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80년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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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장성. 란주스 백작.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란주스 집안은 본래 프랑켄 출신이었다. 남아있는 사료에 따르면, 1619년 게오르크 란주스가 뷔르츠부르크 제국 의원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가족은 크로아티아로 이주해 그곳에 정착했고, 프란츠 요아힘 폰 란주스는 페터바르다인에서 감사관으로서 복무하다가 1739년 사망했다. 그는 트룬 백작 부인 안나 테레지아와 결혼해 프란츠 요세프와 칼 루트비히를 낳았는데, 두 자식 모두 오스트리아 육군에서 장군 계급에 올랐다.칼 루트비히의 생년 월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어린 시절에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하여 보헤미아 민병대에서 근무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4년 남부 보헤미아에서 이 민병대와 함께 프랑스-바이에른군과 맞서 싸웠고, 10월에 니콜라우스 요제프 에스테르하지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프로이센 보급로를 끊는 임무를 수행했다. 10월 9일 한스 요아힘 폰 치텐 백작의 후위대를 공격한 오스트리아군은 몰다우 강을 건너던 프로이센 선박 일부를 파괴했다. 이때 루트비히는 용맹을 떨쳤고, 그 공로로 대위로 승진했으며 남부 보헤미아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소규모 분견대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7년 전쟁이 시작되자, 루트비히의 연대는 보헤미아에서 출격해 슐레지엔에서의 오스트리아군의 작전에 참여했고 1757년 4월 15일 형 프란츠 요제프와 함께 '뵐렌부르크'라는 성씨를 하사받고 제국 백작이 되었다. 8월 13일, 루트비히는 프란츠 막시밀리안 얀누스 폰 에베르슈타트 장군이 이끄는 4,000명의 그렌에 포함되어 란데슈트 전투에 참가해 프로이센 분견대를 격파했다. 당시 그는 이미 중령 계급에 올라 있었다. 또한 그는 10월 26일부터 11월 14일까지 스바이드니츠 요새 포위전에 참가해 요새 공략에 기여했다.
1758년 5월 프로이센군이 모라비아를 침공했을 때, 루트비히는 아르노티케에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 수비대를 습격해 탄약고들을 모조리 파괴했고, 며칠 후엔 비올치체 근방에서 프로이센 보급 마차들을 파괴했다. 7월 7일, 그는 르노블 대령 휘하의 분견대를 이끌고 누마카 로데르니체 마을 근처에서 프로이센 호송대를 습격하기 위해 매복했지만 프로이센군이 이를 눈치채고 다른 길을 택하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다. 하지만 6월 8일 그들이 돌아오자, 루트비히는 공격을 개시해 언덕에 배치되어 있던 프로이센군을 몰아냈다. 그는 이 공적으로 대령에 승격했고 슬라보니스치 그렌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759년 8월, 루트비히는 프로이센군이 점령했던 그룬베르크 앞에 도착했다. 그는 수비대 지휘관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달아나려 했다. 루트비히는 이를 눈치채고 중도에서 습격해 프로이센 수비대 전원을 생포했다. 9월 12일, 르 글랑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루트비히의 소규모 분견대를 격파하기 위해 모라비아의 헤메노비체 방면으로 800명의 보병대와 200명의 후사르들을 파견했다. 이 소식을 접수한 루트비히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피세체냐에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 보병대 800명을 공격하여 100명의 병사, 대포 2문과 많은 수송 마차들을 포획했다.르 글랑 장군은 나머지 병사들을 수습한 뒤 뉘사로 퇴각했다.
1763년 6월 27일, 루트비히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11월 11일 마리아 테레지아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그는 1773년 5월 1일 중장으로 승진했고 1780년 3월 22일 빈에서 사망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아 후계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