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배경
탈론은 뒷골목의 아이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그는 따뜻함이나 친절함 따위의 감정을 배우지 못했다.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최초의 장면은 컴컴한 녹서스의 지하 통로와 손에 쥐어져있는 칼 한 자루가 전부였다. 탈론은 저 혼자의 힘으로 녹서스의 음침한 뒷골목에서 성장했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짤랑대는 동전과 등을 기댈 수 있는 담벼락이 탈론에게는 가장 편하고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는 손기술이 누구보다 날렵했을 뿐만 아니라 도둑질을 잘했고 계산이 무척 빨랐다. 탈론의 뛰어난 검 실력을 두려워한 녹서스의 여러 길드는 그를 살해하기 위해 종종 암살자들을 파견했다. 길드의 대장들은 탈론에게 자신의 밑에서 일하거나 암살자의 손에 죽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종용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탈론은 암살자들의 시신을 녹서스의 해저에 버리는 것으로 응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암살 시도는 한층 더 빈번해졌다. 어느 날 또 한 번의 기습이 있었다. 탈론은 자신을 공격해온 자와 검으로 힘을 겨루는 결투를 벌였고 탈론으로서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암살자가 탈론의 검을 빼앗고 그를 바닥에 메다꽂은 것이었다. 암살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쿠토 장군이었다. 장군은 탈론에게 자기 손에 죽든가 녹서스 사령부의 스파이로 일하라고 말했다. 탈론은 장군의 제안을 수락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오직 한 사람, 자신을 쓰러뜨린 쿠토 장군만을 존경하고 모시며 오로지 장군만을 위해 일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탈론은 언제나 뒤 쿠토 장군의 지령을 따라 움직였다. 그림자 속에 숨어다니며 차가운 프렐요드의 땅에서부터 데마시아의 심장부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활약하며 비밀 작전을 수행하였다.[1] 장군이 실종되었을 때 아마 탈론은 다시 자유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쿠토 아래 일하면서 장군을 향한 그의 존경심은 이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는 장군의 소재를 찾는 데 점점 집착하게 됐고, 결국 쿠토를 납치한 자들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길을 떠났다. |
2. 칼날의 이름
해당 문서 참고.3. 길 위의 낯선 이
해당 단편소설은 본편의 탈론이 아닌 스킨 '하이 눈 탈론'의 배경소설이다.
테네시티에서 프로그레스로 가는 길은 적막하고 황량했다. 끝없이 펼쳐진 황야는 선인장들로 가득했다. 지평선 위로 자그맣게 보이는 목적지는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소몰이꾼은 마을을 바라보며 각오를 다졌다. 아직 물은 충분했고, 고용주에게 큰돈을 벌어다 줄 가축도 데리고 있었다. 무사히 마을까지 도착하기만 하면 됐다. 복잡할 건 전혀 없었다. 소들도 몰이꾼의 불안을 느꼈겠지만, 고맙게도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단지 울면서 계속 걸을 뿐이었다. 자비 없이 내리쬐는 태양 아래 검은 눈을 반짝이며, 말라 버린 땅 위에서 얼마 없는 풀을 찾아 뜯어 먹었다. 몰이꾼이 탄 암말에 뒤처지는 일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해 질 녘까지 프로그레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몰이꾼으로서는 그 정도면 족했다. 이 지역에서는 해가 떨어지고 나면 기이한 괴물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빨이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지옥사냥개, 썩어서 부풀어 오른 채로 사막을 배회하는 송장들, 자신의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박장에서 돈을 탕진한 자들을 노리는 외지인들까지. 따라서 밤이 찾아온 사막을 배회해서 좋을 건 전혀 없었다. 낮을 틈타 사막을 건너는 이는 몰이꾼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티끌처럼 작게 보였다. 게다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좀 더 가까워지자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채 앞서 길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몰이꾼은 의아했다. 북쪽 녹스 요새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나올 때까지는 아무도 못 만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오래된 길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제 몇 남지 않았고, 테네시티의 주민 대부분도 마을을 떠난 뒤였다. 몰이꾼은 멀리서 그 낯선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는 외투의 아랫단을 바닥에 질질 끌며, 햇볕을 피해 모자 아래 숨듯이 몸을 구부린 채 걸었다. 마치 태양이 자신만을 노려본다고 느끼는 듯했다. 방향을 바꾸는 일도 없이 똑같은 속도로 계속 걸었다. 결국 소들을 끌고 가던 몰이꾼은 조금씩 남자와 가까워졌다. 가장 먼저 말이 멈췄다. 귀를 목에 바짝 붙이고, 불안한 듯이 움직이며 씩씩거렸다. 길 위로 불던 바람이 잠시 멈추었다. 마치 미지의 세계에서 온 끔찍한 존재를 보고 문을 걸어 잠그는 마을 사람들과 같았다. 몰이꾼은 간단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데다 흙먼지를 마신 탓에 목소리는 거칠었다. "안녕하시오, 친구." 