 취합과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공(我空)의 의미이다.

뒤 게송의 ‘그와 같이’부터 ‘아니다’까지는 자아가 공한 것처럼 오온 또한 각각의 부분과 부분의 취합에 가설되기 때문에 진실하지 않다는 것이며, 이것이 법무아(法無我)이다.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자성으로 성립된 자체가 아(我)이며, 이것이 자아에 성립하는 것이 인아(人我)이며, 오온에 성립하는 것이 법아(法我)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자아가 자성으로 공한 것이 인무아이고, 오온이 자성으로 공한 것이 법무아이다.

귀류논증학파는 두 아(我)가 요점이 같다고 보기 때문에, 부정대상의 아(我)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하여 그것을 분류한 측면에서 두 가지 무아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공(空)함의 토대인 논제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하여 그것의 측면에서 두 아(我)로 구별하는 점이 유식과 자립논증학파와도 다르다.

자아라고 이름을 붙이는 대상인 육계도 자아가 아니고, 오온도 자아가 아니라면, ‘나’는 없는 것인가? 나는 고통과 행복을 경험하기 때문에 존재하며, 밥을 먹는 등 행동을 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의 존재 방식은 무엇인가? '나’는 오온에 의지하여 가설(假說)될 뿐이다.

자아와 오온이 공한 것과 같이 일체제법 또한 그와 같다고 앞에서 말한 《삼매왕경》에서 설하였다. 제법이 자성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이 제법의 궁극적 실상이며, 제법의 법성이며, 승의제이기도 하다. 자성으로 성립되지 않은 방식은 어떤 법이든 이름만으로 가설하여 존재할 뿐이며,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가설된 의미와 대상의 각 부분에서 찾으면 발견되는 것이 없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게셰 텐진 남카,《심오한 중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지혜의 등불》을 참고해야 한다.

2.6. 예시로써 공성(空性)을 설명함

파일:마차 부품.jpg

《입중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것(마차)이 승의나 세간으로
7가지 측면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지만
분석 없이 오직 세속에만 알려진 것과 같이
여기서 자신의 부분(支分)을 의존하여 가립한 것이다.[15]

《입중론》에서는
마차의 부분들의 취합이 마차가 아니며
마차와 아(我)는 같으니.
경에서 아는 오온에 의존한다고 말씀하시니
그러므로 오온의 취합은 자아가 아니네.[16][17]

예를 들어 마차는 마차의 바퀴 등 부분의 취합에 가설할 뿐, 마차의 바퀴 등 각각의 부분과 그것들의 결합, 그의 형태나 색깔 등은 마차가 아니기 때문에 마차는 그 부분 가운데서 찾으면 발견되는 것이 없다.
파일:CMMala3.jpg

또한 염주는 108개의 염주알로 구성되어 있지만, 염주의 각각의 부분들과 부분의 조합, 그것의 모양, 색깔 등 어느 것도 염주라 할 수 없으며, 염주 또한 그 부분들이 아니다. 108개의 알로 구성되며, 그 염주에서 알을 하나씩 빼내면 염주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즉 염주는 가립된 부분의 측면에서 발견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염주는 많은 부분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이 없이 존재하는 방식 또한 없으며, 이 부분들로 인해 ‘염주’라고 가설될 뿐이다.

만일 염주가 자신의 부분의 측면에서 성립되거나 염주의 부분 가운데 찾아서 발견되는 것이 있다면 염주가 자성으로 성립되며, 자신의 측면에서 성립되고, 실제로 성립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법은 자신의 부분에 의존하여 가립될 뿐이며 가립된 토대의 측면에서 성립되는 것은 없고, 가립된 토대의 부분 가운데서 찾아도 발견되는 것이 없다. 오온의 결합을 인정하는 그때, 마차의 바퀴 등 마차의 부분들의 모임이 마차가 되는 허물이 생긴다. 왜냐하면 마차와 아(我)는 자신의 부분의 결합에 가립되는 것이 같기 때문이다.

2.7. "나"를 찾는 방식

파일:Buddhist-Meditation2.webp
티베트 불교 명상 중에는 특정 주제를 깊게 사유하고 분석하는 분석 명상(Skt. vicārabhāvanā, Tib. dpyad sgom)이 있다.[18]

그와 같이 ‘나’는 오온(五蘊)에 의지하여 가설(假說)될 뿐이며 오온에서 ‘나’가 성립되는 것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 오온의 측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의미 역시 이와 같다. ‘나’는 온(蘊) 등에 가설하지만 오온 가운데 색(色)도 ‘나’가 아니고 수(受)도 ‘나’가 아니며 상(想), 행(行), 식(識)도 마찬가지로 ‘나’ 아니다. 오온의 다른 본질이 ‘나’의 사례가 될 수 없다.

