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천양쇠(千梁釗) |
생몰 | 1886년 8월 26일 ~ 1964년 3월 23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안동군 동후면 노산리 |
사망지 | 경상북도 안동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천양쇠는 1886년 8월 26일 경상북도 안동군 동후면 노산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5일, 유연성· 유동수·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 박재식· 유교희·박진선(朴晋先)·유곡란(柳谷蘭) 등은 편항 장터 동편에 있는 공동 타작장에 모여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3.1 운동에 대해 논의했다. 그들은 편항 장날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각자 구역을 나눠 군중을 동원하기로 했다. 천영쇠는 이 계획을 듣고 적극 찬성했고, 3월 21일 오후 2시 편항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군중을 인솔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이때 편항주재소에서 2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자인 유연성과 배태근(裵太根)을 체포하려 하자, 그는 군중과 함께 경찰들에게 달려들어 주재소로 쫓아버렸다. 이후 그는 군중과 함께 편항주재소로 달려가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일본 경찰 내전(內田)이 공포를 발사하자, 그는 분노가 폭발한 군중과 함께 주재소의 유리창·책상·의자 등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또 일본 경찰로부터 빼앗은 대검과 소내에 비치되어 있던 장총·칼·탄환·제복 등을 거두어 그곳 우물안에 버렸다. 이때 2명의 일본 경찰이 신덕리 방향으로 도망치자 이를 추격해 그 중 한 명을 붙잡아 구타했다. 이후 그는 군중과 함께 경찰관의 사택도 습격하여 완전히 파괴했고, 경찰 가족은 모두 피신했다.
3월 21일 오후 5시경, 그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문서류를 파기했고, 자졍 무렵엔 파괴해 버린 주재소의 판자로 모닥불을 피우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출동한 안동경찰서 순사들에게 체포된 그는 1919년 8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안동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4년 3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천양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199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