남자는 대꾸를 하지 않다가 이내 마른 흙바닥에 쓰러졌다. "세상에..." 몰이꾼은 급히 안장에서 내린 다음, 남자의 얼굴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안아 들었다. 남자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마치 새처럼 뼛속이 비어 있는 듯했다. 몸에서는 연기와 금속, 불 냄새가 났다. 남자는 말라서 갈라진 입술 사이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은 기도를 하거나 악령에 홀린 것과 비슷했다. "물..." "이런, 그래요!" 몰이꾼은 허리에 찬 물통에 손을 뻗었다. 물이 절반밖에 안 남았지만,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서 어쩔 수 없었다. 그 이야기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것으로 길 위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도와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악령이나 마녀가 되어 돌아온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몰이꾼은 외면할 수 없었다. 남자는 고마워하며 물통을 받더니 마른 목을 축였다. 몰이꾼 역시 목이 말랐지만, 이제 와서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남자는 소맷등으로 입을 닦았다. 물통은 깨끗하게 비운 뒤였다. 그리고 마치 사악한 저주에서 벗어난 듯이, 그제야 챙이 넓은 모자 너머로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을 올려다보았다. 황갈색 눈동자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몰이꾼과 비슷한 또래처럼 보였으나, 사막에서 고생한 탓에 초췌한 몰골이었다. 피부는 누렇게 떴고 색이 옅은 머리카락은 땀으로 흥건한 눈썹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남자에게서는 기이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 아름다움은 몰이꾼의 내면 깊은 곳에 잠든 본능적인 공포를 깨웠다. 마치 들불처럼, 솜씨 좋게 손질한 칼날처럼 아름다웠다. "고맙군요." 남자는 옅은 미소를 띠며 겨우 입을 떼더니, 물통을 몰이꾼에게 돌려주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보던 몰이꾼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별말씀을요. 괜찮습니까?"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남자는 몸을 일으켰지만, 이내 몸을 굽히더니 연신 기침했다. 몰이꾼은 반사적으로 남자를 부축하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상하게도 손 아래로 느껴지는 남자의 어깨는 깔끄러웠다. 낯선 사람에게 호기심을 품는 건 위험했지만, 몰이꾼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의 어깨를 잡은 손을 놓으며, 단단히 여민 외투 아래를 슬쩍 흘겨보았다. 안에는 희고 보송보송한 뭔가가 있었다. 깃털이었다. 곧바로 고개를 든 몰이꾼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난 괜찮습니다." 대답을 마친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모자챙의 그늘 아래로 눈이 번득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로 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프로그레스로 갑니다." 남자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대답했다. "마침 잘됐군요. 여행은 길동무가 있으면 더 즐거운 법이죠.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남자는 더는 쓰러지는 일 없이, 불안해하는 몰이꾼의 말 옆에서 천천히 걸었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발소리는 조용했으며, 길 위에 바위나 덤불, 죽은 동물의 뼈가 있어도 주춤거리지 않았다. 한낮의 더위 속에서 두 사람은 말없이 조용히 계속 걸었다. "프로그레스에는 무슨 일로 가는 겁니까?" 몰이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차를 타야 해서요." 남자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몰이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 위에서 침묵은 모두에게 가까운 친구이자 피해야 할 적이었다. 주변에 위험이 없다는 점에서 안심을 주지만, 불길한 예감은 떨치지 못한다. 자신을 노리는 존재가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소들은 이를 알고 하나같이 챙 넓은 모자를 쓴 낯선 남자를 지켜보았다. "도와준 보답을 하고 싶군요." 그때 남자가 침묵을 깼다. 가늘게 뜬 눈은 지평선을 향하고 있었다. "빚을 지는 걸 싫어해서요." 몰이꾼은 남자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기뻐서가 아니라 예의를 차리려는 미소였다. "괜찮습니다. 여행자끼리 서로 도와야죠." "참 친절하시군요." 남자의 말은 칭찬이 아니라 평가처럼 들렸다. "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도움을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몰이꾼은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그리고 위험한 호기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남자에게 물었다. "그럼 어쩔 생각입니까?"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으쓱했다. "서부에서 오래도록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려 드리죠. 아마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겁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몰이꾼은 소름이 돋았다. "굳이 안 그래도..."