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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1 22:47:01

테오도레투스

이름 키로스의 테오도레투스
(영어: Theodoret of Cyrus, 그리스어: Θεοδώρητος Κύρρου)
출생 393년
사망 457년
직위 키로스의 주교

1. 개요2. 생애3.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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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5세기경에 활동한 동로마 제국의 수도자, 성경 해설가, 역사가.

2. 생애

프랑스 교회 역사가 루이 세바스티앙 틸레몽트에 따르면, 393년 안티오키아에서 부유한 집안의 자식으로 출생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부모는 결혼 후 오랫동안 자식을 갖지 못하다가 12년만에 자식을 겨우 얻게 되자 '신의 선물'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는 부모로부터 받은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그리스어, 시리아어, 고전 문학, 철학, 신학을 숙달했다. 또한 은둔자 마케도니우스로부터 금욕주의를 지도받아 안티오키아에서 설교자가 되었다. 부모가 죽은 뒤 아파메아에서 수도자가 되었고, 423년 키로스의 주교로 선임된 뒤 금욕적인 생활을 지속하면서 이교도, 유대인, 아리우스파, 마르키온파를 개종하는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 그는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의 논쟁에 가담했다. 그는 안티오키아 대주교 요안니스 1세에게 네스토리우스가 성모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의 테오토코스(Theotokos)를 받아들이도록 주선해달라고 요청했고, 요안니스의 요청에 따라 키릴로스가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하는 이유에 관한 글을 보냈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를 개인적으로 적대하지는 않았기에, 431년 에페소 공의회 이후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몰고 가는 것엔 동의하지 않았다. 테오도레투스는 네스토리우스로 대표되는 안티오키아 파벌과 키릴로스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 파벌을 화해시키기 위해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여러 번의 중재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어느새 네스토리우스파로 몰렸다. 특히 네스토리우스의 친구 이레네오스를 티레의 주교로 추천한 뒤에는 완전히 네스토리우스파로 간주되었다.

449년 제2차 에페소 공의회가 열렸으나, 그는 회의 참석 조차 거부되었다. 공의회는 그를 이단으로 판결하고 모든 글을 불사르라고 명령했다. 결국 그는 키로스를 떠나 아파메아의 수도원으로 은퇴해야 했다.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사망한 후 교황 레오 1세에게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며 구원을 호소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의 부름을 받고 참석하였고, 네스토리우스파의 교리를 부정하는 조건으로 정통교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 후 키로스에 돌아가서 문필 활동에 전념하다 457년경 사망했다. 514년 안티오키아 대주교 세베루스로부터 이단이라고 비난받고 역대 키로스 주교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테오도레투스의 저작들을 불태우기로 결의했다.

3. 작품

테오도레투스는 수많은 저서를 남긴 작가였다.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저작들이 불태워졌지만, 그의 탁월한 글에 감명받은 이들이 끈질기게 필사하거나 보관했다. 9세기의 동로마 황제 레온 6세는 테오도레투스의 저작을 소중히 보관했으며, 미하일 프셀로스의 스승이었던 요안니스 마우로포스는 테오도레투스를 교회 박사로 칭했다. 서방에서도 르네상스 시기에 그의 작품들이 기독교 고전으로서 큰 인기를 끌었다. 피렌체 인문학자 아차이우올리는 그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훨씬 많은 독자들이 접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듯 인기가 많았던 덕분에, 그의 작품 대부분은 현재까지 전해진다. 427년에서 437년 사이에 <신성한 섭리에 관한 해석>과 <신성한 섭리에 관한 10대 담론>을 집필하였고, 440년대에 시리아 주교들의 금욕주의를 주제로 삼은 '시리아 주교들의 역사'를 출간해, 세속에 물들어가는 교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였다.

450년대에 집필된 <교회사>는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325년)부터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의 사망(428년) 사이의 기독교 역사를 다루었다. 소조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가 교회사에서 제국의 정치사에 관심을 가진 데 비해, 그의 교회사는 오로지 교회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집중하며, 교회의 적에 대한 지속적인 투쟁을 강조했고 그는 아리우스파 논쟁,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통치와 죽음, 이교 신전의 파괴, 페르시아에서 일어난 기독교인들의 박해 등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역사학자들로부터는 "소조멘과 소클라테스에 비해 객관성이 떨어져서 역사 탐구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비평을 받지만, 기독교 연구자들에게는 중요한 책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가 생전에 남긴 성경 주해는 당대 최고의 성경 해석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바울로의 서신에 관한 14개의 주석서를 남겼으며, 시편, 사무엘 등 선지자들, 열왕기, 연대기, 예레미아, 이사야, 다니엘서 등 성서의 방대한 부분에 주해를 남겼는데, 특히 구약 성경의 첫 8권의 논쟁적인 구절에 대한 문답을 정리한 주해서가 유명하다. 그는 주해서에서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걸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경은 비유와 은유로 이뤄져 있으므로, 그 의미를 탐구하여 해답을 얻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14세기의 수도자이자 역사가 니키포로스 칼리스투스에 따르면, 테오도레투스는 500통이 넘는 서신을 남겼다고 한다. 그중 현재까지 남은 편지는 179개이다. 이 편지들에서, 그는 주교의 의무를 상기시키고, 시리아 주교들의 엄격한 신앙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네스토리우스 키릴로스의 극한 대립을 어떻게든 중재하려 했다가 졸지에 이단으로 몰리게 된 그의 고뇌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