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癸丑獄事1613년( 광해군 5년)에 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1] 계축사화 또는 '칠서지옥(七庶之獄)', 그러니까 '칠서의 옥'이라고도 한다.
2. 옥사 이전의 정치 상황
1608년에 광해군이 즉위했다. 그리고 그의 지지 세력이었던 대북의 기자헌, 이이첨, 유몽인이 실세로 떠오른다. 그들이 집권하자 대북은 소북의 영수이자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류영경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2] 그러나 대북은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을 비롯한 소북에게 완전히 우위를 주지 못했고, 정권의 주도권을 제대로 잡지 못해 삼정승은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심희수를 비롯한 서인과 남인계 대신들이 차지하고 있었다.그러다가 1611년에 성균관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비롯한 사림 출신인 5명의 학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오현종사). 그러자 이언적과 이황이 명종 시절 때 소윤에게 협력하면서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했기때문에 이를 비루하게 본 정인홍이 회퇴변척소로 이언적과 이황에게 성균관이 제사를 지내는 것에 반대했다. 이러한 회퇴변척소를 기점으로 조정에서 여론을 모이기 시작하더니 1612년에 봉산옥사가 터지면서 대북은 정권의 우위를 서게 되었다. 그래도 광해군은 서인과 남인에게 안심을 주기 위해 위성, 익사, 정운, 형난공신을 서인, 남인, 소북, 대북에게 골고루 나눠주면서, 서인과 남인의 불안감을 해소하기도 했다.
3. 옥사의 발단과 진행
그러다가 어느 날, 강변칠우[3]의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이 조령에서 은 상인을 죽이고 은 6,700냥을 약탈한 형사 사건이 일어난다. 1608년,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김경손은 서얼 허통의 연명 상소를 올린 적이 있으나, 이가 거절된 이후부터 그들이 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은 냉소로 바뀌어갔고,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해졌다. 그들은 점차 과격해져서 도적질 따위를 일삼았는데 은 약탈 사건도 도적질의 일환이다.그 무렵 대북파는 왕위 계승권 분쟁으로 장차 위협이 될 수 있는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대북의 영수인 기자헌, 이이첨, 유몽인 등은 이 사건을 위조하여 그들을 제거하기로 한다. 대북파는 박응서로부터 허위 자백을 하도록 설득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응서는 박치의, 심우영 등과 역모를 모의했으며, 은 약탈은 같이 역모를 일으킬 무신들과의 교류에 필요했기 때문에 저질렀다는 것이다. 은 등을 뇌물로 주어 정협을 훈련대장에 앉히고 역모에 성공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한 뒤 소성대비( 인목왕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옥사가 시작되었다. 봉산옥사에 이어 광해군이 친국한다.
그러나 서양갑이 맨 처음 역모를 모의했던 이는 소성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라고 증언했다. 단 이것 역시 박응서의 자백처럼 거짓으로 보인다. 서양갑은 본디 박응서의 말에 완강히 부인했지만 어머니와 형이 고문 끝에 죽고 난 뒤 이 증언하기 전 날 "내가 나라를 뒤흔들어 어머니와 형의 원수를 갚으리라"라는 말을 했다는 점에서 보면 어머니와 형의 죽음에 분노하여 일 한번 제대로 키워 원한을 갚고자 한것으로 보인다. 정협 또한 역모에 고명대신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증언으로 사건을 키웠다. 그렇게 고명대신들이 끌려오게 되었는데, 대신 중 한 명인 박동량은 김제남과 인목왕후가 의인왕후의 무덤에서 저주를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에 대해서 사관은 인목왕후측 인물들이 의인왕후의 능에 저주를 한 것은 거짓이지만 선조가 병에 걸리자 그 이유가 공빈 때문 이라는 무당의 망언을 듣고 " 인목왕후측 인물들 즉 영창대군의 노비들이 공빈 김씨( 광해군의 친모)의 무덤에서 저주 행위를 시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임해군의 방해로 공빈의 무덤에 저주 행위를 시도한 것이 미수에 그쳤다"라고 기록했다. 광해군일기를 서인 일파에서 서술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소한 인목왕후측 인물들이 공빈 김씨의 무덤에서 저주행위를 시도 하려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애초에 인목왕후의 왕비 시절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녀는 정국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최소한의 처신도 못하는 사람이었으며, 친정아버지 김제남 역시 정치적 능력도 좋지 않으면서 대놓고 부정축재를 하며 광해군을 자극했기에, 인목왕후의 저주 건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의인왕후는 광해군을 친아들처럼 무척 아끼고 세자가 되는 데에도 적극 지지했으며, 광해군 역시 얼굴도 모르는 친어머니 공빈 김씨 대신에 적모인 의인왕후를 무척이나 따르며 친모처럼 모셨다. 그런 의인왕후로도 모자라 친모 공빈 김씨까지 저주한 사실이 맞는지는 둘째치더라도, 그러한 정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김제남과 인목왕후 부녀는 광해군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된 셈이며, 저주를 하려던 게 정말 사실이라면 김제남 일가는 죽어마땅한 죄를 지은 것이 맞다.