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요." 익숙하면서도 쓸쓸한 그 목소리에 몰이꾼의 미소가 희미해졌다. 몰이꾼은 안타까웠다. 밭의 작물이 다 썩으면서 어쩔 수 없이 가축을 도살해야 했던 그때, 아버지가 지었던 애석한 한숨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예감에 목이 메려는 순간, 남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가 예언했는지는 모릅니다. 진짜 예언자들은 오래전 진실을 이야기한 대가로 전부 죽었고, 남은 자들은 전부 가짜니까요. 하지만 이 예언은 사실입니다. 천국의 몰락 이전 이야기죠. 인간이 타락의 기쁨과 신성의 고통을 알았던 시절입니다. 왜냐하면 타락과 신성 모두 반대 입장에서 볼 때 의미를 지니니까요. 지금은 모든 게 신성 모독으로... 이런, 잠깐 딴 이야기를 했군요.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시작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미 끝난 일이니까요. 우리의 존재나 과오, 땅에 저지른 죄들을 되돌릴 방법도 없습니다. 하지만 끝은...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천국의 문이 무너지면 우리에게 종말이 온다고 하죠. 지옥과 인간이 땅을 전부 쥐어짜고 나면, 우리에게 최후의 심판이 닥친다고요. 삶과 죽음의 순환은 장사로 변질되어 수전노 사업가들에 의해 연기와 유황을 내뿜는 기계로 들어갈 겁니다. 이미 그 작업은 진행되고 있어요. 유황 열차와 그것을 다스리는 기계 마왕의 이야기를 들었을 테죠. 종말을 몰고 오는 존재는 다섯 전령들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 이곳으로 오죠. 남쪽에서는 첫 번째 전령이 상아색 말을 타고 옵니다. 그 과정에서 모든 영토를 정복하고, 인간들을 굴복시키거나 불태웁니다. 서쪽에서는 두 번째 전령이 천사들의 땅을 떠나,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 신성을 모독한 자들을 응징합니다. 사랑으로 벼려지고, 죽음으로 부서지며, 복수로 단련된 존재죠. 북쪽에서는 세 번째 전령이 그림자와 연기를 몰고 옵니다. 그리고 칼을 들고 죗값을 받아 내죠. 그분이 바로 배상의 여인이십니다. 동쪽에서는 네 번째 전령이 심해를 헤엄쳐 옵니다. 끝을 모르는 식욕은 어떤 것도 가리지 않죠.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모든 걸 집어삼킬 겁니다. 하늘과 땅에서는 마지막 전령이 죽음을 대동하고 옵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주변을 부패시키죠. 그리고 인간의 목숨과 영혼을 수확해, 천국과 지옥 너머 미지의 나라로 가져갑니다. 이 다섯 전령은 함께 움직입니다. 불균형의 결과물을 거두는 사악한 자들과 악마, 강철의 괴수를 죽이고 유황 열차의 왕을 쓰러트리겠죠. 서부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시계태엽 천사의 등장과 총잡이의 부활은 시작에 불과하죠. 이제 전령들은 끝을 보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전령의 등장이 혼돈의 폭풍을 몰고 와 서부의 죄악을 씻어 낼 거라고 하죠. 사악한 자들을 벌하고 새로운 인간의 시대를 시작할 거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우리를 다 죽이고 모든 걸 끝내려 한다고 생각하죠. 그때 남자가 다시 기침하며 휘청거렸다. 당황한 몰이꾼은 말에서 내려 남자가 쓰러지지 않게 붙들었다. 바로 옆에 서니 남자 이마의 쓸쓸한 주름이 보였다. 지쳐 보였던 것도 바로 그 주름 때문이었다. "그래서요? 전령들은 어떻게 한답니까?" 남자는 음울하게 웃으며 생각하더니, 기침했다. 그리고 목구멍에서 뭔가를 게워 내어 바닥에 뱉었다. 피범벅이 되어 엉켜 버린 하얀 깃털들이었다. 남자는 석탄 매연처럼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진작에 죽었어야 해, 친구. 그리고 높으신 분들은 우리 같은 죄인들을 가만히 두지 않으시지." 말을 마친 남자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멀어졌다. 몰이꾼은 그제야 남자의 한쪽 손이 지금까지 소매 안에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겨져 있던 손이 드러나자 마치 불경한 갈고리 발톱처럼 날카로운 손가락이 보였다. 그것은 지옥불에 끓는 기름처럼 검붉었다. 방울뱀이 허물을 벗듯이 손을 들어 외투와 반다나를 벗자, 남자의 몸이 드러났다. 강렬한 햇빛 아래에서도 남자의 몸 절반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왼쪽 어깨에서는 하얀 깃털이 나더니 팔과 가슴으로 퍼졌고, 결국 어둠으로 뒤덮인 부분과 경계를 이루었다. 몰이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상대가 당연히 인간이라고 생각했을까? 뒤에서 말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말은 눈앞의 낯선 존재에 대한 공포로 눈이 뒤집힌 채로 울었다. 몰이꾼은 도망칠 수 있었다. 아니, 도망쳐야 했다. 당장 말을 타고 도망치라고 본능이 소리쳤지만,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이 떨렸다. 모자챙 아래로 노려보는 그 낯선 이의 눈빛에 몸이 얼어 버렸다.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렸다. 몰이꾼은 의아했다. 근처에 선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떠오른 게 선로라니 안타까웠지만, 서부는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날카로운 손가락 위로 검이 튀어나왔고, 낯선 이는 천천히 다가오더니 몰이꾼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자비롭게 닦았다. 그리고 검을 몸에 찔러 넣었다. "고마웠다." 낯선 이가 검을 뽑으며 귀에 속삭였다. 바닥에 쓰러지는 몰이꾼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왔다. 