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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9:05

키츠레카와

1. 개요2. 역사3.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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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喜連川

일본의 성씨. 무로마치 막부 쇼군 가문 아시카가의 후예로 유명하다.

2. 역사

에도 막부에서 중시한 아시카가의 혈통으로 역사는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로마치 막부 시기엔 간토 지방에 쿠보(関東公方: 가마쿠라부)를 두어 통치했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약체화. 그러던 와중에 가독을 두고 내분이 발생, 간토 쿠보의 씨족 중 하나였던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明)는 간토 쿠보와 결별, 떨어져 나가 오유미 쿠보를 자칭하며 급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후호조씨와의 전투( 코노다이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하여, 오유미 쿠보의 세력은 급격히 쇠락, 요시아키의 아들 요리즈미(足利頼純)는 사토미 가문의 비호하에 살아갔다. 그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국 다이묘 후호조씨를 멸망시키고 같은 시기 요리즈미의 시마[1]가 히데요시의 측실로 들어간 이후, 오유미 쿠보의 후손은 다이묘로 복귀했다.

간토 쿠보는 최후의 직계였던 아시카가 요시우지(足利義氏)가 이미 적자 없이 1584년 사망한 상태라, 명문 아시카가 가문의 혈통 단절을 염려했던[2] 히데요시는 요리즈미의 장남 쿠니토모를 요시우지의 딸 우지히메와 결혼시켰으나 쿠니토모는 임진왜란 출병 중 조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키 지역에서 병으로 사망했고, 쿠니토모 사후 우지히메는 쿠니토모의 동생인 요리우지와 재혼했다

요리우지는 이 후 성을 아시카가에서 자신의 영지 이름을 성으로 삼아 키츠레가와(喜連川, 현재의 도치기현 사쿠라시)로 바꾸었다. 요리우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종전 이후 도쿠가와에게 승전 축하 사자를 보냈고, 이에 이에야스는 전대 막부의 예우 차원으로 키츠레가와를 으로 만들어서 요리우지를 번주로 삼았다. 고쿠타카는 겨우 5,000석이었으나 아시카가 가문의 유일한 다이묘라는 점 때문에 10만석 다이묘에 준하는 예우[3]를 해줬다.

메이지 유신 이후 키츠레가와씨에서 아시카가 성으로 복귀했고, 후손은 자작이 되었다.

현재 키츠레가와 계의 당주는 아시카가 코헤이(足利浩平). 코헤이의 아버지 아츠우지(惇氏)는 일본 오리엔탈 학회의 회장이었는데, 어릴적 역사 수업에서 중시조 아시카가 다카우지[4] 역적으로 가르치는 황국사관이 팽배해있던터라 적대적인 눈초리를 받을 때가 많아 역사 수업시간이 고역이었다고 회고했다(...).

3. 등장인물


[1] 정식 칭호는 게츠케이인(月桂院). 현재 도쿄 신주쿠에 있는 겟케이시(月桂寺)란 사찰은 그녀가 귀의하면서 이름이 바뀐 곳이다(이전 명칭은 헤이안지平安寺). [2] 다만 저 염려는 구실이고 사실상 간토 지방으로 들어온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노린 견제책이었다. 키츠레카와 쪽 자체가 예전의 간토 쿠보의 영역이었던 데다가 영지 주변이 모두 도쿠가와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3] 하지만 그 예우에 걸맞은 비용 지출이 들어갔기 때문에 체급이 모자랐던 키츠레가와 번의 재정은 늘 적자였다. 계획대로 [4]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으로 주군 고다이고 천황을 쫓아내고 괴뢰 천황을 세워 막부를 열어 남북조시대 난세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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