"홍길동"의 오온과 그 부분의 조합을 "홍길동"이라고 가립하지만, 이 홍길동은 가립된 토대 가운데 찾으려 하면 그 부분의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홍길동"은 가립된 토대의 측면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며, 마음으로 가립될 뿐이다.

자아가 오온에 의지하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처럼 오온 자체도 각각의 부분에 의지하기 때문에 공하다. 이와 같이 일체법들이 각각 자신의 부분으로 인해 가립될 뿐이며 가립된 토대의 측면에서 성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어떠한 유분(有分)도 그의 부분의 측면에서 성립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립된 토대의 부분 가운데 찾으려 해도 발견되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면 법성(法性) 또한 자신의 부분에 의존하여 가립되기 때문에 승의(勝義)로 존재하지 않는가? 또는 가립된 의미를 찾아서 발견되는 것이 없는가? 이 또한 그렇다고 주장한다.

《팔천송반야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보리가 말하길 “천신들이여, 열반 또한 환(幻)과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하면 다른 법들은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천신들이 말하길 “성자 수보리시여, 열반 또한 환과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하는가?” 수보리가 말하길 “천신들이여, 나는 만일 열반보다 더 수승한 법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 역시 환과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한다.”

귀류논증학파는 식(識)과 식의 대상 둘은 분석한 끝에 발견되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같고, 분석한 끝에 발견되는 것이 없지만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또한 일체법은 명칭으로 가설하여 정립하는 것만으로 존재하며, 마음으로 가설해서 존재하는 것을 건립한 정도에 허물이 없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귀류논증학파의 특별한 특징은 아(我)와 아소(我所)의 법들이 자신의 측면에서 성립되지 않고 명칭으로 가립될 뿐이지만 행위의 체계는 매우 타당하다. 왜냐하면 일체법은 의존하여 가립된 연기(緣起)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월칭 논사를 비롯한 용수논사의 다섯 부자(父子)의 의도이다.

2.8. 유(有)ㆍ무(無)의 두 가지 아(我)

그러므로 많은 경과 논서에서 ‘아(我)’에 대해 기술한 내용은 두 가지로 구분되어야 한다. 언설(言說)로 존재하는 ‘아’언설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다. 전자의 ‘아’ 는 윤회와 열반의 토대가 된 ‘아’로서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아’가 없으면 업과(業果)가 소비되어 정진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통을 겪으면 이것이 내가 전에 지었던 업의 결과이며, 내가 행복을 겪으면 이것이 내가 전에 지었던 선업의 결과이다. 선악의 업을 짓는 자인 나와 결과인 고락(苦樂)을 경험한 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언설로 ‘나’와 ‘너’라고 분별하는 마음은 언제나 생기고, ‘내가 고통을 원하지 않고 행복을 원하는 마음’ 역시 저절로 생긴다.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중생들 마음속에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구생(俱生)이다. 이러한 행복을 원하는 자, 고통을 경험하는 자는 존재해야 한다.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해탈을 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업을 짓는 자, 과보를 경험하는 자, 윤회하는 자, 해탈에 다가가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교의 사대학파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후자의 ‘아’는 인아(人我)의 ‘아’와 법아(法我)의 ‘아’이자 공성 또는 무아를 확립할 때 부정해야 함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상술하였고, 다시 한 번 후술할 것이다.

2.9. 상견(常見)과 단견(斷見)

경론에서는 공성을 중관(中觀)이라 표현한다. 중관의 의미는 상견과 단견 두 가지를 여읨을 의미한다. 이 또한 제법(諸法)이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공하다고 확립할 때 자성으로 공하다는 것으로 상견을 제거하고, 연기이므로 전혀 없는 것이 아니며, 이로써 단견을 제거한다.

예를 들면 걸음을 잘못 디디면 떨어져서 사고가 생기는 곳을 절벽의 끝이라고 하며, 절벽의 양쪽 끝에서 벗어난 안쪽 가운데가 중간이라고 세간에는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이 여기서도 어떤 것을 취하면 악견(惡見)의 절벽에 떨어져 파멸되는 곳을 극단이라고 한다.