다만 사관의 평에 의하면 "미련하게 미혹된 노비들에 의해 꾀해진 지극히 사소한 일이며 궁가의 노복들이 서로 투기하고 미워한 나머지 나온 이런 말들은 대개 의거할 가치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옥사가 처음 일어났을 때 척리(戚里)의 집에서 많이들 빗대어 말한 것을 박동량이 마침내 헛소문을 가지고 부연해 말한 것이며 인목왕후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며[4] 실드쳐 주기는 했다. 실록 참조
그렇게 김제남과 그의 세 아들이 사사되면서, 인목왕후의 친정인 연안 김씨 가문은 거의 멸문되다시피 한다. 영창대군 또한 폐서인이 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가 위리안치되었다. 이후 1년 만인 1614년 유배지에서 의문사한다.
그리고 남인 혹은 서인이었던 신흠, 서성, 한준겸,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허욱, 한응인, 심희수 등도 몰락하여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특히 영의정과 좌의정도 대북세력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육조판서 또한 대북세력에 완전히 넘어갔다. 이이첨이 예조판서 자리를 차지했다. 다만 우의정이 서인 무당파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고 1615년을 기점으로 우의정 또한 다시 대북세력에 넘어간다. 다만 이 당시까지의 영의정은 대북에서는 어느 정도 온건파였던 기자헌이지만, 폐모론 이후로는 영의정 또한 대북에서 강경파인 정인홍이 차지를 하게 된다.
4. 옥사 이후 관련자 처벌과 사후 신원 및 복권
아울러 이 시기를 이후로 광해군의 완전한 흑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5] 한편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이 이끌었던 소북은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죽음 및 서인과 남인들의 정계 축출마저 방관하며, 광해군과 대북의 옥사와 그에 대한 처리와 정책에 대해서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로 인해 서인과 남인은 완전히 대북과 소북에게 실망해버렸다. 결국 서인과 남인은 광해군, 대북, 소북을 몰아내기 위해 인조반정의 기반을 마련하고야 말았다.한편 인조반정이 성공한 직후에 서인과 남인은 광해군 시기의 과거 청산을 위해 북인 처벌 문제를 논의했다. 광해군 시기에 광해군의 정책에 반대하여 유배를 간 북인은 살렸지만, 북인 정권 시절, 실력자였거나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측근세력들은 죄가 크게 여겼기 때문에 단호하게 처벌했다. 한편 광해군과 북인 정권 시절에 옥사로 유배를 가며 목숨을 잃은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군은 죄가 벗겨지고 신원이 되면서 명예를 회복했다.
이 무렵, 이이첨, 유몽인, 정인홍, 기자헌, 류희분을 비롯한 북인 실력자들이 처형되었고, [6] 박승종은 처벌을 당하기 전에 자결했다. 이러한 엄격한 북인 처벌에 반발한 박홍구, 유효립, 임취정 등은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거사를 세웠지만, 이내에 발각이 되어서 처형되었다. 이후에도 북인들은 1629년에 후금과 내통해 반역을 꾀했다가 들통 난 양경홍의 역모사건과 1631년에 발각된 정한추대사건[7]등을 꾸몄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이렇게 해서 북인 정권 시절, 옥사와 관련이 깊었던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 임취정을 비롯한 북인 영수들은 서인과 남인에 의해 처벌되었는 바람에 북인은 영향력이 많이 약해지고 완전히 사멸당하고 말았다. 이후에 살아남은 남이공과 김신국을 중심으로 북인을 이끌다가 남인에게 흡수되었다.[8][9]
5. 같이보기
[1]
살인, 반역 등의 중대한 범죄. 혹은 이러한 범죄를 다스리는 일.
[2]
사실 유영경까지는 어쩔 수 없던게 워낙 대놓고 광해군의 계승을 방해하려 한지라 같은 소북들조차 줄을 바꿔달았을 정도였다.
[3]
그들이 만난 정자의 이름을 무륜정(無倫亭)이라고 지었다. 서얼 출신이라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7명의 서자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허홍인, 박치의, 이경준, 김경손이 이룬 모임. 심우영은 허균의 처외삼촌이며, 1617년 기준격의 상소에 의하면 허균이 공주 목사일 때 심우영과 이재영과 매우 친한 관계였다고 하며, 심우영과 서양갑은 허균이 "친히 기른 자들"이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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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당의 망언에 휘둘린 멍청한 노비들이 윗전의 허락도 받지않고 개인적으로 벌인 만행에 불과하며 심지어 저 영창대군의 노비들이 저주를 행했다는 증언도 신빈성 없는 헛소문인데 이를 박동량이 혼자 살아남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는 바람에 옥사로까지 발전되었다는 의미다.
[5]
이후 폐모론 때의 일을 생각해보면 흑화도 제대로 흑화가 되어버렸다.
[6]
다만
기자헌과
유몽인은 온건파라 그런지 반정 당시에는 살았지만 유몽인은 유응형이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모함을 해 아들 유약과 함께 처형 당했고 기자헌 역시 이괄의 난이 터지자 사사당했다.
[7]
이 역모에 정인홍의 조카들도 참여하였다.
[8]
그나마 이들에 의해서 한동안 유지될 수 있던건 김류 때문이라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인조시절 초기는 공신들 중 가장 거두가 이귀와 김류였다. 그런데 왕의 총애는 김류가 더 많이 받았지만 정작 집권당이라 할 수 있는 서인 내에서는 김류가 더 약해서 부족한 세력을 보충하기 위해 북인, 남인과 연대한 것이 아닌가 말하기도 한다.
[9]
반대로
정창연의 가문처럼 서인으로 전향하여 오히려 중추가 된 사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