멀리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5년, 10년 전만 해도 시체를 바라봐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 느낌이나 생각도 없었다. 힘이 절정에 달하고, 육신이 그림자에 가까운 형태였을 때는 시체조차도 남기지 않고 피의 갈망을 내키는 대로 해소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지났다. 낯선 이는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칼날이 묻은 피, 소몰이꾼의 숨이 끊어지는 소리, 오래전 말라 버린 초원을 향해 도망치는 말. 천사나 양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낯선 이는 고집스러운 영혼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리고 눈이 퀭한 그림자처럼 변한 영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공포와 호기심, 친절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지평선 너머 삶과 죽음 사이를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기다리다 보면 답이 나올 것처럼. 망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까? 그들은 아무 일에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어차피 머지않아 알 수 있으리라. 낯선 이의 발밑에서 땅이 진동했다. 기차의 기적 소리가 또 울려 퍼졌다. 마치 바람을 타고 온 죽음의 냄새를 맡고 수많은 독수리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천둥보다도 더 깊게 울리는 그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지면이 갈라졌다. 그리고 연기가 솟구치더니,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유황 열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는 그야말로 숯과 화염, 재와 석탄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괴수였다. 안에 탄 열차장만 해도 어떤 인간이나 괴물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그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누구든 미쳐 버릴 터였다. 해를 가려 땅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열차 아래로 선로가 생겨났다. 회전하던 바퀴는 점점 느려지더니, 결국 열차가 멈추었다. 문이 열리자 증기가 쏟아져 나왔다. 낯선 이는 열차에 타며 승무원 역할을 하는 악마에게 소몰이꾼의 영혼을 인도했다. 악마는 요금으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이 다음 칸으로 이동하자 갈비뼈 아래로 낯선 통증이 느껴졌다. 지옥으로 향하는 이 열차의 옆 칸에는 열차 남작과 부랑자, 신사와 총잡이, 소몰이꾼과 천사들이 타고 있었다. 열차 문이 닫히고, 낯선 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요금을 받던 악마에게 말했다. "너희 대장에게 탈론이 왔다고 전해. 얘기 좀 해야겠어. 전령들이 모이고 있거든." 악마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종종걸음을 치며 멀어졌다. 공기가 탁한 열차 안에는 낯선 이만 남았다. 선로 위에 멈춘 열차는 달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열차장은 까다로운 자였다.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에 취향도 고상했다. 창문은 전부 순은으로 줄세공 해 놓았고, 그 위에는 고급 벨벳으로 만든 커튼을 쳤다. 괜히 유황 열차의 요금이 비싼 게 아니었다. 그때 탈론의 시야에 뭔가 들어왔다. 누군가 다음 칸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탈론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뭘 쳐다보고 있어?" 사납게 윽박질렀지만, 소몰이꾼의 영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탈론은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때가 더 나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영혼에게 다가가 소몰이꾼이 살아 있었을 때처럼 사납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탈론의 눈빛을 보고도 영혼은 흔들리지 않았다. 전혀 동요가 없었다. "사과라도 하라는 거야?" 영혼은 계속해서 쳐다봤다. "내가 무슨 말을 해 주길 바라지?" 영혼은 계속해서 쳐다봤다. "그래, 미안해! 이제 됐어?" 영혼은 계속해서 쳐다봤다. 탈론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영혼의 목덜미에 손을 뻗는 순간... 영혼이 손을 들어 탈론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탈론은 울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애초에 자기들 것이 아닌 목숨을 잃었다고 우는 천사와 인간들을 보면서도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탈론의 가슴속에 비가 내렸다. 멈출 수 없는 폭풍이 사막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비를 몰고 왔다. 서부를 눈물에 잠기게 해 탈론을 삼켜 버리려는 듯했다. 탈론은 도망치듯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이 남기고 온 것들을 확인했다. 프로그레스로 향하는 쓸쓸한 길, 소몰이꾼의 시체에서 느껴지는 공허한 시선, 쓰러진 이를 밟고 지나며 황야에서 풀을 찾기 위해 배회하는 소, 피와 유황으로 물든 흰 깃털들이 보였다. 어쩌면 전부 마땅한 죗값을 치렀는지도 모른다. |
4. 구 배경
4.1. 리그의 심판
후보: 탈론날짜: CLE 21년, 8월 23일
관찰
성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