극단은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상견(常見)단견(斷見)이다. 첫째, 외도(外道)들이 주(主), 시바(Sîva)신, 하느님 등이 영원하다고 보는 것 등은 거친 상견이다. 자립논증학파 이하의 학파들이 ‘제법이 자성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과, 실유론자들이 ‘제법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들은 미세한 상견이다.

《중론》에서
어떤 것이 자성으로 존재하는 한 이것은 비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다.[19]
라고 설하였고,

《명구론》에서는
어떤 것이 자성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성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비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성이 존재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항상한 것(상견)으로 보게 될 것이다.[20]
라고 설하였다.

둘째, 외도들이 업과 과보, 삼보 등이 없다고 인식하거나, 사성제와 전생·후생이 없다고 인식하거나, 해탈과 일체지가 없다고 인식하는 것 등은 거친 단견이다. 그와 같이 자립논증학파 이하의 학파들이 ‘제법이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인식하는 것 등은 미세한 단견이다. 이러한 견해들을 가진 자를 단견에 머문다고 표현한다.

《중론》에서
전에 생겨난 것이 현재 없다고 말하는 것
이것으로 단견에 빠지게 될 것이다.
라고 설하였다.
《명구론》에서는
왜 사물과 비사물을 보는 것이 있으면 상과 단을 보는 것인가? 어떤 것이 자성으로 존재한다면 이것은 비존재함이 불가능하기에 상견이다. 전에 생긴 것이 현재 없다는 것, 이것으로 단견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자성으로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성이 존재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상견이 될 것이다. 예전에 머물던 시점에 사물의 자성을 인정하고, 현재 그것이 멸하기에 없다고 인정하면 단견이 되는 것이다.[21]
라고 하였다.

또한 《명구론》에서
만일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즉 모든 것이 없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그때는 이것이 전도된 분별이다.[22]
라고 말하였다.

앞의 말씀은 일체법이 공하다는 의미를 일반적으로 없거나, 있지 않음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전도된 견해라 설하는 것이다.

유와 유변(有邊), 무와 무변(無邊)을 구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악도(惡道)의 고통이 있다고 보면 상견에 빠지는 것이 아니며, 불지(佛地)에 허물이 없다고 보면 단견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있다는 것이 상견이 아니며, 없다는 것도 단견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구별을 하지 못해서 "있다고 인식하면 상견에 빠지고, 없다고 인식하면 단견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견(邪見)으로 인해 아무것도 작의(作意)하지 않는 것이 공성을 수습(修習)하는 것이라는 말이 생겼다. 부정대상 또한 아무 때나 파악하여 그것을 부정해서 수습할 때 아무 것이나 부정하면 아집(我執)에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는데다가 상견·단견에 빠지는 허물이 생긴다.

요약하면, 앞에서 부정대상을 파악할 때 설한 공성의 부정대상이 무엇인지 먼저 잘 이해하고, 그 다음 공성을 수습할 때도 그 부정대상을 부정한 자체 그것을 수습해야 한다. 그러면 상견과 단견에 떨어지는 허물이 생기지 않는다. 상견과 단견을 잘 파악하면 이러한 착란이 생길 이유가 없다.

2.10. 두 가지 장애

보통 장애라는 것은 어떤 법(法)을 증득(證得)하거나 그 상황을 관(觀)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장애라고 한다. 어떠한 대상을 보는 것을 방해하여 그것의 실상(實相)을 여실(如實)하게 보는 식(識)이 생기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Madhyāntavibhāga, dbus mtha' rnam 'byed)》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번뇌의 장애와 소지의 장애를 말한다. 이것이 모든 장애이다. 그것을 멸하면 해탈할 것이다.[23]

라고 말씀하신 대로 장애에는 두 가지가 있다. 번뇌장(煩惱障)소지장(所知障)이다. 장애를 둘로 분류하는 것은 얻어야 하는 궁극적인 대상이 해탈과 일체지 두 가지이기 때문에 이를 장애하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로 해탈에 장애가 되는 것이 번뇌장의 정의이고, 주로 성불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 소지장의 정의이다. 또한 식(識) 하나가 이제(二諦)를 동시에 보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 소지장의 정의이다.

수다원 등 성문·독각의 학인(學人)들이 공성을 수습(修習)하는 것이 해탈을 위한 것이며 그의 방편은 출리심(出離心)이다. 보살들이 공성을 수습하는 것이 성불하기 위해서이며 그의 방편은 보리심(菩提心)이다.

