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31230><colcolor=#fff> 카나쿠리 시조 金栗 四三 | Shizo Kanaku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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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1년 8월 20일 |
일본 제국
구마모토현 와즈미초 (현 구마모토현 타마나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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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3년 11월 13일 (향년 92세) |
신체 | 170cm, 64kg |
종목 | 육상 |
주종목 | 마라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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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前 남자 마라톤 선수였다. 하코네 에키덴[1] 개최에 힘을 써 온 것은 물론이고, 고도 훈련 제도를 도입하는 등 일본 마라톤계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며 마라톤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오사카의 명물 글리코 맨의 모델이 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2. 생애
구마모토현 와즈미초(현 타마나시)의 한 마을에서 8형제 중 7번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2살 때 야제병으로 집안의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고, 5살에는 체질에 이상이 생겼을 정도로 약했다.그러나 10살이던 1901년에 자택에서 학교까지 약 12km의 통학로를 근처에 사는 학생들과 매일 뛰다가 돌아오는 것을 시작으로 마라톤의 기초를 쌓게 되었다.
[navertv(42954960)] |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6부 - 올림픽 ·격동의 제전中[2][3][4] |
1911년 올림픽 마라톤 예선에서 세계 기록보다 더 좋은 기록을 내며 기대를 모았으나, 막상 본선인 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 일본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로 출전하여 레이스 도중 26.7km에서 일사병으로 쓰러져 인근 농가에서 치료를 받았다.[5] 하지만 경기중단이 대회 측에 전달되지 않아 "경기 도중 실종, 행방불명"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1966년 스웨덴 올림픽 위원회에서 올림픽 개최 55주년 기념 행사에 초청하며 마라톤을 완주해 54년 8개월 6일 8시간 32분 20.3초라는 기록을 남겼다. 스톡홀름 올림픽 이후에도 일본 국가대표 마라토너로 올림픽에 참가하며 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에서는 16위를, 1924 파리 올림픽에서는 기권으로 마쳤다. 선수 생활 후에는 교사를 맡았으며, 말년까지 일본에 마라톤을 보급하는 데 힘썼다.
[1]
매년 새해 때 도쿄와 하코네를 이틀동안 왕복해 가는 마라톤 대회이다.
[2]
2020년 6월 20일 방송
[3]
스톡홀름 올릭픽 부분에서 카나쿠리 시조의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며 영상 후반부에 스웨덴 올림픽의 기념 초정 부분이 영상으로 나온다
[4]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들을 수집하여 평화의 제전 올림픽의 격동을 시간 순서대로 다룬 다큐멘터리
[5]
그 당시 7월 날씨는 40도가 넘는 혹서기였기 때문에 선수 68명 중 34명이 기권을 할 정도였으며 포르투갈 최초의 마라톤 선수 였던 프란시스쿠 라자루 선수가 안타깝게도 열사병으로 사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