요약하면 공성을 수습하는 것이 성문· 독각의 해탈과 성불 3가지의 공통된 원인이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게셰 텐진 남카,《심오한 중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지혜의 등불》을 참고해야 한다. 수다원 등 성문·독각 학인들이 공성을 수습함으로써 번뇌를 대치(對治)하여 해탈로 가고, 보살들은 공성을 수습함으로써 소지장을 대치하여 깨달음에 간다.

3. 관련 서적

티베트 불교의 중관 사상과 관련된 국내 서적들은 다음과 같다.

[1] 나가(Naga, 龍)에게서 용궁에 감춰진 반야경을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2] 용수(나가르주나)와 성천(아르야데바) 같은 초기 중관논사들은 자립논증학파와 귀류논증학파 공통의 사상적 원류(源流)로서 범(汎) 중관학파에 해당한다. [3] 법륜이란 삼학(三學)과 삼장(三藏)을 말하는 것이다. 삼학이란 계학, 정학, 혜학을 말하며, 이 세 가지는 불교의 모든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체계 또한 삼학에 포함되어 있다. 삼장이란 삼학의 내용을 설하는 경과 논서를 의미하며 계학, 정학, 혜학을 설명함에 따라 경장, 율장, 논장으로 나뉜다. 사슴은 부처님의 제자를 표현한 것인데, 하나는 암컷과 다른 하나는 수컷이다. 이 두 마리는 토대인 승의제와 세속제, 원인인 지혜와 방편, 결과인 색신과 법신을 표현한다. 예전에 범천이 석가모니 부처께 금으로 된 법륜을 올리며, 법을 설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때 같이 있던 사슴 두 마리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이 '사슴 법륜' 로고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세존, 법륜은 불법, 사슴은 제자라는 의미가 있다. # [4] 《입중론》 6지 226게송. [5] 《육십송여리론》61게송. [6] 《보만론》3장 13게송. [7] 보살이 성불하여 부처가 될 때 법신과 색신을 각각 따로 성취하지 않으며, 동시에 법신과 색신을 함께 성취하여 부처가 된다. [8] 《입중론》 6지 149게송. [9] 《사백론석》, 중관부中觀部, 논장論藏(bstan 'gyur), 데게판(sDe dge), 1733. ba, 190쪽. 3줄. [10] 《입중론》, 중관부中觀部, 논장論藏(bstan 'gyur), 데게판(sDe dge), 'ai, 292쪽, na,7줄. [11] 《삼매왕경》, 경부經部(mdo sde), 경장經藏(bka' 'gyur), 데게판(sDe dge), da, 44쪽, na, 2줄. [12] 《성대집보정다라니대승경聖大集寶頂陀羅尼大乘經(寶星陀羅尼經等)’Phags pa ’dus pa chen po rin po che tog gi gzungs shes bya ba theg pa chen po’i mdo, Arya-mahasannipata-ratna-ketu-dharani- nama- mahaya-na-sutra》, Ye shes sde, 경부經部(mdo sde), 경장經藏(bka' 'gyur), 데게판(sDe dge), da, 44쪽, na, 2줄. [13] 《보만론》, 제1장, 80게송. [14] 《보만론》, 제1장, 81게송. [15] 《입중론》 6지, 158게송. [16] 《입중론》, 6지, 135게송. [17] 오온의 결합을 인정하는 그 때, 마차의 바퀴 등 마차의 부분들의 모임이 마차가 되는 허물이 생긴다. 왜냐하면 마차와 아는 자신의 부분의 결합에 가립되는 것이 같기 때문이다. [18] 달라이 라마가 아침마다 《중론》22장 첫 번째 게송의 '여래'를 '나'로 바꾸어 사유하는 것도 분석명상의 일종이다. 분석 명상에 관한 국내 서적으로 《달라이 라마가 전하는 우리가 명상할 때 꼭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19] 《중론》15품, 11게송. [20] 《명구론》15장 243 페이지 5줄, 바라나시 티벳불교대학, 2009. [21] 《명구론》15장, 242쪽, 20줄, 바라나시 티벳불교대학책, 2009. [22] 《명구론》 15품. [23] 《중변분별론》, 유식부, 논장論藏(bstan 'gyur), 데게판(sDe dge), 42쪽, na, 2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